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16세기 말 - 17세기 초 역사적 배경. 일본의 가톨릭 선교는 1549년, 스페인 태생의 예수회 신부 프란시스코 사비에르(Francisco de Xavier)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후서양의여러나라로부터온각국의선교사들에의해그리스도교는점차융성해갔으나, 16세기말엽일본의통일국가를이루려는움직임이일면서그리스도교는박해의상황속에놓이게된다.
통일운동의 초대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인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서 ‘신부추방령’(1587년)이 내리면서 박해는 시작됐고, 그 뒤에 뒤를 이은 덕천가강(도꾸가와 이에야스)의 쇄국체제가 들어서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내려진 그리스도교 금교령, 선교사추방령(1614년)으로 인해 일본의 그리스도교는 암흑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히데요시 이후 도꾸가와 체제가 그리스도교를 탄압했던 주요한 이유는,
첫째,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가치관이 그들의 집권적 봉건체제에 합치되지 않는다는 판단에서였고,
둘째, 그리스도교 교인들이 하나의 종교적, 정치적 세력이 되어 그들의 체제에 도전하거나 반항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였다.
조직적이고도 치밀한 계획 하에 그리스도교를 금지하고 박해했던 도꾸가와 시대가 지나고 난 뒤, 그의 후계자들 역시 아예 이 타종교의 말살을 꾀하였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일본인들은 철저히 찾아내어 잔인한 고문을 가한 후 죽이곤 했다. 선교사들 역시 박해자들의 손에 고문을 당하고 죽음에 이르기도 했지만 간혹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선교사들은 죽이지 않고 그들 스스로 배교하도록 유도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 당시 일본 그리스도교 순교자들의 수는 선교사를 포함하여 대략 4 - 5만 명에 달했고, 17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일본에 공공연한 그리스도인은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게 된 채, 그 후 200년간 그리스도교 암흑의 시기라 일컫는 세월이 흘러가게 됐다.
이상에서 간략히 살펴본 바와 같은 가톨릭에 대한 참혹한 박해사가 그 배경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박해사 자체의 역사적인 기술에 작가의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다. 순교와 배교가 중첩되는 극적인 박해 상황의 전개 속에서 주인공 “세바스챤 로들리꼬” 신부의 신앙적 확신과 그로 인한 갈등과 고뇌,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신념을 꺾고 배교에 이르게 되는 심리적 변모의 과정을 추적하는데 작가의 관심이 있다.
작가는 앞서 일본에 와서 선교하다가 박해를 받고 배교한 신부 “크리스토바 페레이라”를 소개함으로써 흥미 있는 소설의 발단을 보여준다. ‘페리에라’는 유명한 신학교수이며 예수회 신부로 로들리꼬 의 스승이기도 하다. 승리의 신앙을 대표하는 인물 로들리꼬를 비롯한 제자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고, 일본 선교 시 교구장이라는 최고의 직위에 있던 그가 박해를 당해 변절해 버렸다는 소식은 로마 교회당국은 물론 로들리꼬와 그의 동료들에게 의혹과 충격을 안겨주었다. 승리의 신앙과 선교 열로 불타는 젊은 로들리꼬 와 그의 동료 신부들은 스승의 배교 여부에 대한 진위규명과 복음 전파를 위해 선교당국의 허가를 얻어 우여곡절의 항해 끝에 일본에 당도하게 됐다. 그러나 일본에 도착한 로들리꼬 신부 일행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관헌의 조직적이고 치밀한 박해의 상황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그리스도교 교인들의 형편을 몸으로 생생히 접하게 된다.
