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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하우젠의 정치범 및 유대인 강제수용소, 오라니엔부르크. 1993

행복나무 Glücksbaum 2023. 7. 12. 14:52

“난 1990년대 베를린을 찾아오는 친지들에게 <한국 현대사와 인문학 기행>의 마무리를 늘 이곳에서 가졌다.
성서와 역사 그리고 고난받는 사람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곳이니까.”

참고로 독일 전국에 강제수용소에는 수를 셀 수 없이 많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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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하우젠의 정치범 및 유대인을 잡아 두었던 나치강제노동수용소, 오라니엔부르크와 노역장들. 1993

베를린의 북쪽, Oranienburg시 외곽에 작센하우젠(Sachsenhausen)이란 곳이 있다.
이 수용소는 처음 히틀러를 반대하는 독일인들의 정치범 수용소로 시작됐으나 몇 년 후 유대인들의 강제수용소로 사용되었다. 수용소 건물 자체는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삼각형으로 주위를 에워싼 벽과 감시소 및 생체 실험실, 시체 소각로와 가 당시를 말해주고 있다.

아우슈비츠만큼의 엄청난 것은 아니더라도 이 건물을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적지 않은 충격을 줄 것이다.

이 수용소에 들어와 최고로 오래 산 사람이 4년 2개월을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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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나치강제 수용소의 일면을 체험할 수 있다.

이곳을 방문한 한 노 목사 은준관은 수용소 광장에 서 있는 노송을 붙들고 통곡하기를 “너는 보았지?, 수많은 사람이 어떻게 죽어갔는지를.”

소설 “아우슈비츠의 선물”의 내용 중에서 정치범이나 유대인 포로 강제 수용소의 처절했던 정황의 일면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1944년 7월 13일, 무더운 여름날, 열차가 측선을 따라 역으로 들어서면서 천천히 속도를 늦추었다.
덜커덩하는 약간의 정지 진동과 함께 우리는 굴러떨어지듯 열차에서 뛰어내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출입문 위에는 “Arbeit macht Frei” 즉 노동이 자유롭게 한다. 라는 표어가 가로 질러 있었다. 그 문 뒤로는 철조망과 전류가 통하는 해있는
담벼락, 그리고 탐조등이 달린 감시 탑과 기관총을 든 보초, 훈련받은 개들에 둘러싸인 천여 동에 이르는 바라크식 막사의 수용소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죽음으로 밖에 자유를 얻을 수 없는 곳--, 폴란드의 악명 높은 나치의 ‘아우슈비츠포로수용소’ 이었다.
우리 전쟁포로들은 일단의 히틀러 친위대의 지휘에 따라 그 수용소 문안으로 차례차례 들어갔다. 명령에 따라 우리는 옷을 벗어 준비되어 있는 궤짝에 아무렇게나 던져 넣고 완전 나체가 되었다. 수치심으로 엉거주춤 망설이는 자에게는 가혹한 폭행이 가해졌다.
우리는 일렬종대로 차례 차례 정장을 한 군의관 우두머리 앞으로 가 섰다. 그는 이 수용소 최고의 군의관 요셉 멩엘(Josep Mengel)이었다. 키가 크고 몸매가 날씬한 그 사내는 핸섬했고 건강한 얼굴이었다. 얼마 후에야 알게 되었지만 그는 그 매력적인 얼굴 뒤에 악마를 숨기고 있는 사내였다.
남자 건 여자 건 어린아이 건 가릴 것 없이 하나같이 발가벗은 전범들이 그앞에 와 서면 그는 그 몸을 자세히 살펴보고 아무 말 없이 엄지손가락으로 혹은 우측 혹은 좌측을 가리켰다. 대기하고 있던 경비원이 그가 지시하는 방향으로 죄수를 들을 떠밀어 갈라놓았다. 좌측으로 떠밀려간 사람은 늙었거나 허약하거나 병든 사람 그리고 어린이들이었다. 가엾게도 그들 노동 능력이 없다고 판단된 죄수들은 곧장 가스 사형 실로 보내어지는 것이었다.
마침내 차례가 되어 나는 그 군의관 앞으로 끌려나가 섰다. 실제보다 몇 십 백 배나 길게 느껴지는 한순간이 흘렀다. 마침내 내 몸을 핥듯이 살펴본 그는 엄지손가락을 들어 우측을 가리켰다. 나는 44세의 건강 체였으므로 적어도 중노동을 견디어낼 수 있는 동안만큼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살아남을 가치가 있다는 판정을 받은 우리 일행은 다음으로 문신용 바늘이 준비되어 있는 책상 앞으로 끌려갔다. 나는 묵묵히 ... 그러나 조금은 흥미를 느끼며 나의 오른팔에 82585라는 숫자가 검은 빛깔로 새겨지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전신으로 오싹하는 소름의 물결이 훑어 내려갔다. 아픔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하나의 숫자일 수만은 없어, 내 이름은 반 나치스 투쟁자로서, 너희들이 나에게 가한 박해 이상으로 너희들 체제에 피해를 입힌 자로 기억될 것이다. 나는 결코 하나의 숫자가 아니야!’
숫자 바로 밑에 심장 모양의 기호가 따로 새겨졌다. 정치범을 뜻하는 분류 부호였다.

문신 작업이 끝남과 동시에 우리는 나체의 수치심에서 해방되었다. 가스 사형실로 간 사람들의 옷 무더기 속에서 블라우스와 팬츠 그리고 한 켤레의 구두를 고르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경비원을 따라 옷 더미 주위를 도는 사이에 재빨리 골라야만 했다. 내가 고른 옷을 그런 대로 상태가 괜찮은 편이었으나 구두가 재수 없게 걸렸다. 두 작이 모두 왼발용인 데다가 한 짝은 굽이 높았고 다른 한 짝은 굽이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일상생활은 판에 박힌 그것의 연속이었다. 낮에는 건축 공사장(나는 손수레로 모래를 날랐다.)에 나가 일했고 밤이 오면 커다랗고 한기를 느끼는 바라크 안 나무판자 위에 아무렇게나 나뒹굴어져 잤다.

식사는 멀건 국과 이따금 나누어주는 딱딱한 빵 조각 뿐--. 우리는 놀라운 속도로 체중이 줄어들면서 건강을 잃어 갔다.

화장장의 굴뚝은 끊이지 않는 낙오자들 때문에 매일 밤 뻘건 불길을 토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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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하우젠은 제일 먼저 독일인 정치범 수용소로 사용되다가 그후 유태인들도 수용한 것 같다.
이곳의 생활 면모를 볼 수 있는 전시실과 수용소에서 죽어간 사람들을 위한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고, 정치범을 취조하는 특별 조사실과 감방이 따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교살 대와 철조망 고압선, 감시 초소의 기관 포, 생체 실험실과 시체 매장 지와 가스실과 화장터 등등의 생생한 모습과 죽은 사람들을 매장했던 매장 지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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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은 무료이며 사진도 자유로이 찍을 수 있다.
수용소 밖의 숲 속에서는 지금도 사람의 해골과 뼈의 잔해들이 발굴되기도 한다고 ... ,


[재입력/  23. März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