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훈아, 마지막 투어 공연에서 작심 비판 "왼쪽, 너는 잘했나!" 조선일보의 속셈, 왜 .., 여,야당 싸음으로 보이게 하려고.
"왼쪽, 니는 잘했나 !" , 나훈아의 미친소리가 기가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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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훈아씨, 그니까 왼쪽이 잘 한 게 없으니 비상계엄도 그냥 넘어가잔 거? 민주주의헌법에 위배되는 친위쿠데타 내란 죄가 정당하다고 하는거에요?
이런 수준의 말로 공격해야 쓸 게 있는 언론의 비루함이라니.
티케팅해주는 팬덤 듣기 좋은 소리야 인지상정. 소크라테스가 위대한 건 자기 자신을 알았기 때문인데,그가 어찌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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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 15일에 나는 여기에 옛글에 대해 이런 글을 썼다. >
칠레의 민중들,
민주주의 시민들,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단결해
세운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1908-1973) 정권은 아옌데 대통령이 임명한 육군 참모총장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Pinochet 1915-2006년)가 대통령을 배반해 1973년 9월 11일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무너진다.
연극 연출가로 19편의 연극 작품, 10개의 음반을 남긴 칠레의 민중 가수 빅토르 하라(Victor Jara 1932-1973)는 군부에는 눈에 가시였다.
선거 이전부터 아옌데를 지지한 ‘빅토르 하라’는 칠레 민중들을 ‘자유의 노래’로 단결시켰다. 아옌데 민주 정부가 출범하고 그는 대학으로 돌아가 연극 만들기에 주력한다.
피노체트가 대통령 궁을 공군 비행기를 동원해 파괴하고 아옌데 대통령은 총을 들고 저항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칠레 국민에게 남기는 마지막 연설을 내보내고 자살한다.
피노체트 반란군은 산티아고 대학을 점령하고 빅토르 하라를 체포한다. 산티아고 시내 곳곳에서 대학교수 학생들 시민들 지식인들이 체포된다.
약 5,000여 명이 산티아고 스타디움으로 총칼을 든 반란군에 포박되어 끌려갔다. 구타와 고문이 시작됐고 기관총으로 마구 사살됐다. 이유는 딱 하나다. 아옌데 정권을 지지했다는 이유고 칠레 민중들 편에 섰다는 것이다. 반란 군부는 붙잡아간 이들을 ‘공산주의자들(빨갱이들)’이라고 불렀다.
박토르 하라는 죽기 직전 끌려온 옆 동료에게 연필과 종이를 빌려 ‘마지막 시(詩)를 빠르게 써 내려간다.
이 시는 동료가 반란군이 눈치 채지 못하게 얼른 챙겨, 오늘 세상에 남겨졌다.
시의 일부다.
"...... 그들의 공포를 끝내고 싶다.
한 사람은 무(無)에 뛰어들고 또 다른 사람은 벽에 머리를 박고 그러나 모두 죽음의 고정된 시선으로 파시즘의 얼굴이 얼마나 공포를 불러일으키는지 그들은 칼처럼 정확하게 계획을 수행한다.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그들에게 피는 메달과 같고 학살은 영웅적인 행위다.
오 하느님, 이것이 당신이 창조한 세계인가요?
7일간의 경이로움이 이런 사태를 위해?
이 네 벽 안에는 숫자만 존재한다
진행되지 않는
서서히 죽음을 바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양심이 깨어나
이 잔혹함에 대항하여 외쳐라
전국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까?
대통령의 피, 우리 동료,
폭탄과 기관총보다 더 강력하게 공격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주먹이 다시 치는 것이다!
노래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내가 공포의 노래를 불러야 할 때
내가 살고 있는 공포
내가 죽어가는 공포
그리고 무한의 많은 순간
침묵과 비명
내 노래의 끝이다.
내가 본 것, 나는 본 적이 없다
내가 느꼈던 것과 내가 느끼는 것
영원한 순간을 향할 것이다. "
피노체트 군부는 빅토르 하라가 다시는 기타 연주를 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빅토르의 양 손목을 도끼로 잘라 부러트렸다.
영국인 아내 조안(Joan Jara)이 주검이 버려진 곳으로 갔을 때 하라는 얼굴에 피멍이 가득했고, 가슴은 총탄 자국으로 난도질당한 것 같았고, 양 손목은 너덜거렸다.
