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분의 삶을 널리 알려 달라는 익명 사람들에게 …,
구글 크롬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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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휘(독립운동가):
2024. 9. 21. — 조선과 대한제국의 군인이자 일제강점기 시기에 활동한 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무장 투쟁을 주장하던 대표적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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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을 관리로 만드는 게 꿈이었던 아버지는 그를 단천군수의 심부름을 하는 통인으로 만들었다.
그는 백성을 위해 일하지 않고 추잡한 놀음을 일삼는 군수에게 요강을 집어던졌다.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이동휘는 한양으로 와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삼남 검사관이 되었다. 강직한 그는 대한제국 군대에서 가장 신망 높은 군인이 되었다.
외적 방어의 요충지 강화진위대장이 되었다. 을사늑약으로 나라의 주권이 넘어가자 구국 계몽운동에 뛰어들었다.
기독교를 받아들여 선교활동을 펼쳤다. 그에게 기독교는 만민이 평등한 구국의 종교였다.
그가 지나간 마을마다 학교와 교회가 하나씩 생긴다고 했다. 유배와 투옥 당한 다음, 만주 연해주로 망명했다.
한때 조직원 2만명이 넘었던 국민회와 군자금15만원 쟁취작전을 펼쳤던 철혈광복단을 탄생시킨 것이 이동휘였다.
최초의 임시정부인 대한독립군군정부 2대 정통령 (대통령)이 되어 홍범도장군을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것도 이동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가장 강력한 무장투쟁론자였고, 국무총리가 되었지만 상해의 정치를 마다하고 만주와 연해주로 가 무장투쟁전선을 누볐던 최고의 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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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김알렉산드라에 이은 두번째 볼세비키가 되었던 그는 항일투사들에 대한 부당한 체포에 맞서 레닌과 담판에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에게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서로 다르지 않은 만민평등 구국의 길이었다. 그 길위에서 연해주에서 쓰러진 마지막 순간까지 일제에 체포된 항일투사들을 구출하기 위해 뛰어다녔던 이동휘.
"대한광복군정부의 수반을 맡은 이동휘의 해박한 지식과 판단력, 거침없는 실행력은 눈부셨다. 내가 놀란 것은 그의 뛰어난 능력이 아니라 그 뛰어난 능력을 자신을 위해서는 손톱만큼도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범도>2권 358p
홍범도장군이 본 이동휘였다.
그 대단한 최고의 지도자 이동휘를 이 나라는 어떻게 대접하고 있나.
서울 현충원에 가보라.
일본이 패망한 1945년 8월 15일 아침까지 35년간 일본에 충성을 다바치고, 미 군정청을 거치면서 초대, 3대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이 된 친일파 장군들의 너른 묘역 발밑, 반지하 초라한 공간에 손바닥만한 위패 하나로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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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해외 항일투쟁 유적지를 촬영해온 김동우 작가가 우즈베키스탄에서 보내온 사진 한 장이 가슴에 비수가 되어 파고 들었다.
이동휘 선생의 손자, 이 콘스탄티 예니노위체.
페인트 공장 노동자로 간신히 연명해오다 폐질환으로 우즈베키스탄 병원에서 돌보는 사람 하나 없이 지내고 있는 그분의손자..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연금 한푼 준 적 없다.
나라는 대체 왜 있는 것인가?
[02. Oktober.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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