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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정부의 역사 인식과 식민주의 사관

행복나무 Glücksbaum 2023. 11. 2. 05:27

윤석열 정부의 역사 인식과 식민주의 사관
이만열(숙명여대 명예교수)

1. 윤석열 정부의 역사 인식
윤석열 정권이 들어서서 각종 국경일이나 기념일이, 그 날의 의미를 새롭게 재인식한다든가선열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계승하자는 취지와는 달리,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느낌을 받고 있다. 이제 나 하나의 느낌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윤석열 정권 들어서서 맞는 국경일이나 기념일은 정부가 그 날의 의미조차 환기시켜주지 않는 것 같다. 국가 지도자는 이런 날을 맞아서 국민을 향한 연설이나 담화를 통해 그 날의 의미를 되새겨 역사의식을 환기시키고 미래를 향한 다짐을 약속해 왔던 것으로 이해해 왔다. 그러나 윤 정권 하에서는 거의 그렇지 않다. 국가지도자의 메시지에서 역사의식이 뚜렷하지 않고 다짐이 확실하지 않다. 3.1운동이나 8.15광복을 기념하는 메시지에서 강열한 독립의지나 역사의식이 발견되지 않는다. 한 두번 그냥 스쳤으나 시간이 갈 수록 그런 느낌은 더해지고 있다. 그것이 역사를 공부했다는 필자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란다.  

윤석열 정권이 들어선 후 뚜렷이 나타난 현상의 하나는 그 동안 껄끄러운 대일외교를 ‘정상화시킨다’는 명분 하에 일본에 대한 저자세와 양보가 뚜렷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박근혜 정권 때(2015.12.28) 피해당사자가 배제된 채 합의했지만 그 뒤 교착상태에 있는 ‘일본군성노예(종군위안부)’ 문제만 해도 약속과는 달리, "(한일) 양국이 과거사가 완전히 정리되지 않으면 미래 협력을 위해 한발자국도 내디딜 수 없다는 인식에서는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기시다 (일본) 총리에게 면죄부의 메시지를 준 것"이라고 비판받는 조치를 행하고 있다. 오히려 그의 집권 이후 정의기억연대 활동과 관련, 윤미향 의원을 곤경에 몰아넣고 있는 데서 윤석열 정부가 지향하는 바를 헷갈리게 한다.  
또 강제징용문제와 관련, 대법원 전원합의제가 2018년 10월 30일 판결한, 일본의 신일철주금(옛 신일본제철)의 손해배상 문제도 윤석열 정부는 ‘제 3자 변제’라는 해괴한 방법으로 바꿔치기했다. 이는 일본의 해당 기업들이 변제하라는 대법원 판결을 한국 정부 산하에 재단을 만들어 한국 기업들에서 돈을 거둬 배상토록 하겠다는 것이다. 한국 정부(행안부) 산하에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을 만들어 강제징용 피해자인 원고들에게 40억원 규모의 판결금과 지연이자를 지급하고, 현재 계류 중인 관련 소송이 원고 승소로 확정될 경우에도 역시 판결금 등을 지급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승소자들이 한국 정부의 변제 방식에 동의하지 않자 그 기금을 은행에 예치해 두고 찾아가도록 했으나 그마저 실패했다.
윤석열 정부가 일본 정부에 굽신거린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최근 후쿠시마 소재 도쿄 전력의 오염수 방출과 관련해서도 일본의 입장을 대변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 국민이 납득할 정도로 설명해주지도 않거니와 오염수 처리 문제가 불안하다고 하면 괴담으로 몰아갔다. 일본과 IAEA와의 유착관계를 생각하면 동해를 경계로 하고 있는 한국 국민으로서는 의당 제기할 수 있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이런 의혹을 대변하기는커녕 오히려 일본의 입장을 강변하는 듯한 모습을 자주 보였다. 도쿄전력에 파견, 상황을 조사한 한국 정부 전문가들도 속시원하게 국민에게 설명한 바가 있었던가. 이렇게 일본에 유착해가고 있는 윤석열 정권의 속내를 국민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윤석열 정권의 대일관계는 박정희 군사정권과 그 아류들이 견지해온 대일관계를 복원, 답습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미국의 압력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번 캠프 데이비드 회담에서 거의 완성되다시피한 한미일 삼국의 ‘동맹관계’는 그 동안 한일 관계의 복잡성 때문에 미일의 의도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때문에 한일관계의 밀월은 일본 못지 않게 미국이 원하는 것이었다. 1990년대 전후하여 한국이 북방정책을 지향, 중국․러시아와 북한을 향해 개방정책을 취하게 되었고 문재인 정권 때까지는 미․일 일변도의 정책에는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윤석열이 집권하면서 급속도로 미일 세력(?)에 편향하면서, 앞서 언급한 일본과의 이해할 수 없는 정책들이 취해진 것이다.      

