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älbs/Sag mal, Was ist denn los?

"샤르트르와 드골"

행복나무 Glücksbaum 2013. 8. 6. 05:30

 

지루하던 장마가 물러났다 하나,

강한 소나기가 새벽까지 쏟아졌다.

 

연일 지상파나 종편 방송들이

국정원의 대선개입을 놓고

좌우로 가르고 싸움질을 부추긴다.

 

'정치판이 개판이다.'

 

유신체제나 유신헌법에 대한 반민주적인 판결이 내리고

그 당시 피해자들에게 승소 판결이 내려지는 상황인데

유신시대로 회귀하는 듯한 현상이

여기저기서 돌출되고 있다.

'종북좌파'들이 북의 사주를 받아

인터넷을 해방구로 장악했다느니…,

국민의 절반이 간첩으로 몰아가고 있으니…,

정신병원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 여의도에서 패악을 떤다.

 

국정원이 목적에 따라 대국민심리전을 펼친 것이니

국가안보를 위해 할 일 다 했다는 것이다.

댓글이 그렇고, 국가기밀을 누설했다는 것이다.

 

예끼, 이 사람들아…,

샤르트르와 드골에게서 배워봄이 어떨까.

 

  

....

이른 새벽 거실 창문에서

운무가 낮게 드리운 동쪽을 내다보며 기지개를 폈다.

참새들이 가족회의라도 하는지 합창을 한다.

그리고는 

홍세화의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를 다시 읽었다.

 

프랑스인들은 모두가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프랑스인'은 각 개인이 한 인간으로서 '프랑스'로 산다는 것이다.

내 가슴에 와 닿는 부분이다.

그 내용 중

알제리 독립과 프랑스란 부분을 읽어 내려가며

발췌한다.

 

...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프랑스는 탈제국주의의 길을 건든 대신에 과거의 식민지들을 재빨리 추스르는 길을 택했다.

일본 제국주의에 쫓겨났던 인도차이나를 다시 식민지화하려고 나서,

전쟁이 끝나면 당연히 독립되리라고 기대했던 인도차이나인들을 철저히 배반하였다.

이때 호치민이 이끄는 민족해방전선이 제국주의 프랑스에 대항하여 독립전쟁을 일으킨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1954년에 디엔 푸에서 프랑스군은 민족해방전선군에 완전히 옥쇄 당했고, 결국 인도차이나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그 바톤을 이어받은 게 미국이었고 곧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베트남전쟁으로 치닫게 된다.)

프랑스 제국주의를 몰아낸 베트남민족은 다시 미제국주의와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인데 이때 한국은 한국군을 파병하여 군인들과 민간 기업들을 통해서 외화벌이를 하였다. 미제국주의 편에 가담한 것은 순전히 경제개발을 위한 돈이었다.

 

베트남에서 프랑스가 패배하여 물러났다는 소식은 당연히 알제리인들의 독립 의지를 더욱 불태우게 했다. 베트남에 투입되었던 병력들이 알제리에 재투입되어, 제국주의 군대의 '칼'은 늘어났지만 알제리인들의 독립의지는 오히려 충천했다.

그런데 당시의 프랑스는, 비록 베트남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물러났다고 하지만, 일제리에서는 쉽게 물러날 상황이 아니었다. 즉 알제리로부터의 철수에는 '싫음' 뿐만 아니라 '어려움'이 겹쳐 있었던 것이다. 동시에 알제리 땅에 거류하는 100만이 넘는 프랑스인들을 비롯한 유럽인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도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그 위에 거리가 아주 먼 인도차이나와 달리, 지중해만 넘으면 닿는 코앞의 땅이라는 것도 놓칠 수 없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프랑스 일반국민들에게도 알제리와 인도차이나는 달리 인식되고 있었다. 즉 알제리는 식민지가 아니라 '자기 땅'이라는 인식이었다. 그것은 인도차이나가 식민성(식민성) 관할이었던 반면에, 알제리는 행정구역상으로 프랑스 본토와 마찬가지로 두 개의 도(도)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내무부 관할이었다는 차이에서도 알 수 있다. 이렇게 프랑스인들에게 알제리 땅은 완전한 '자기들의 땅'이었다. 물론 알제리인들의 눈으로 보면 실로 가당찮은 '그들의 땅'이었지만.

 

"프랑스의 알제리"

알제리인들의 독립 의지에 반대하여, 알제리 내의 프랑스인들은 말할 것도 없이 이 구호를 외쳤다. 결사적인 식민지 유지를 선언했던 것이다.

그런데 역사의 장난은 참으로 묘한 것이어서 이들 '식민지 결사 유지파 중에는 파리코뮌 전사들의 손자, 증손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파리코뮌 때 '앵테르나시오날(인터내셔널)'을 외쳤던 코뮌전사들의 일부가 식민지 땅 알제리에 추방되었는데 추방지에서 제국주의자들의 씨를 뿌린 셈이 되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프랑스 국내에서는 공산당 등의 좌파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식민지 유지를 지지했다. 예컨대 프랑수와 미테랑도 골수 식민지 유지파에 속했다.

