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암과 민충사, 그리고 금강정과 흘러가는 강물...,
영월춘향, 노옥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와
단종을 따르던 시녀들과 이름모른 시종들의 애뜻한 사연이 담긴 곳.
지금은,
봉래산과 강 만이 아는 속요와 설화들이
노래하며 속삭이는 곳,
조선시대 영월에 고순익(高舜益)이라는 선비가 살았는데
자식이 없어 태백산 산신령께 자식 점지 백일기도를 드렸다.
그렇게 해서 딸을 얻자 귀한 딸이라 하여 노옥이라 이름 지었다.
노옥은 다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3년 뒤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린 동생과 함께 이웃에 사는 기생 추월의 수양딸이 되었다.
세월이 흘러 추월이 늙자
노옥은 경춘(瓊春)이란 이름의 기생이 되었고,
남다른 미모와 가무 솜씨로 많은 유혹을 받았으나 몸가짐을 바르게 하였다.
1771년(영조47년) 1월 19일 영월부사로 부임한 이만회는 시랑 이수학과 함께 영월을 찾아왔다.
수학은 금강정의 빼어난 경치를 둘러보다가
강 건너 냇가에서 빨래하는 경춘을 보고 나룻배를 타고 건너가서 만났다.
그 후 둘은 깊은 사랑에 빠졌다.
1년 뒤 이만회가 전교를 받고 한양으로 떠나게 되니 시랑인 수학도 따라가야 했다.
수학은 떠나면서 입신해서 꼭 다시 찾아오겠다고 언약의 글을 경춘에게 남겼다.
그해 새로 부임한 영월부사가 경춘의 미모에 반해서
수청 들라고 강요하였으나 이수학과 맺은 언약과 증표를 보이면서 거절하였다.
그러나 부사의 강압이 계속되자
경춘은 부모 산소에 하직 인사를 올리고 언약의 증표를 지닌 채
낙화암 절벽에서 금장강으로 뛰어내려 16세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수청을 강요한 부사는 이듬해 영월부 감사에서 교체 되었다.
경춘이 금장강에 순절한지 24년 후 1795년(정조 19년) 순찰사 손암 이병정이 영월을 지나는 길에
경춘의 이야기를 듣고
“미천한 신분인데도 이는 진실 된 열녀라라 할 것이니
옳은 풍속을 세우는 게 도리가 아니겠는가?” 하면서
비석을 세워 후세에 귀감이 되게 하였다.
이에 평창부사 남희로가 글을 짓고
영월부사 한정운이 글씨를 써서
경춘의 투신한 낙화암에
‘월기 경춘순절지처’(越妓 瓊春 殉節地處)라는 비석을 세워
그의 절개를 찬양하였다고 한다.
[민경문, 오감만족, ‘영월의 춘향, 노옥의 비극적 사랑’ p.67.]
[12 Jul.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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