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älbs/화롯가 이야기들

"명분과 실속"(고정욱)

행복나무 Glücksbaum 2009. 7. 26. 19:41

   

 

사내는 우연히 나와 같은 역에서 내렸다. 그를 본 순간 나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분명 아까 시위대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당당히 높이던 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순간 나는 그 사내의 정체가 궁금했다. 교과서 왜곡 항의시위대에 감히 찬물을 끼얹은 그 사내의 정체가 ….내가 항의시위대에 참가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한우람 역사연구소의 총무 간사 직을 맡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우람 역사연구소는 대학 은사인 김 교수가 정년 퇴직하면서 사재를 털어 만든 연구소로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일을 하는 곳이었다. 일본의 교과서 왜곡으로 인해 국민들 분위기가 점차 험악해지는 요즘 김 교수는 여러 단체들을 규합해 항의 시위를 주도하고 있었다.

"김 군도 친구들 연락해서 내일 나올 거지?"

어제 김 교수 퇴근하면서 마치 결전을 앞둔 전사처럼 흥분한 얼굴로 물었다.

"네. 과 동기들이랑 선, 후배 다 연락했습니다. 아마 열댓 명은 올 거예요."

그래서 오늘 낮에 우리는 대학로에서 열린 ??범국민 역사교과서 왜곡 대책위원회 ??주동의 시위를 벌인 것이었다. 합법적인 시위였던지라 우리는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순서에 따라 구호도 외치고 격렬한 노래도 불렀다.

"과거사 은폐하고, 역사왜곡 자행하는 극우파는 각성하라!"

한참 시위가 무르익자 아스팔트 땅에서 올라오는 열기로 시위대의 가슴에는 뜨거운 것이 가득 차 올랐다. 노래도 부르고 극우파 화형식도 치르는 그때 누군가 시위대 앞에 몸을 던지며 나타났다.

 

"내가 잠깐 할 말이 있습니다!"

시위를 주동하던 선배는 잠시 멈칫했다. 그에게 마이크를 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확신이 안 서는 눈치였다. 이를 지켜보던 김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줘보라는 사인을 보냈다. 결국 마이크를 잡은 그는 달아오른 분위기를 가라앉히기라도 할 것처럼 말을 꺼냈다.

"역사 왜곡한 일본을 규탄하는 거 좋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일본 사람을 규탄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일본 사람 규탄하면 우리 같은 서민들 먹고살기 어렵습니다. 일본은 미워하되 일본사람은 미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반일 분위기 때문에 일본에서 관광객들이 무서워 한국에 못 옵니다. 이거 되겠습니까? 서민들은 뭘 먹고삽니까? 예? 여러분 제발 시위를 하더라도 일본 사람은 미워하지 마세요. 일본 사람들이 자유롭게 올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세요."

 

"저거 뭐야? 순 친일파 아냐?"

여기 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분위기는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선배는 재빨리 마이크를 빼앗아 분위기를 정리했다.

"자 우리 신나는 광복군의 노래 한 곡하겠습니다. 눈보라 휘날리는 광활한 벌판~."

 

선배에게 밀려난 사내는 시나브로 시위대를 에워싼 군중 속으로 녹아들었다.

그런 사내를 나는 시위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서 다시 조우했던 것이다. 사내는 대로를 따라 한참 언덕길을 걸어 올라갔다 .어느새 나는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뭐 하는 사람이길 래 그런 용기 있는 소리를 할 수 있었을까? 말은 맞지만 그렇게 그런 장소에서 이야기해야 할 정도로 그 문제가 절박했을까? 내가 그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대로를 걷던 그 사내가 내 시야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어, 이거 어디로 간 거야?"

한참을 그가 사라진 부근에서 한참을 우왕좌왕하는데 갑자기 누군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영업 끝났시다."

 

돌아보니 아까 그 사내가 길가의 입 간판을 문안으로 집어넣고 셔터 문을 내리고 있었다. 간판엔 다음과 같이 어지러운 글자가 한자와 일본어를 섞어 쓰여 있었다.

한국식 목욕 센터. 일본인 대환영. 맥반석 사우나, 한증탕, 마사지, 때밀이, 각종 과일 팩, 머드팩, 단돈 5,000 ¥!

 

 

   

글, 고정욱 : 소설가로 원균 그리고 세종로 1번지 등의 작품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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