서간문의 형태로 기술되어 있는 제1장에서 4장까지는 로들리꼬와 가르페가 그처럼 엄청난 박해의 상황 속에 적응하며 겪는 육체적, 심리적 갈등과 고통, 그리고 배교한 일본인 신자 기찌지로오의 배반에 의해 로들리꼬가 마침내 일본 당국에 의해 체포되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이 “로들리꼬의 서간문”은 오늘날 포르투갈의 ‘해외영토사연구소’에 의해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물론 이 서간의 발신자는 실제의 로들리꼬 신부이다. 이 실제의 인물의 이름을 빌려서 작가는 이 서간의 발신자를 작 중 주인공 ‘로들리꼬’로 세움으로써 박해의 상황에 대한 소상한 보고서 형식을 취한 이 작품의 전반부에서 역사적 생동감을 넘치게 한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작가의 관심의 초점은 박해 상황 자체의 기술에 있지 않다. 오히려 작가는 가톨릭 신자들이 모여 사는 ‘도모기’라는 어촌의 한 오두막을 은거지로 삼고 참담한 박해의 현실을 지켜보며 갈등과 고뇌의 아픔을 되새김질하는 로들리꼬의 신앙적 고뇌, 즉 그의 심상을 좇고 있다. 작가는 ‘도모기’ 마을이 일본 관헌들에게 습격을 당해 그 곳의 두 명의 그리스도교 교인이 고문을 당한 후에 바다에 세워진 나무틀에 매여 죽게 되었을 때, 로들리꼬의 탄식과 절규이다. 주검 당하는 자들 앞에 아무런 능력이나 희망을 주지 못하는 무기력한 하느님을 보게 된 것이다.
여기서 작가는 무서운 ‘하느님의 침묵’ 앞에서 안타깝게 절규하는 로들리꼬의 외침을 독자들로 하여금 가슴으로 뼈저리게 느끼며 듣게 한다.
“그것은 하느님의 침묵입니다. 박해가 일어나기 오늘까지 20년, 이 땅에 많은 신자들의 신음소리가 가득 차고, 신부의 붉은 피가 흐르고, 교회의 탑이 무너져가는 데도, 하느님은 자기에게 바쳐진 너무나도 참혹한 희생을 앞에 두고도, 여전히 ‘침묵’만 지키고 계십니다.”
로들리꼬의 이러한 절규 속에서, 우리는 오랜 세월 쌓아온 그의 신앙적 기반이 흔들리고, 하느님의 승리에 대한 확신이 차츰 절망과 회의로 바뀌어가고 있음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지금까지 위대한 ‘성인전’에 나타나 있는 것과 같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찬연히 빛나는 그런 순교를 꿈꿔왔던 그는, 이곳 그리스도교 교인들의 순교에서 너무나도 비참하고 참혹한 순교의 현실을 보았고, 그의 마음속에 그려왔던 ‘가장 아름답고 성스러운’ 승리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상은 ‘빗물 속에 비친 - 진흙과 수염으로 더럽혀진 얼굴, 불안과 피로 때문에 잔뜩 비뚤어진’ 바로 자신의 얼굴처럼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목숨과도 바꿀 수 있으리라고 여긴, 묵상과 경건의 대상이었던 그런 신비한 ‘예수 그리스도 상’은 여지없이 깨어져 나가고 있었다.
기찌지로오의 배신으로 작 중 상황은 급전환 되었다. 심정적으로 이미 쫓기는 몸이었던 로들리꼬는 마침내 일본 관헌에게 체포되고 만다. 로들리꼬가 체포되는 과정에서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기찌지로오가 마치 예수를 유대 관헌에게 팔아 넘기던 가리옷 유다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물론 로들리꼬의 의식 속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겪어야 했던 예수의 수난의 과정을 로들리꼬 자신의 체포를 통해 중첩시켜 전개해가고 있다.
