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ine Welt/독일 이야기

유럽방위공동체와 유럽정치공동체

행복나무 Glücksbaum 2004. 2. 6. 14:30

 

2.2 유럽방위공동체와 유럽정치공동체

 

Paris조약이 체결되고 나서 이와 비슷한 계획을 도모하는 여러 사상들이 출현하게 되었단다. 그러나 이런 사상들은 ECSC에 기원한 것은 아니었고, 주로 유럽각의와 OEEC에 의해 촉진되었다. 그런 예로 본느푸 계획으로 알려진 '유럽운송공동체', 농업부문의 플링린 계획 등이 있으나 어떤 실질적인 결과를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ECSC의 초기 경험을 바탕으로 일부 사람들은 부문별 통합전략보다 전체 경제의 통합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럽통합을 위한 새로운 관심의 초점은 경제부문이 아닌 방위정책 문제에 모아졌어.

 

공동방위정책이 제기된 계기는 한국전쟁이었다. 미국은 점증하는 소련의 위협에 대응하여 당시 서독의 재무장을 주장했다. 서독 역시 민주주의라는 거대한 임무에 서독 대중을 참여시키는 방법은 그들에게 서유럽 방어의 책임을 지우는 것이라면서 서독 재무장을 지지했다.

프랑스를 포함한 이웃 국가들은 심각한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현실적으로 서독이 재무장해야 한다는 필요성에는 공감하고 있었고, 동시에 미국의 압력을 뿌리칠 수 없는 것이 당시 유럽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과거 독일에 대한 두려움을 여전히 떨쳐버릴 수 없었다.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고륙지책으로 프랑스가 들고 나온 것이 플레뱅 플랜이라고 알려진 유럽방위공동체(EDC : European Defese Community)였으며, EDC의 성공을 위해 공동의 외교정책을 주관할 유럽정치공동체(EPC : European Political Community)가 뒤에 제안되었다.

 

이 계획에 영국과 북유럽국가들이 불참을 공식화함으로써 EDC계획은 ECSC의 6개국에 한정되었다. 이것은 '서유럽의 공동방위' 라고 하는 위상이 약화됨을 의미한다. EDC계획에 함축된 바는 ECSC의 것보다 더욱 커서 초국가주의적 통합에 한발 다가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ECSC와 EDC는 달랐다. 특히 중요한 점은 EDC에서 회원국들은 동등한 관계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문제의 초점은 서독이었다.

 

EDC조약에 따르면, 서독은 군대를 가질 수는 있으나 모든 서독군의 지휘는 통합지휘부에 넘겨야한 반면, 기타 회원국은 단지 군대의 일부만을 할당하면 되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점은 설령 EDC계획이 성사되었다고 할지라도 서독이 가만히 두었을 지는 의심스러운 대목이다. 아무튼지 간에 여러 가지 부가의정서와 관련하여 이 조약을 대하는 프랑스의 태도는 점점 의구심을 사게 되었다. 소련보다 독일에 대한 프랑스의 안보를 보장하려는 책동으로 보였던 것이다.

 

EDC계획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서독 수상 아데나우어는 통합된 외교정책이 존재하지 않는 가운데 통합유럽군을 창설한다는 것은 비합리적이라고 지적했다. 통합주의자들에게 새로운 활력이 불아 넣어졌다. 그들은 새로 통합된 외교정책을 수행할 EPC계획을 들고 나왔다. 이로써 정치통합에 한발 짝 더 다가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EPC계획은 EDC계획을 보완하는 것으로 EPC의 성공여부는 EDC계획이 성공하느냐에 달려 있었던 문제였다. 그리고 EDC계획은 프랑스 의회의 비준 여하에 달려있었다.

 

프랑스가 EDC계획을 진심을 지지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전통적인 프랑스의 두려움을 반영했을 따름이었다. EDC의 주목적은 서독 재무장의 저지였다. 미국이 압력을 가하고, 서독과 베네룩스 3국이 조약을 비준한 가운데, 프랑스 의회는 조약 비준을 거부했다. EDC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따라서 EPC계획도 사장되었다.

 

이로 인해 통합운동에 가해진 피해는 심각했다. ECSC만이 살아남았고, 다시 사람들은 부문별 통합에 관심을 모았다. EDC 및 EPC의 좌절로 야기된 문제는 역시 방위문제였다. 그 대안으로 1948년에 체결된 브뤼셀조약이 확대되어 서유럽동맹(WEU : Western Europan Union)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WEU는 단지 정부 간 협력체에 지나지 않았으며, 1980년대에 재생될 수 있을 정도로 미약한 존재였다.

 

EDC와 EPC계획의 실패로 통합주의자들은 크게 낙담하였으나, 그들의 꿈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모든 회원국들의 동의 없이는 어떠한 진전도 이룰 수 없는 OEEC의 제한성과 당시 국제 무역형태는 통합의 명분과 폭넓은 경제접근의 필요성을 제기하였고, 그 필요성은 1955년의 메시나 회동과 1957년의 로마조약을 거쳐 새로운 공동시장을 창설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나타났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