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e-Le

‘기억과 전승‘

행복나무 Glücksbaum 2024. 8. 31. 06:13

이사야서 53, 7. 14, 4- 9
찬송

“그는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마치 떨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암양처럼, 끌려가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사야서 53,7)

신입생 면접 때 학생들 하나하나 이름으로 불러주시고 우리를 면접 교수님들 앞으로 일일이 안내하신 분, 그는 짧게 스포츠머리를 한 청년 김찬국이셨습니다.
우리는 그가 4학년 선배라고 착각했습니다. 선생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첫 수업은 아마도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는 인품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제가 신과대학에 무시험 입학하던 1959년 2월, 그 무렵 저는 아직 김춘수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를 만나기 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선생님을 따라 제가 동문들 이름을 열심히 기억했는데, 친구들의 “이름 불러주기”는 10년 전 저의 70대 중반까지였습니다.

오늘 여기 참석하신 분 중, 명단을 보면 기억나는 이름들이 있는데, 얼굴과 이름을 일치시키는 일은 이제 제게 힘듭니다. 최근에는 세브란스병원 신경과에 다니면서 각종 검사도 받고, 기억력 상실을 늦추는 약도 처방받는 덕분에 아직 몇몇 분의 존함은 기억합니다. 이따가 저 보고 “나 누구냐?”고 묻지 마시길 바랍니다.

1학년 1학기에 고영춘(高永春) 교수의 구약통독(舊約通讀)을 이수한 다음 과정은 2학년 1학기 김찬국(金燦國) 교수의 구약성경개론(舊約聖經槪論)이었습니다. 이것은 구약성서에 대한 비평적접근(批評的接近)을 소개받는 과목이었습니다. 본문비평(本文批評), 자료비평(資料批評), 양식비평(樣式批評), 정경비평(正經批評), 편집비평(編輯批評), 고대근동문헌(古代近東文獻)과 구약의 비교, 성서고고학(聖書考古學) 등은 근본주의(根本主義) 목사 밑에서 착하게 곱게 자란 시골 목사 아들을 기절(氣絶)시키기에 넉넉했습니다. 김찬국 선생님은 당신의 환자들을 인내심을 가지고 잘 돌봐주셨습니다. 절대로 강요하지 않고, 오히려 학생의 관점에서 학생의 좌절에 공감해주시는 분이었습니다. 성경에 대한 비평적 접근을 가르치면서도 당신 자신도 지금 무척 놀라고 있다고 짐짓 학생의 좌절을 편들어주시곤 했지만, 지나놓고 보니까 제가 성경의 형성 과정에 대해 절망을 넘어서서 평생 성경학도가 된 것에는, 선생님의 동행(同行)과 격려(激勵)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선생님의 강의에서 매력적이었던 것은, 구약성경 형성과 관련된 기억(記憶)과 전승(傳承)이라는 개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역사를 기억(記憶)과 구전(口傳) 전승(傳承)의 결과로 집대성된 것임을 우리에게 쉽게 설명하려고 애쓰신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분들과 김찬국기념사업회는 선생님을 기억하고, 선생님의 삶과 가르침을 구전하는 구전(口傳)의 운반자(運搬者)들 혹은 구전담지자(口傳擔持者)들입니다.

선생님과 공동번역 성서.
우리나라에서 군사독재시절(軍事獨裁時節) 박정희(朴正熙, 1917~1979) 말기에, 선생님은 엄혹한 유신독재시절(維新獨裁時節) 1975년 긴급조치 1호와 4호 위반으로 해직된 바 있었습니다. 해직 기간 동안에도 선생님은 여러 기회에 여러 곳에서 설교를 통해 예언자의 메시지를 전하셨는데, 이전과 다라진 것은 1977년 이후부터는 <개역한글판>(1956/1961)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새로운 번역, 특히 <공동번역성서>(1977)로 성경을 일고 말씀을 전해주시곤 했습니다.