이런 방식의 “동일화”, 다시 말해서 예수의 수난과정과 로들리꼬의 그것을 동일화시켜 나간다. 이 동일화 방식은, 사건의 극적인 순간마다 되풀이 되고 있다. 여기서 ‘효과적’이라고 한 것은 작가의 의도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작가는주인공로들리꼬로하여금예수의수난을바로자신의수난의과정에끊임없이중첩되게하는방식으로, 오랫동안형성되어온그의신앙적관념과고통스러운그의새로운경험사이의단절감과고립감을더욱증폭시키고있다. 즉그의신앙적관념은그로하여금체포된후에도계속지금까지그를길들여온승리자, 예수그리스도의 ‘아름다운상’에매달리게하고있다. 이제그는자신이그리스도처럼죽음의공포를극복할뿐만아니라죽음자체까지도정복하는신앙을증언할기회를얻은것이라고생각한다. 만일그가극한상황에이르게되면, 이제까지침묵해온하느님의얼굴도결국그에게나타나무엇인가이야기해줄것이며, 그가지금까지겪고목격한무의미한것처럼보이던모든일의의미를알게될것이고, 또한그가용기있게행동했음도확인될것이다.
그러나리들리꼬는체포된후, 이곳저곳의옥사로옮겨다니며보고, 겪는일들은그의관념이얼마나비현실적이었던가를알게해주었고, 이로인해그는무기력한자기 자신과싸우며절망과좌절의나락으로자꾸떨어지게된다.
더욱이일본의관헌은지금까지도유명한도피성직자들대부분에게가했던박해처럼그렇게심하고혹독한백해를그에게가할의도를가지고있지않았다. 일본관헌들은그들의박해의체험을통해 ‘순교의피는교회의씨앗’이라는것을알고있었다. 따라서그들은스승페레이라에게했던것처럼로들리꼬에게도정중히배교를요구한다.
그방법은아주간단하다. 즉그들은예수의모습이조각되어있는동판을나무판에박아놓은판자를그의앞에가져다놓는다. 이것은 ‘후미’라불리는것으로서, 그리스도교 교인에게그목판을발을올려놓도록지시한다. 그러나그행위가배교를결심하는심각한행위일필요는없고, 다만그저형식적인행위로말해지고있는것이다. 로들리꼬도이목판앞에몇번인가세워졌으나, 그는그것을밟기를거부하곤했다. 이런거부행위를통해그의영웅적인신앙은잠시동안승리감을맛본다.
그러나짧은시간동안이런승리감을맛본후, 그는곧그승리감의대가가무엇인지를알게된다. 일본관헌들은그가배교할때까지그를대신해일본그리스도인을계속고문했던것이다.
이미배교하고난후일본관헌들을돕는위치에서있는스승페레이라까지나타나서그의거부가얼마나무의미한행위인가를역설하며배교를종용한다.
“일본이라는 땅은 ‘늪지대’이다. 묘목을 심으면 썩기 시작하는 바로 이 늪지대에 그리스도교라는 묘목을 우리들은 심어온 것이다. 그 동안 일본에 잠시 그리스도교가 꽃피웠던 것은 사실이었으나, 일본인들이 믿었던 하느님은 그리스도교에서 가르쳤던 하느님이 아니었다. 그들이 믿었던 하느님은 ‘거미줄에 걸린 나비’와 같아 외형과 형식만은 하느님처럼 보이면서 이미 실체 없는 시체가 되어버렸다. 이 민족은 인간을 초월한 존재를 생각할 힘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나에겐 ‘포교의 뜻이 사라졌다’.”라고-
이것이그의스승, 페레이라신부가몸으로체험한그의 ‘역사신학’이라고하겠다. 페레이라는자신의체험과지식을바탕으로이처럼로들리꼬를설득하고난그이튿날, 일본관리와함께그가갇힌옥사에찾아와로들리꼬가배교를결심할수있도록최후의방법을동원한다. 옥문밖에는구덩이속에거꾸로매달려바로자기 자신의배교를위하여죽어가는일본 그리스도교 교인들의신음소리가들리고있다. 페레이라는그신음소리의정체를밝혀주며, 또다시로들리꼬를설득한다. “이전에자신이배교한것은, 바로저들의죽어가는신음소리에도하느님이아무것도하시지않았기때문이다. 이처럼 ‘침묵’할뿐인데, 교회에오점을남기지않기위하여저들의고통과죽음을버려두는것이과연 ‘사랑의행위인가’, ‘예수그리스도가이곳에계신다면분명히그분은이들을위해배교했을것이라고”-
로들리꼬는마침내자기의 ‘둔중한아픔’을느끼며예수그리스도가새겨진동판을그의발로밟는다.