아내 죠안은 사람들 도움을 받아 남편 빅토르 하라의 주검을 몰래 가지고 나올 수 있었다.
40세 사내는 그렇게 피살당했다.
빅토르 하라의 아내 죠안은 런던 태생의 댄서로 Josse Ballet라는 극단과 함께 1958년 칠레 산티아고로 공연을 왔다가 빅토르를 만나 칠레에서 살기로 결심한다.
2013년 9월 18일 영국의 가디언 Guardian 지와 인터뷰에서 죠안은 “빅터를 만났을 때, 저는 춤의 세계인 아주 작은 세계에 갇혀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를 만나면서 그는 제 눈을 뜨게 했습니다.
그는 저를 세상으로 데리고 나갔습니다. 세상과 생을 느끼고, 칠레에 대해 처음으로 이해했습니다. ",
"빅토르 하라의 연극, 그것은 내가 칠레에서 본 최초의 정말 정직한 연극이었습니다.
그의 연극은 칠레의 현실이었습니다. 외국에서 수입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1989년 민주화 운동의 압력을 받아 치러진 선거에서 패배한 피노체트 군사독재 정권은 끝난다.
군사독재 정권의 탄압을 받아가면서 끈질기게 진행된 민주화 운동의 성과였다. ‘가디언’에 의하면 '피의 독재자' 피노체트의 군사 독재 17년 기간 동안 약 200,000만 명이 투옥되고 고문 학살 및 행방불명이 22,000여 명, 20,000명의 과부와 66,000명 고아를 남겼다.
피노체트 집권 시작 2년 동안에는 매일 수천 명의 사람들이 통금 시간 동안 밤에 사라졌다.
피노체트와 그의 부하들은 적어도 지금까지 기록된 어떤 나라의 독재 정권 이상으로 잔인한 탄압을 했다.
학살의 증거는 넘쳐났다. 유엔 인권 보고서는 “어떤 독재정권의 잔인성과 비교할 수 없다"고 기술했고 국제 앰네스티는 "고문이 칠레 정부의 공식 정책이었다"라고 기록했다.
1990년 선거로 권력에서 물러난 피노체트는 런던에서 요양을 하던 1998년 10월, 영국 사법 당국에 체포된다. 군부 독재로 고통받은 피해자 중에는 피노체트 군사독재 정권을 비판한 스페인 사람에 대한 납치사건 80건도 포함되어 있었고, 이 때문에 스페인 정부가 국제 수배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는 2000년 3월 건강을 이유로 석방되어 칠레로 귀국했다. 칠레 사법부는 독재자를 반드시 처벌한다는 신념에 따라 그를 가택 연금했으며, 약 300여 건의 국가범죄로 기소했으나 2006년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사법적인 처벌은 이행하지 못했다.
피노체트가 권좌에서 밀려난 때 빅토르 하라를 총살한 전 칠레 육군 장교인 Pedro Barrientos는 미국으로 도망을 갔다. 빅토르의 부인 죠안과 과거사 진상조사위의 추적으로 살인범은 2016년 6월 미국 플로리다 배심원은 빅토르의 살인에 대한 책임이 있음을 판결했다. 형사 재판이 아닌 민사재판이었다, 2,400만 달러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2018년 7월, 8명의 칠레군 퇴역 장교가 빅토르를 살해한 혐의로 15년 징역형을 선고 받는다. 그리고 칠레 법원은 살인 책임 장교 Pedro Barrientos를 미국에서 칠레로 송환시켜 줄 것을 미 플로리다 법원에 요청한다.
netflix에는 다큐멘타리 ‘빅토르 하라의 마지막 노래’(1시간 4분) 기록 영화가 있다.
Foto - In 1969, Jara appeared in Helsinki protests against the Vietnam War. / Victor Jara Library
링크한 동영상으로 그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
…
https://www.youtube.com/watch?v=0nybX2_mYq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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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씨야. 이런 개인 의견도 있단다.
이효리의 생각이더라.
이효리 왈,
” 진보가 뭐고 보수가 뭔지 모르겠다.
다만 편라게 강자편에 서기 보다는
불편함을 감수하고 할 말을 하고 사는 것이
진보라고 한다면
좀 어렸을 때부터 그런 성향이 있었다.
자기 생각을 밝히면서
다같이 사회에 관심을 갖자고 말하고
돈보다 생명이 먼저 라고 말하면
좌인가?
그럼 나는 ‘좌’가 맞는 것 갖다. “
[12. Januar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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