이렇게 대일인식의 변화는 윤석열 정부의 역사관에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윤 정부는 ‘항일독립운동’의 정확한 인식이, 종군위안부 문제나 강제징용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항일독립운동사’는 윤 정부의 한일 관계, 한미일 관계를 설정하는 데에 장애요인이 된다고 판단한 듯하다. 한국의 독립운동사는 ‘항일’을 제외하고는 성립될 수 없는 역사다. 그래서 항일독립운동에 헌신한 이들을 먼저 폄훼하는 것일까.    
윤 정권은 육군사관학교에 설치한 항일독립운동가 다섯분(홍범도, 이회영, 지청천, 김좌진, 이범석)의 흉상을 철거하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이들 흉상이 육사교정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육사의 건학이념과 맞지 않는다고 했다. 그 무렵 이종섭 국방 장관은 육군사관학교의 뿌리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광복군이나 독립운동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해방 후 국방경비대 시절 세워진 육군군사학교라고 했다. 육사의 뿌리를 독립운동보다는 해방 후의 육군군사학교에 두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때문에 현재 육사에 존치되어 있는 흉상의 주인공 홍범도 등 독립운동가들보다는 백선엽의 흉상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했다.  
독립운동가들의 흉상을 육군사관학교에서 옮겨야 한다는 논의는 곧 국민들의 반대여론에 봉착하게 되었다. 육사 당국은 홍범도 장군 흉상을 육군사관학교에서 이전해야 한다면서 내세운 이유는 홍범도의 ‘빨치산 경력’ ‘자유시 참변’ ‘소련 공산당 입당’ 등이었다. 홍범도의 이런 경력은 육사의 교육이념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자 역사학계는 국내 역사학 관련 51개 단체가 연명하여 2023년 9월 13일자로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반대 역사단체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역사학계는 성명 말미에 윤석열 정부를 향해 ‘육사 교내 홍범도 흉상 철거 계획을 즉각 철회하라’ ‘현 정부는 더 이상 역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마라’고 경고했다. 정부가 이번 사태에 대해 반성 없이 ‘독립운동사 왜곡’, ‘민주주의 파괴자 기념’, ‘역사교과서 개악’으로 나아간다면, 계속 목소리를 내겠다고 경고했다. 이 무렵 광범위한 여론의 반대 속에서 독립운동가 후손들도 육사 앞에서 선조들의 명예졸업장을 반납했다. 그들은 ‘윤석열 정부가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철거하는 등 독립운동의 역사를 지우려 하는 걸 보면서 모욕감을 참을 수 없었다’고 분개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홍범도 장군 지우기는 진행되는 듯, 국방부 앞에 존치된 홍범도 장군의 흉상 이전을 논의하는가 하면, 한덕수 총리는 해군잠수함 ‘홍범도함’의 이름을 바꿀 수 있음을 시사했다. 최근에는 육군사관학교 역사사료실에서 독립운동의 자료를 제거한다는 소문도 들리고 있다.

식민지 경험을 가진 나라는 독립전쟁을 자신의 뿌리로 인정한다. 그럼에도 작금 대한민국에서는 ‘독립운동을 오히려 적대적인 세력으로 보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현 집권층의 역사의식을 엿보게 해 주는 사건이, 국방장관으로 임명된 예비역 장군 신원식을 통해 나타났다. 그는 남북화해를 추구하던 문재인 정권을 두고 반일선동을 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지소미아 연장을 파기했다면서 이 나라 장성으로서 해서는 안될 말을 뇌까렸다. “우리는 매국노의 상징으로 이완용을 비난하지만 당시 대한제국은 일본에 저항했다 하더라도 일본과 국력 차이가 너무 현저해 독립을 유지하기 어려웠다”고 하는가 하면, “대한제국이 존속했다고 해서 일제보다 행복했다고 우리가 확신할 수 있습니까?”라는 망발도 서슴지 않았다. 이런 현상을 투고 어떤 이는 이같은 사람을 국방장관 후보로 추천한 사람이나, 인사검증 책임자인 법무부 장관, 그리고 그를 국방장관에 임명한 대통령은 같은 생각을 하는 이들이라고 의심한다. 그런 발언을 한 신원식이 국방장관으로 취임한 후 이 말을 후회하거나 취소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윤석열과 그 아류들은 친일반민족행위에 대해서는 관용하면서도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활용된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적개심을 숨기지 않는다. 이런 역사의식을 가진 이들이 용산을 중심으로 이 나라를 이끌어가고 있다.  