“통역이자기발근처에가져다놓은목판에는동판이박혀있고, 그동판에는일본의세공사가만든그분의얼굴이서툴게새겨져있었다. 그것은신부가오늘날까지포르투갈이나로마, 고아, 마카오에서수없이보아온그리스도의얼굴과는전혀다른것이었다. 그얼굴은위엄과자랑스러움을지닌예수그리스도의얼굴이아니었다. 아름답게고통을견딘얼굴도아니었다. 유혹을물리치고강한의지의힘을보여주는얼굴도아니었다. 그의발앞에놓인그분의얼굴은바짝마르고, 지쳐빠져있었다. 많은일본인들이밟은탓으로, 동판이박힌 ‘널판지’에는거무스레한엄지발가락자국이남아있었다. 그리고그얼굴도너무밟힌탓으로움푹패이고마멸되어있었다. 움푹팬인그얼굴은고통스럽게신부를쳐다보고있었다. 고통스럽게그를쳐다보는그눈은호소하고있었다. ‘밟아도좋다. 밟아도괜찮다’. 너희들에게짓밟히기위해나는존재하고있는것이다.”
이처럼로들리꼬의환영속에나타난, 예수그리스도는나로인해고통당하고, 학대받고, 짓밟히는너희들의그고통을내가짊어지겠다. “밟아도좋다. 너희들에게짓밟히기위해나는존재하는것이다.” 라고비로소말하기시작하는예수그리스도는이제더이상, 로들리꼬의전이해속에존재하던아름답고, 왕답고그리고지배자적인얼굴을가진그리스도교세계에있어서의승리자, 예수그리스도는더이상아니었다.
이제온갖영광과찬미를한몸에받으면서, 그러나인간깊은슬픔과고통과부조리앞에계속침묵만지켜오는그런예수그리스도도아니다. 그분은고통과죽음의공포를견딜수없어몇번이고배신했던기찌지로오같은약자, 이름없이죽음에이르는일본그리스도인들. - 즉가난한자, 병든자, 소외된자, 불구자, 배신자, 죄인, 무기력한자들의아픔을외면하지않고그들의고난과짓밟힘을외면하지않고그죽음에친히동참하는자이며, 또한스스로고통받고버림받은자로서자신과같이세상에서버림받고고난속에있는자들을향해용서와용납함으로서함께아파하며, ‘그럼에도불구하고’ 도리어위로와용기와희망과평화를주시는분이라고하는 ‘새로운예수그리스도의모습’을접하게된다.
일본의 가톨릭박해상황을배경으로깔면서주인공로들리꼬신부가배교에이르는과정을그린이작품을통해작가엔도가말하고자하는의도가이제분명히들어났다. 그것은배타적인서구의예수그리스도상을재고하는데그목적이있는것이다. 군주와같은권력과제왕과같은승리의위엄과재판관과같은심판주로서의예수그리스도의모습이아니라, 슬픔과역사의굴종당하는그런인간사에침투해들어와, 눈물을지닌어머니와도같이자비하고관대한예수그리스도의모습을제시하고있다.
역시 엔도가 쓴 또 다른 소설 <예수의 생애>에서 더욱 자명하게 나타난 대로 자신을 배반한 나약한 제자들마저 연민의 정을 가지고 용납했던 사랑의 동반자, 예수 그리스도의 그 정감어린 얼굴을, 이 작품을 통해서 다시 한 번 가슴 저리게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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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작가 ‘엔도 슈사꾸’는 <예수의 생애>, <사해의 호반> 등의 작품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작가. 그의 출세작이기도 한 이 소설, <침묵>은 1973년에 우리 나라에 소개 되었다. 이 작품은 그의 초기 작품에 속하며 이 작품의 특이성이란, 17세기 초엽의 일본 가톨릭교회의 극적인 박해 상황을 역사적인 상상력으로 포착하여 흥미 있게 그려가며 새로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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