1945년 해방 이후 1947년까지의 역사 요략. p
01.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남쪽에서는 즉시 건준,인공이 선포되고 전국적 단위에서 인민위원회 조직됨. 이들을 주도한 세력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했던 좌파적 경향의 인사들로서 광범한 민중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음. 친일파 척결, 일본인 기업과 토지의 국유화, 토지개혁을 지향하고 자체적으로 행정, 치안 더 나아가 군대조직 건설 착수 및 운영시작. 이런 의미에서 혁명적 성격. 반면 일제 강점기 일제에 기대어 재산과 권력을 누렸던, 한민당으로 대표되는 소수 기득권 세력은 크게 위축되어 미국의 진주와 (그들의 부족한 도덕적 명분 보강해 줄) 임정인사와 이승만 등 외부 망명인사들을 기다리는 처지.
02.
미 군정은 이런 정황을 제 나라 이익에 반하는 혁명적 상황이라 판단하고 건준,인공,인민위원회를 불법조직으로 규정, 탄압하면서 남한에 미국 이익에 도움되는 단독정부 세울 것을 초기부터 결정. 이를 추진하기 위해 미군정은 일제 강점기의 부일관료, 경찰, 군인들을 그대로 쓰면서 기존의 식민기구를 그대로 활용하고 지주와 친일파의 이익 대변하는 한민당과 협력 ---> 민중들과의 충돌 불가피.
03.
1946년 10월 미군정의 무리한 공출로 인한 굶주림, 전평과 전농 등 기층민중 조직과 전국 인민위원회에 대한 탄압, 민중들이 증오하던 경찰과 관료들의 재등장...등에 분노한 민중들이 전국 차원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봉기 --> 군정과 경찰의 잔혹한 진압으로 전평, 전농, 인민위원회 등의 민중세력이 결정적으로 약해짐.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서청, 족청, 대동청년단 등 여러 극우 청년조직 결성, 동원되면서 1947년부터는 극우파가 힘의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좌파는 궁지에 몰리기 시작함.
04.
1946년 말 인민위원회 투쟁의 흐름을 이어받아 남로당 창당. 1947년, 무장투쟁보다는 정치조직 강화와 파업 등에 집중. 주로 도심에서의 시위, 전평의 파업 등에 주력 --> 그들의 시위는 경찰의 방해나 대량검거로 사전에 제압. 1947년 3월 22일의 좌익조직 전체 연합한 대규모 파업전개 --> 경찰 약 3,000명 검거. “사실상 모든 좌익 지도자” 체포. 조직이 거의 노출되어 역량의 극심한 파괴 및 소진.
05.
1947년 우익의 우세확보와 극우청년단체의 발호: 1946년 말 가을봉기 이후 조선민족청년단(하지가 자금지원한 미군정의 공식기관. 이범석), 서북청년회(1946년 11월 30일 결성. 창설 1주년 기념식에 이승만, 김구, 조병옥, 장택상 참석), 대동청년단(우익의 모든 단체 규합, 이청천), 광복청년회 그리고 이승만의 대한독촉청년총연맹 등의 청년대중조직들 결성. 이 청년단체들을 이승만, 이범석, 조병옥, 장택상...등의 우익인사들이 후원. 경찰을 보조하고 파업 분쇄하거나 노조파괴, 야당의 시위를 무너뜨리고 좌익마을 공격, 유격대 공격으로부터의 방위, 좌익정당의 사무실과 신문사 공격.. 등의 역할수행. 청년단체의 많은 인원이 한굮군 입대. 1947년 좌익의 주요 청년단체는 조선민주청년동맹.
06.
1947년은 경찰의 노골적인 지원, 군정의 암묵적지지(혹은 적극적인 경제적 지원)를 배경으로 한 극우 청년단체 전성시대 --> 극우파의 전횡에 반대하는 세력에 대한 테러와 살해 만연(사례:우익청년단원 4명 폭력혐의로 기소한 검사보 정수박 암살. 그러나 아무도 문제삼지 않음). 그리고 전국적 단위에서의 인민위원회의 대규모 저항과 잔혹한 진압. 1947년 5월 이후부터 청주, 장승포, 영덕, 광주, 강릉, 하동, 마산, 군산, 목포, 대전, 안의, 대산, 고성, 통영, 삼척, 강릉, 주문진...등에서 500명~50,00명 단위의 인민들이 경찰서나 우익청년단체 습격 혹은 항의 --> 경찰의 발포와 극우 청년단체의 테러로 무수히 학살당함. 이는 곧 내륙에서 무수하게 행해진 ‘내륙版 4.3항쟁’ 이라 할 수 있음.
07.
1947년 미국 볼드윈의 내한기록 “이 나라는 말 그대로 경찰기관과 개인적 테러가 지배하고 있다” “전체적인 인상은 사람들이 구타당하고 실의에 빠져 있는 것 같다.” 1947년 7월 19일 경찰의 은밀한 도움이 의한 여운형 암살. 47년 말, 장덕수 암살. 일제시의 경찰수보다 미군정 하 경찰수가 두 배로 증가하고 정치범 폭증함.
08.
이것이 1947년까지의 대략적인 흐름이다. 심히 위축되어 있던 숭미친일 기득권 세력이 46년 말부터 대세를 장악하게 된 가장 주요한 요인은 당연히 미군정의 지원이다. 미군정은 극우파는 지원하면서 극우 친일 기득권 세력에 반대하는 세력은 잔혹하게 진압했다. 또한 극우는 신탁통치 논란에서 반탁을 주장하면서 졸지에 “반공을 명분으로 한 애국자”로 신분을 세탁하면서 이념전쟁 측면에서도 주도권을 잡았다.
실제로 장시간 신탁통치를 주장했던 건 미국이었고 당시 논의된 이른 바 신탁통치안의 핵심은 사실 “한국인에 의한 과도정부 수립 후 독립”이었다. 이걸 동아일보가 왜곡보도했던 것이다.
09.
1946년말 이후로 독립과 통일 진보적 민주주의를 지향했던 인민들은 수없이 죽음을 당하며 궁지에 몰리기 시작했다. 민중들은 1948년에 제주도 4.3민중항쟁/여수14연대 항명항쟁 등의 과정 거쳐 수없이 학살당하며 어쩔 수 없이 입산투쟁을 선택한다. 1949년의 보도연맹 창설과 1949~1950년 약 1년 동안 38선 부근에서 남북간 벌어지는 무수한 전투를 겪는다.
10.
1950년 6월 25일 이후 3년 동안의 전면전. 해방 이후 8년의 그 기간 동안 舊친일세력이 미국의 힘을 등에 업고 부활하는 꼬라지를 증오하고 반제반미, 분단반대, 독립, 통일, 진보적 민주주의 건설을 지향했던.. 인민위원회라는 조직으로 자신들이 지향하던 바를 실현하려 했던 백여만 인민들이 목숨을 잃는다. 그리고 미국에 의해 기사회생하여 육성된, 당시로서는 한 줌 기득권 세력과 그 후예들이 아직까지도 이 대한민국의 진골, 성골이 되어 핵심 엘리트로 행세하는 것이다.
11.
좀 더 가보자. 4.3,여수,보도연맹.. 그리고 전쟁.
[14. August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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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이사야서 49,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