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ine Welt/한국 이야기

4월 혁명

행복나무 Glücksbaum 2002. 4. 28.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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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재정권의 성장 

6.25 동란(한국전쟁)으로 인한 국가적인 위기 속에서 안으로는 또 정치적인 위기가 싹트고 있었다. 그것은 독재정치의 경향이 점차 표면화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의 독재적 경향은 그가 고집하여 대통력 중심제의 헌법을 제정할 당시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반민족행위자를 처단하려는 특별법의 시행은 그이 반대로 인하여 실시되지를 못한 채 좌절되어 버리는 일까지 있었다.

그러다가 동란 중인 1952년의 제2차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이승만은 자기가 국회에서 당선 될 가능성이 희박함을 알자 독재적 경향을 노골화 하였다. 즉, 대통령 직선제로 헌법을 개정하려던 그의 의도가 국회에서 거절되자 그는 공공연한 국회 탄압을 시작한 것이다. 그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드디어 5월 26일에는 많은 반대파 의원들을 감금 하였다. 이를 5.26 정치파동이라고 한다. 결국 기립표결에 의하여 대통령 직선제를 포함한 소위 oo 개헌안이 통과할 때까지 이 정치적 긴장상태는 계속되었다.

 

그 후 1954년 5월 총선거에서 강압적인 수단으로 승리를 거둔 자유당은 이승만의 대통령 3선을 목적으로 하여 현 대통령에 한하여 중임제한을 폐지해야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개헌안을 제출하였다. 이 개헌안은 표결의 결과 일단 부결이 선포되었으나 사사오입의 이론을 내세워 그 다음 날 가결이 재선포 되었던 것이다.

이에 야당인 민주국민당과 무소속 의원들은 호헌동지회를 구성하였고, 이것이 모체가 되어 야당세력을 규합한 민주당이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1956년의 정.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당 부통령이 당선되었고, 1958년의 총선거에서는 자우당의 3분의 2의; 개헌 선을 저지할 수 있었다. 이때 자유당은 도시에서 참패를 하였고, 위압에 의하여 쉽사리 표를 얻을 수 있는 농촌에서 승리하였을 뿐이었다. 이러한 사태에 직면한 자유당은 1958년 12월에 차기 정․부통령선거에 대비하기 위하여 국가보안법과 지방자치법의 개정을 꾀하였다. 야당의원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힌 자유당은 12월 24일 무술경관을 동원하여 그들을 감금하고 자기네만이 출석한 국회에서 이를 통과시키는 소위 24파동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2. 신흥재벌의 탄생 

독재정권의 성장과 짝하여 경제계에서는 재벌이 형성되는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6.25 동란에 의한 혹심한 파괴는 생산력을 마비상태에 빠지게 하였고, 또 전비의 조달과 마대한 유엔군 대여금의 원화지출은 인플레이션을 조장하였다. 이 결과 동란 중에 물가는 매 반년마다 배로 오른 지경이었다. 이 인플레이션은 일부 상인과 브로커를 제외하고는 일반국민의 생활에 커다란 위협을 주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생산업자들은 과대한 이익을 노리고 정부에 의존하여 특별융자, 특혜환율에 의한 미화불화, 특혜배급 등을 받게 되었다. 또 외원에 의한 외자도입도 정부를 통한 특혜 배치로서 처리되었다. 그러므로 죄원 등에 의하여 산업이나 기타 시설이 동란 전보다 발전한 것은 사실이나 그 이득을 본 것은 일반국민이 아니라 소수의 특정 기업체들이었다. 이들은 은행귀속주를 불하받아 금융기관마저 차지함으로써 그 토대를 더욱 확고하게 하였다. 이러한 결과 다음 표에 나타난 바와 같이 종업원 200명 이상을 가진 대기업체들이 총출하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엄청나게 큰 것이 되었다.