2. 뉴라이트와 ‘국정교과서’
뉴라이트계의 주장들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지난 9월 5일에는 ‘자유통일을 위한 국가 대개조 네트워크’가 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위안부 문제의 실태와 한일 교과서 서술’이라는 제목의 한일 합동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여기에는 한국측에서 ‘반일종족주의’의 저자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와 “(위안부는) 매춘의 일종”이라고 발언했던 류석춘 전 연세대 교수, 일본 쪽에서는 극우단체 ‘나데시코 액션’ 대표 야마모토 유미코 등이 참석했다. 주최 쪽은 “일본군 위안부는 강제연행된 성노예가 아니라는 입장의 한일 연구자가 모여 한국에서 개최하는 사상 최초의 심포지엄”이라고 행사를 설명했다. 참석자 중 마츠키 쿠니토시는 “위안부 문제는 거짓말로부터 시작돼 일본 좌익 세력과 한국 내 친북반일 시민단체가 만들어낸 장대한 픽션”이라며 “소녀들의 ‘강제연행’된 사실은 악덕 유괴단이 한 것이다. 일본인 경찰관은 힘을 합쳐 구하고 있었다”고 했다. 이들은 언론회관 대관신청을 하면서 “한국과 일본의 역사교과서에 나타난 한일관계자 서술 문제 검토 및 대응방안”을 논의하는 세미나라고 적어놓고는 이같은 주장을 폈던 것이다.[고병찬 기자, 한겨레, 2023.09.14일]  

이런 일련의 역사관련 언행들이 최근에 나오는 것은 이명박 정권 때의 ‘건국절’ 논란과 박근혜 정권 때의 ‘국정교과서’ 사건을 연상케 한다. 2008년, 이명박은 집권하면서 그 해를 ‘건국 60년’이라 하고 그 해 8월 15일에 그 기념식을 대대적으로 하겠다고 발표했는데 이는 뉴라이트계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정부는 ‘건국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60명의 인사들로 건국60주년기념준비위원회를 만들었고, 당시 국편위원장은 청와대 회합에서 건국 60주년의 타당성을 역설했다고 전해졌다. 당시 뉴라이트계 학자는 8월 15일을 ‘광복절’ 대신 ‘건국절’로 기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회에서는 ‘건국절’ 제정을 위해 「국경일에 관한 법률」개정안(7월)과 「건국공로자예우에 관한 법률안」(12월)을 제출했는데, 후자는 “1945년 8월 15일부터 1948년 8월 14일까지 신탁통치를 반대하거나 자유민주국가인 대한민국을 건국하기 위하여 활동한 건국유공자와 그 유족에 대하여 국가가 적정한 서훈과 응분의 예우”를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법률안들은 국회 전문위원들의 건토의견에 따라 폐기되고 말았다. 만약 이 법안대로 시행했다면, 해방 후 반공주의자로 변신한 친일파와 서북청년단 같은 극우단체들이 건국공로자로 예우받을 뻔했다.

박근혜 정권이 등장하여 고등학교 국사교과서를 국정화했다. 그 배후에 여러 이유들이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이명박 정권 이래 강조해온, 1948년 8월 15일을 ‘대한민국 수립(건국)’으로 인정하겠다는 것과 ‘종군위안부’ 문제, 항일독립운동사 등이 얽혀 있었다. 종전의 검인정 교과서에는 ‘1919년=대한민국 수립’ ‘1948년=대한민국정부 수립’ 설을 서술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수립’ 및 ‘대한민국정부 수립’ 연도와 관련, 제헌헌법에서 4차 개정 헌법까지의 前文(“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과 1945년 8월 15일 경축식에서 “대한민국 정부수립 국민축하식”라는 현수막, 대한민국 관보 1호의 刊記가 ‘대한민국 30년 9월 1일’이라고 한 것, 이승만이 檀紀 연호 대신 1919년을 元年으로 하는 대한민국 연호를 선호한 것, 김구의 휘호 끝에 써 놓은 ‘大韓民國 某年’이라고 한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서는 1948년 8월 15일의 ‘정부수립일’을 ‘건국일’로 인식하기를 원했다. 때문에 이들은 1948년 8월 15일을 ‘정부수립일’로 간주하는 ‘남한’의 인식을 1948년 9월 9일을 그들의 ‘건국일’로 대우하는 북한의 인식에 대비시켜 같은 해에 이뤄진 ‘정부수립’과 ‘건국’의 위격을 따지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정부수립’보다는 ‘건국’이 위격이 높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그러나 김구나 이승만, 독립운동가들은 대한민국이 1919년에 건립되었고, 1948년에 정식 정부를 세운 것으로 인식했다.