“망할 것들! 권력이나 쥐었다고 자리에 들면 못된 일만 꾸몄다가 아침 밝기가 무섭게 해치우고 마는 이 악당들아, 탐나는 밭이 있으면 빼앗고, 탐나는 집을 만나면 제 것으로 만들어, 그 집과 함께 임자도 종으로 삼고, 밭과 함께 밭주인도 부려먹는구나.” (1977년 「공동번역」 미가 2, 1- 2 )

이러한 예언서 본문을 소개하면서 감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선생님은 또 우리 역사에서 쿠데타의 주역이 암살되자(1979.10.26.), 어느 설교에서 이사야서 14, 4- 9 본문을 읽으면서 역사를 심판하시는 하느님의 정의를 외치곤 하셨습니다.
“4 ... 웬일이냐 , 폭군이 죽다니, 그 시퍼런 서슬이 사라지다니. 5 야훼께서 꺾으셨구나. 6 성이 나서 백성들을 치고 또 치더니... 7 이제 온 세상이 한숨돌리고 평온해져 모두들 환성(歡聲)을 올리게 되었구나. 8 삼나무와 레바논의 송백까지도 네가 망한 것을 보고 손뼉치며, 네가 쓰러진 후에는, 아무도 저희를 찍으러 올라오지 않는다고 좋아하는구나. 9 저 땅 밑 저승은 너를 맞기 위하여 들떠 있고, 한때 세상을 주름잡던 자들의 망령을 모두 깨우며 모든 민족의 왕들을 그 보좌에서 일어나게 하는구나.(1977 「공동번역」 이사 14, 4- 9)

새로 번역된 현대어 성경. <공동번역성서>(1977)는 달리 해설이 필요 없을 만큼 번역이 명쾌했습니다. 1980년 ‘서울의 봄’ 기간에 잠시 복직되었으나 이내 다시 해직되어 10여 년간 해직 교수로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아마 우리 선생님이 설교하실 때 성경 본문을, 미가나 이사야 본문을 1956년판 「개역」으로 읽으셨다면, 개화기문체에 전혀 익숙하지 않았던 유신독재주역(惟新獨裁主役)들과 그 하수인(下手人)들은 이 성경 본문 인용을 문제 삼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대한성서공회(大韓聖書公會) 도서관 귀중본 서고에는 1977년 부활절에 초판이 나오고, 1980년 1월 15일에 14판으로 발행된 (발행인-김주병), 보진재(保眞齋) 인쇄소(印刷所)에서 나온 『공동번역성서』가 보관되어 있습니다. 속 표제지(標題紙 title page)에 보면 인장(印章) 두 개가 찍혀 있습니다. 하나는 1980년 2월 2일자 서울특별시문화재담당관실에서 접수(接受)를 확인하는 (지름 3cm의) 청색(靑色) 잉크 인장이고, 다른 하나는 1980년 2월 2일자 계엄사령부(戒嚴司令部)가 검열을 마친, 검열관의 (지름 4.8cm) 검열필 적색(赤色) 도장입니다. 계엄사령부가 번역 성서를, 검열한 드문 경우입니다. 우리 선생님이 공동번역으로 성경을 읽지 않았더라면 이런 검열은 없었을 겁니다.

선생님은 해직 기간 10여 년간, 해직 기간 내내 가방 속에 책을 넣고 다니며 판매하셨습니다. 판매 대금으로는 옥에 갇힌 제자들 영치금(領置金) 넣고, 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저는 그에게서 이사야가 묘사한 고난받는 종의 모습을 떠올리곤 했습니다.

그는 온갖 굴욕(屈辱)을 받으면서도 입 한번 열지 않고 참았다. 도살장(屠殺場)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羊)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깎이는 어미 양(羊)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이사야서,공동 53,7)  

하느님의 자비가 선생님의 자녀손 위에, 그가 사랑하시던 제자들 위에, 언제까지나 함께하시길 빕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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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설교, 민영진목사께서 ‘김찬국교수 15주기 추모 모임’에서 감동적인 설교를 해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