이리하여 정부와 결탁한 신흥재벌들이 불과 몇 해 사이에 형성되었고, 이들은 상품시장을 독점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경제적 불균형 상태가 확대되어 갔다. 우선 충분한 융자를 받지 못하는 중소기업체들은 몰락하는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불균형 상태는 도시와 농촌사이에서 더욱 심하였다. 농업은 점차 그 비중이 적어져서 동란 전에는 국민총생산이 50%를 차지하던 것이 1958년에는 겨우 37%를 차지할 뿐이었다. 농민은 농지개혁에 의하여 농토를 얻었으나 여전히 영세농의 성격을 면하지 못하였다. 미곡가격은 생산비보다도 낮아서 가난한 농민들의 생활은 더욱 가난하게 되었다. 정치적인 독재와 결탁한 소수 신흥재벌들의 경제적인 독점은 이렇게 사회적 불안을 키워가고 있었다.

 

3. 4월 혁명 

독재정치로 말미암아 사회적 불안은 1960년 3월의 정․부통령 선거에 이르러 그 절정에 달하였다. 자유당정부는 이 선거에서 공무원 특히 경찰을 동원하여 갖은 불법을 감행하였다. 이미 시험적으로 실시한 바 있는 3인조의 상호감시적인 투표, 사전투표, 환표, 야당선거운동의 방해, 폭력행사 등등의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한편 자유당 정권에 기생하여 성장한 재벌들로부터 막대한 선거자금을 긁어 들였다.

이러한 노골적인 불법행동에 대한 반항은 선거 전인 2월 28일 대구에서의 학생 데모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데모는 학원에 대한 정치적 간섭을 배격하는 소극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선거 당일인 3월 15일에 마산에서 일어난 학생들의 데모는 부정선거 자체에 대한 항의였다. 이 데모는 경찰의 실탄 발사에 의하여 약 100명의 사상자가 나자 일단 조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4월에 들어서서 데모 학생에 대한 경찰의 비행이 드러나자 이에 자극된 마산의 학생과 시민은 다시 데모를 일으키게 되었다.

 

마산의 데모는 서울로 비화하였다. 4월 18일 에 고려대학생의 데모가 있었고, 이들은 귀교하는 도중에 폭력배의 습격을 받아 부상자가 났다. 그 다음날인 19일에는 시내의 거의 전 대학의 학생들이 ‘부정선거 다시 하라.’ ‘민주주의 사수하자.’ ‘이승만 정부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데모에 돌입하였다. 국회의사당 앞을 거쳐 경무대로 향하던 학생들이 그 어귀에 이르렀을 때 경찰은 실탄을 발사하였다. 동료의 죽음을 본 학생들은 극도로 흥분하여 일부 건물을 소거 하는 등의 험악한 사태를 빚어냈다. 당황한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이에 따라 군대가 출동하여 사태는 일단 가라앉게 되었다. 그러나 25일 대학교수단의 시국선언문 발표와 데모에 이어 학생과 시민의 데모는 밤을 새우며 진행되었고, 다음날에는 더욱 치열하여 갔다. 계엄군은 이에 발포하지 않았다. 궁지에 처한 이승만은 결국 대통령직을 물러나고 이로써 즉시 사태는 회복되었으며 대학생들은 질서회복을 위하여 또한 앞장서 나섰던 것이다.

 

1960년 4․19혁명은 맨주먹 밖에 가지지 못한 민중이 강압적인 정권을 타도하는데 성공한 한국사상 최초의 혁명이었다. 그 주동적 역할을 담당한 것은 학생이었다. 기성세대나 기성권위에 대하여 불신을 품고 있던 학생들이 4월 혁명의 선두에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이 혁명은 국민의 전복적인 지지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4월 혁명은 박정희독재정치와 부정축재에 반항하는 국민의 힘이 학생들의 젊은 의기를 통하여 발현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에 밝은 전망을 던져주었다.

 

 

[이기백, 한국사 신론, 개정 중판,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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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아, 역사를 다시 살펴보는 것은 미래들 설계하는 귀중한 일이란다.

시간을 비워 꼼꼼하게 읽어보고 인테넷 검색으로 여러 글들을 접해보는 것도

좋은 일일 것이다.  

 

한국현대사에 있어서 겨레가 살아가는데 진정한 민주주의의 의미가 무엇인지,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은 무엇인지,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가꾸어가는 민주주의의 꽃은 어떻게 피었는지....  

 

너희들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은 지구촌의 한 타일이야.

세게 인류가 하나되어 살아가는 평화의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생각을 키우고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 중요해.

 

건강하게

즐겁게 생활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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