이명박 박근혜 집권시기에 뉴라이트계의 활동이 활발했다. 대한민국의 뉴라이트는 2000년대 중반에 등장한 '신흥 우파'로서 대부분 진보진영에서 전향한 이들이다. 이들은 신자유주의, 식민지근대화론 등을 내세웠다.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서는 과거 보수와 달리 작은 정부를 내세웠다. 대북인식과 대미인식에는 이전 보수보다 오히려 더 극단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다른 나라 신자유주의 운동과는 달리, 반공주의적 색체가 강하며, 중도 보수를 표방하던 초기와는 달리 극우세력이나 기독교 근본주의 세력과 맥을 닫고 있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서 이들은 '뉴라이트재단' 창설, 뒤이은 『시대정신』을 통해 조직적 기반을 형성해갔다. 이들은 '자유주의연대'가 출범하면서 세상의 주목을 크게 받게 되었다. 이와 함께 2005~2006년에 이르러 '뉴라이트' 이름을 내건 사회단체들이 생겨났고, 2007년 17대 대선 때는 이명박 지지 세력으로 자리잡았다. 이명박 정권 2기라 할 윤석열 정권은 이들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 듯하다. 2012년경부터 뉴라이트를 표방한 조직들이 활동 정지 상태가 되거나 뉴라이트라는 이름을 버렸지만, 실제로는 ‘자유’라는 이름으로 극우화되었고 보수 진영과 동화하게 되었다. 2013년 이명박 정부의 퇴진과 함께 뉴라이트도 소멸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박근혜 정부 때에 다시 득세, 중고교 근현대사 교과서에 뉴라이트 사관을 주입하게 되었다. 교학사 교과서는 그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이 무렵 ‘대안교과서’를 통해 '민주주의' 라는 용어 대신 '자유민주주의'를 써서 역사학계의 반발을 불러오기도 했다. 박근혜 정권의 몰락과 함께 뉴라이트도 몰락하는 듯이 보였지만 2020년대 20대~30대 남성들이 보수화되는 추세 속에서 다시 득세하기 시작, 수구 언론․보수 기독계와 강력한 동맹체제를 형성하게 되었고,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자 이들이 전면에 나섰다.

뉴라이트 역사인식은 한마디로 정리하기가 곤란하다. 가령 박정희, 전두환 정권의 경우, 같은 독재자이긴 하지만 자신들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승만을 강하게 부정한다. 이승만을 독재와 부패의 상징으로 내세워 이를 제거한 군부의 등장과 업적을 정당화했다. 그러나 뉴라이트는 이승만을 국부로 평가하는가 하면, 대한민국 건국과 관련해서는 1919년 대한민국 건국을 주장한 이승만과는 달리 1948년 건국을 고수한다. 뉴라이트는 인권을 내세워 조선 시대를 폄하하는 한편 일제를 옹호하고 이승만과 박정희를 찬양하는 모순된 모습을 보인다. 이승만 정권이 자행한 보도연맹 학살은 부정하거나 어쩔 수 없었다고 정당화한다. 그들은 또 ‘반일 종족주의’를 내세워 민족주의 성향을 혐오하는 듯하면서 정작 일본의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일본 민족주의에 호응하고 인권을 탄압했던 친일파는 옹호하면서도, 한국의 민족주의나 자유민주주의 사상을 가진 독립운동가와 민주화 운동가는 혐오한다. 이승만은 지독한 혐일에 ‘반일 종족주의’ 인물이었지만, 뉴라이트가 국부로 떠받든다. 그들은 한국의 반일 민족주의를 혐오하면서도 그 반일 민족주의 정책을 폈던 강경한 반일 민족주의자인 이승만은 찬양하는 셈이다.

