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유럽경제공동체(EEC : European Economy Community)와 1965년의 위기
로마조약 입안자들이 발전시키고자 노력했던 유럽통합의 목표는 경제통합을 수단으로 한 정치통합이었단다. ECSC와 같은 부문별 접근방식은 많은 문제점을 노출시켰다. ECSC는 복합산업경제의 한 부문인 석탄과 철강 산업부문에서만 통합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하여 타 경제 분야로부터 고립된 가운데 통합의 궁극적 목적은 달성될 수 없었다. 원자력공동체인 Euratom은 이러한 부문별 접근방식을 통한 통합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재확인할 수 있게 해주었다.
로마조약으로 탄생한 유럽경제공동체(EEC : European Economy Community) 역시 문제점을 안고 있었으나, 어느 정도 힘과 유연성을 지니고 있었다. 6개국은 장기적 안목에서 통합기구를 추구함으로써 OEEC와 경제적 이해충돌을 피할 수 있으리라고 낙관했다. 단기적인 안목에서는 통합추진은 6개국의 대내외적 정치․경제적 요인들의 연관 속에 이루어지게 되었다. EEC는 가능한 더욱 많은 이익집단과 단체들을 수용할 수 있도록 경제적 이해관계의 발전을 통한 정치적 목적의 달성을 꾀했어.
EEC가 당면한 일반적인 목적은 로마조약에 규정된 대로, "공동시장을 창설하고, 회원국들의 경제정책을 발전적으로 근접시킴으로써 공동체를 통하여 경제활동의 조화로운 발전을 도모하고, 지속적이고 균형을 갖춘 경제성장, 안전성의 증대, 생활수준 향상의 가속화, 그리고 회원국 내의 밀접한 결속을 증진시킨다."였다.
이러한 목적들이 경제적 측면을 강조한 것이기는 하나 정치적 목적이 배후에 깔려 있었다. 필연적으로 로마조약은 매우 방대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구체적 내용이 없이 일반적인 원칙만을 공표함으로써 관점에 따라 해석이 다를 수 있는 모호함이 있었다. 이러한 모호함은 훗날 심각한 논쟁을 야기하게 되었다.
EEC초기에는 경제발전이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EEC 성립과 초기의 발전은 우호적인 정치적, 경제적 환경에 의해 고무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57년 이후 몇 년 동안 EEC발전에 대해 EEC의 결성을 지원한 모든 사람들은 만족했다. 역외국가들은 이러한 점에 주목하였고, 성공적으로 운용된다고 생각했다. 그리스와 터키가 1959년에 준 회원국 가입신청을 했고, 1961년에는 영국이 자세를 바꾸어 가입신청을 하는 상황이 되었다.
EEC는 서유럽 통합의 중심기구가 되어갔으며, 현대 서유럽역사는 EEC의 활동과 그 활동에 대한 다른 국가들의 반응이 주요 내용이 되었다. 그러나 EEC의 앞날이 결코 순조로운 것은 아니었다.
EEC발족 후, 10년을 일종의 황금기로 보는 것은 너무 단순화된 시각이고, 이때까지 EEC가 너무 느리게 움직였다는 것이 더 정확한 판단일 것이다. 그러나 아뭏튼 EEC는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고, EEC의 목적이 달성되어가자 점차 회원국들 사이에 의견대립이 확연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의견대립은 1965년 이른바 '빈 의자 empty chair' 위기로 그 절정에 달했는데, 드골의 프랑스와 여타 5개국 간의 로마조약의 해석을 둘러싼 대립이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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