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섬은 6세기 이전부터 아랍 상인들이 한국 일본으로 가는 바다의 실크로드에 해당하는 항구 거점으로 해상 국제무역의 중심 축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땅에서는 일찍이 류큐 왕국이 있어서고 독자적인 문화를 가지고 평화롭게 살았다. 바다를 건너 아시아의 여러 나라와 교역을 맺었다.
메이지 정부는 류쿠 왕부에 대하여 무력으로 [류큐 처분]을 당행했다. 그에 따라 오키나와 섬은 황민화 정책에 의하여 급속히 일본화가 진행되었다.
전쟁 말 메이지 정부는 근대화를 명분으로 부국강병책에 따라 군비를 확장하고 인근 국가를 침략하기 시작했다. 만주사변, 중일전쟁, 아시아 태평양 전쟁으로 확대하여 오키나와 섬은 15년 전쟁의 최후 결전장이 되었다.
오키나와 전에서 미 일 양쪽의 군대는 촐력을 기울여 사투를 펼쳤다. 미군은 물ㄹㄴ 작전에 따라 오키나와 2본토 중남부에 무차별 적인 공습과 함포 사격을 가하여 엄청난 포탄을 쏘아댔다.
이 철의 폭훔은 약 3개월 걸쳐 오키나와의 모습을 트게 바꾸고, 군인과 주민 20여만 명의 사망자를 낼 만큼 처참했다.
이곳에 한국의 징요자들이 비행장 건설이나 방공호 일본군 지하본여을 구축하기 위해 투입되었고 일본구누이 위안 소에는 조선 영인들이 위안부로 강제로 끌려와 몸을 팔아야 했다.
일본 군은 본토 최후 저지선을 한국의 제주도와 오키나와 섬을 최후 결전지로 방어선을 긋고 유엔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일본군은 슈리결전을 피해 남부로 철되, 지구전을 택했다.
그 후 미군의 강력한 소탕작전으로 막다른 곳까지 몰리다 파멸했다. 결국 군인과 주민들이 뒤법먹 이 되어 방공호에서 방공 호로 도망치지 못해 갈팡질팡하는 비참한 전쟁터로 변했다 방공호 안에서는 일본군에 의한 주민 학살과 강제적인 집단다와 기마, 밖으로는 박격포, 하염방사기 등에 의한 살육이 있어 마치 아비규환의 지옥과 같았다.
동굴속에서 일본구누에 의한 위협과 미군에 대한 공포감으로 집단 자살로 수백명이 동굴 안에서 집단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일들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일본의 패전 후 미군정이 들어선 오키나와 섬은 수용소로부터 시작 된다.
그 후 미 소를 축으로한 냉전구조 속에서 미군사기지로서 강화되어 섬주민들은 기지건설을 명복으로 하는 미군정에 토지를 수용당하고 많은 억압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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