3. 식민주의 사관
뉴라이트의 한국사관의 근저에는 ‘식민지근대화론’이 도사리고 있다. ‘식민지근대화론’은, 일제가 식민 통치를 통해 조선에 근대적 제도와 산업의 기반을 형성시켜 놓았기 때문에 해방 후 한국의 정치 경제가 발전하게 되었다는 주장으로 식민주의사관의 ‘정체성(停滯性)이론’과 관련되어 있다. 그들은 일제 통치기에 전근대적 관습이나 구조를 개혁했을 뿐만 아니라 각종 도로와 철도 항만 공장 등의 산업의 기본 인프라를 깔아 놓았기 때문에 한국의 급속한 발전을 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주장함으로써 일제의 식민지수탈론을 배격하고 일제가 식민지에 행했던 각종 가혹한 탄압을 외면한다.
식민지근대화론은 식민지수탈론을 거부하고 식민주의사관의 한 축인 정체성(停滯性)사관을 거부한다. 정체성이론은 한국의 역사가 정치 권력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사회경제적인 측면에서는 발전이라는 것을 엿볼 수 없었던 정체된 역사를 온존시켜 왔다는 주장이다. 이는 1902년 한국을 방문한 후쿠다(福田德三)의 「한국의 경제조직과 경제단위」라는 논문에서 주장한 것으로, 20세기 초의 한국의 사회경제적 상태가 중세 봉건사회가 형성되기 이전의 고대의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했다. 그래서 후쿠다의 주장을 ‘봉건제 결여(缺如)론’으로도 부른다. 그는 이렇게 발전이 더딘 한국이 발전하려면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고 외래의 힘에 의해 가능하다고 보았고, 그 힘이 바로 일본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일본의 한국진출은 침략이 아니라 한국을 근대화시켜주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 이론은 식민지근대화론으로 탈바꿈하게 되었고, 현 정권의 일본 밀착에는 이런 인식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식민주의사관에는 정체성이론 외에 타율성(他律性)이론, 당파성론과 민족성론 및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등이 있다. 이런 식민주의사관은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운 역사 이론이다. 타율성(他律性)사관 혹은 타율성이론은 한국사가 한국인의 자주적인 결단에 의해 진행되었다기보다는 외세의 타율적인 강제에 의해 진행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한국사의 자주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단군을 부정한 것이나 상고시대부터 삼국․고려․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중국․몽고․만주와 남쪽의 일본의 침략과 압제를 받아 한국사가 비자주적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타율성이론의 주요논거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이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주장도 타율성론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타율성이론은 한국사가 외세의 지배하에 일관되게 전개되어 왔다고 주장함으로써 한국사의 주체성을 부정했다. 이 타율성은 한국사 전체를 외세의존적이고 사대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심지어 한국인의 민족성마저도 사대적․의타적․의뢰적인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타율성사관은 식민지 교육에도 원용, 궁극적으로는 ‘조선독립불능론’으로까지 몰고 갔다. 나아가 어차피 타율적인 역사를 전개할 바에야 문명개화하고 온정주의적인 ‘일본의 품에 안기는 것’이 상책이고, 그렇게 함으로 한국은 새로운 역사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타율성사관의 충실한 봉사자는 지금도 있다. 독립운동을 부정하고 폄훼하는 세력이다. 나라의 주체성을 가벼이여기고, 강대세력에 의존하여 자주와 독립을 훼손하려는 타율성사관의 신봉자들이다.  

최근 한 지성인은 이 정권의 독립운동사 부정과 관련, 다음 글을 남긴 바 있다. 그것을 인용함으로써 이 강연을 맺겠다. “참으로 우리에겐 역사의식이 너무도 결여되어 있다. 특히 윤석열 정부는 극단적으로 퇴행적이다. 홍범도 장군 흉상을 철거하려는 국방부 장관, 백선엽과 이승만을 복권하려는 보훈부 장관, 위안부 할머니들의 ‘기억의 길’을 부숴버린 서울시장, ‘대한제국이 일제시대보다 행복했겠나’라고 말하는 국방부 장관 후보자 등의 행태를 보라. 해방된 나라에서 식민 부역자들이 칭송받고, 독립투사들이 모욕당하고 있다.“ (김누리, 「역사가 없는 나라」
한겨레, 2023년 9월 27일자)


글, 이만열


[29. September 3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