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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투사 이회영 선생 [1] 구글 크롬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http://www.woodang.or.kr/woodang-education-and-culture-foundation/analec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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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1908-1932)은 대한제국의 교육인, 사상가이자 일제강점기 시대 아나키스트 계열의 독립운동가이다. 위키백과
출생: 1867년 4월 21일, 한성부
사망 정보: 1932년 11월 17일, 중국 다롄 시
형제자매: 이시영, Lee Ho-yeong, Lee Seok-yeong, Lee Gun-yeong, Lee Cheol-yeong
자녀: 이규창, 이규동
배우자: 이은숙 (1908년–1932년)
부모: 이유승
설립 조직: 신흥무관학교
이회영
한국의 독립 운동가 (1867–1932)
다른 뜻에 대해서는 이회영 (동음이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이회영(李會榮, 1867년 4월 21일 (음력 3월 17일) ~ 1932년 11월 17일)은 대한제국의 교육인, 사상가이자 일제강점기 시대 아나키스트 계열의 독립운동가이다.
이회영 李會榮
출생
1867년 4월 21일
조선 한성부 저동(苧洞)
사망
1932년 11월 17일(65세)
중화민국 만저우 지방 랴오닝 성 다롄에서 병사(고문 후유증)
성별
남성
국적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력
독립운동가, 교육자, 사상가 출신
임정 의정원 의원
부모
이유승(부), 동래 정씨 부인(모)
형제
이석영(형)
이건영(형)
이시영(아우)
배우자
사별 초배 달성 서씨 부인
재혼 계배 이은숙
자녀
이규룡(아들)(출계)[1]
이규학(아들)
이규온(딸)
이규숙(딸)
이규창(아들)
이경숙(딸)
이현숙(딸)
이규동(아들)
종교
유교(양명학) → 개신교(감리회)
정당
무소속
우당 이회영 기념관
공직 정보
군무총장 예하 보좌관 직무대리
장훈학교, 공옥학교에서 교편을 잡다 신민회의 창립 멤버로 가담하였고, 북간도에 서전서숙을 설립하였으며 일가 6형제와 함께 유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설립, 독립군 양성과 군자금 모금 활동을 했다. 그 뒤 신흥무관학교가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하자, 상하이에서 아나키즘 사상에 심취하였으며 1928년 재중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 1931년 항일구국연맹 등의 창설을 주도하였으며 국내외 단체와 연대하여 독립운동을 했다. 1931년 9월에는 흑색공포단을 조직하여 일본과 일본 관련 시설의 파괴, 암살을 지휘하였으나 1932년 11월 상하이 항구에서 한인 교포들의 밀고로 체포되어 고문 후유증으로 인하여 옥사하였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경주 이씨 백사공파로 조선 선조 때 의정부영의정을 지낸 오성 이항복의 10대손이었다. 자 성원(聖元), 아호는 우당(友堂). 종교는 감리교로서, 7형제 중 넷째 아들이며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의 형이다. 해공 신익희와는 사돈간이며, 정치인 이종찬, 이종걸은 그의 손자이다. 이종찬의 아버지 이규학과 이종걸의 아버지 이규동은 이복 형제간으로, 이규학은 서씨 소생이고 이규동은 이은숙 소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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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 이회영 선생 어록>
독립을 위해서는 먼저 백성을 깨우쳐야 한다.
인간으로 세상에 태어나 누구나 자기가 바라는 목적이 있다.
이 목적을 달성한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그 자리에서 죽는다 하더라도 이 또한 행복 아니겠는가.
한 민족의 독립운동은 그 민족의 해방과 자유의 탈환이므로, 자유의사와 자유 결의에 의한 조직적 운동으로, 강권적인 권력 중심의 명령조직으로서 혁명운동이나 해방운동이 이루어진 예는 없다.
(1925년 중국 천진에서 김종진(金宗鎭)과의 담론 중에서)
자유와 평등의 사회원리와 민족자결원칙에 의하여 독립될 한민족의 내부구조도 반드시 이 원리가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
권력의 집중을 피하고, 분권적 지방자치단체의 연합으로서 중앙정치 기구를 구성하며, 경제건설에 있어서는 재산의 사회성에 비추어 일체의 재산은 사회적 자유 평등의 원리에 모순이 없도록 민주적인 관리운영의 합리화를 꾀하여야 한다.
그리고 교육은 물론 사회 전체의 부담으로 실시하여야 할 것이다.
(1925년 11월, 중국 천진에서 김종진과의 담론 중에서, 독립기념관 우당 선생 어록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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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 이상재(月南 李商在) 어록 첨가>
동서 역사에 나라가 망할 때 망명한 충신 열사가 비백비천(非百非千)이지만 우당 군과 같이 6형제 가족 40여 인이 한 마음으로 결의하고 일제 거국한 사실은 예전에도 지금도 없는 일이다. 그 미거(美擧)를 두고 볼 때 우당은 이른바 유시형(有是兄)이요, 유시제(有是弟)로 구나. 진실로 6인의 절의 (節義)는 백세청풍(百世淸風)이 되고, 우리 동포의 절호(絶好) 모범이 되리라 믿는다.
(우당 이회영 약전 부록 P.183, 1985)
[15. September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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