 

프랑스는 완전히 둘로 갈라졌다.

유지파와 철수파 사이의 골을 드레퓌스 사건 때나

1930년대 극우파와 싸웠던 인민전선 때보다

훨씬 더 깊고 날카로웠다.

 

급기야 알제리에서 독립전쟁이 일어났고, 그 진전 상황에 따라서는 프랑스에서도 좌우 사이에 심각한 위기의 순간에 다시 등장한 인물이 바로 드골이었다. 2차 대전의 위기에서 프랑스를 구했던 인물이 13년을 기다린 뒤에 두 번째로 프랑스를 구하기 위해 나선 것이다.

그는 국민들의 부름에 응하면서 대통령 중심제 헌법 개정을 요구하여 관철시켰고 스스로 대통령에 올랐다. 바로 제5공화국이 시작된 것이다.

드골 대통령은 취임하기 전부터 이미 알제리에서 철수하는 길밖에 없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고민은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을 진압하는데 있지 않았고, 결사적인 식민지 유지세력을 어떻게 잠재울 수 있을 것인가와 피에느와를(알제리의 프랑스인)들을 어떻게 문제없이 환국시킬 것인가에 있었다. 우선 드골은 알제리를 방문하여 "나는 당신들을 이해했습니다(Jevous ai compris)" 라고 하는 말로 알제리의 프랑스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이 말이 실로 절묘한 정치적 표현이었음이 나중에 밝혀졌다.

그는 "알제리는 프랑스다!" 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이해했다'라고 하는 말이 실상은 '물러날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이해했다.'는 게 '명예로운 철수'정책으로 가시화되었다.

이 철수정책으로 드골은 '자칼의 복수'로도 잘 알려져 있듯이 암살 될 뻔한 위기를 겪기도 했다.

알제리에서 식민지 유지파들이 결국 쿠데타도 일으켰지만 곧 진압되었고 드디어 1962년에 알제리는 독립을 획득하여 130년간에 걸친 식민지 신세에 종지부를 찍었다.

 

알제리 프랑스인들은 주로 프랑스 남부 미디 프로방스 지압으로 환국하였다. 대량의 환국조치가 그런대로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신 호경기를 누리고 있던 프랑스의 경제상황이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나중에 프랑스의 현대 역사가들은, "당시 드골이 없었다면 프랑스의 내전은 피할 수 없었다."며 우파의 주장이면서도 우파 여론을 잠재웠던 그의 위대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알제리전쟁은 지금까지도 프랑스의 정치판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극우파 국민전선의 우두머리 장 마리 르팬은 알제리에서 공수부대요원으로 활동한 자였고, 현재 국민전선은 피레느와르(알제리프랑스인)들이 많은 미디 프로방스 지방에서 가장 많은 지지율을 획득하고 있다.

국민전선파가 시장에 당선된 툴롱, 마리냔, 오랑쥐시 등은 모두 이 지방에 속하는 도시들이다. 많은 알제리 프랑스인들은 알제리 땅에서 쫓겨난 원한을 아직도 품고 있는 것이다.

 

<이때>

사르트르는 말과 글로 식민지의 반인간성, 반역사성을 강력하게 외쳤다. 뿐만 아니라 알제리 독립자금 전달책임자로까지 나섰다.

당시 프랑스의 대표적인 지성이 프랑스에 살고 있는 알제리인들이 갹출한 독립지원금이 들어 있는 돈 가방의 전달책임자를 자원했던 것이다.

프랑스 경찰의 감시를 피해서

그의 책임 아래 국외로 빼돌린 자금은 알제리인들의 무기구입에 필요한 돈이기도 했다.

그의 행위는 문자 그대로 반역행위였다.

당연히 사르트르를 법적으로 제재해야 한다는 소리가 드골 측근들의 입에서도 나왔다.

이에 대해 드골은 이렇게 단단히 대꾸했다.

"그냥 놔두게.

그도 프랑스야!"

 

'그도 프랑스야!' 이 한마디에서

우리는 20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두 사람을 만나고 또 그 두 사람이

가장 프랑스적인 프랑스인이라는 사실과 만난다.

사르트르가 프랑스에서나 나올 수 있는 사상가, 문필가였다면

드골 역시 프랑스에서 나올 수 있는 정치지도자였다.

 

어찌 보면, 드골이 한 수 위였는지 모른다.

그의 위대성은 "그도 프랑스야"와 "나는 당신들을 이해했습니다."의

두 마디에 농축되어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는 "그도 프랑스인이야!" 라고 말하지 않았고 "그도 프랑스야!"라고 말했다.

둘 사이에는 말의 묘미 이상의 차이가 있다.

"한총련의 학생들도 한국인이야!"와 "한총련 학생들도 한국이야!"의 사이에는 실로

큰 차이가 있지 아니한가.…」

 

 

[06 Aug.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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