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ine Welt/한국 이야기

4월 혁명

행복나무 Glücksbaum 2002. 4. 28. 18:30

얘들아,

역사를 다시 살펴보는 것은 미래들 설계하는 귀중한 일이란다.

시간을 비워 꼼꼼하게 읽어보고

인테넷 검색으로 여러 글들을 접해보는 것도

좋은 일일 것이다.

한국현대사에 있어서 겨레가 살아가는데

진정한 민주주의의 의미가 무엇인지,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은 무엇인지,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가꾸어가는 민주주의의 꽃은

어떻게 피었는지…,

 

너희들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은 지구촌의 한 타일이야.

세게 인류가 하나 되어 살아가는

평화의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생각을 키우고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 중요해.

 

건강하게,

즐겁게 생활해라.

 

 

......

 

 

 

4월혁명   

한민족이 오랜 역사적 시련을 겪는 가운데, 그리고 국토가 양단된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 이룩한 민주 국가 대한민국은 6.25 동란(한국전쟁)을 통한 민족적 비극을 치르는 동안에 이번에는 안으로부터의 큰 시련을 치러야 했다.

초토화된 수도 서울에 돌아온 정부는 폐허에서 재건한 벅찬 과업을 담당해야 했다. 실제로 해방이후 한국 사회는 급격한 변천 과정을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사상적 혼란 속에서 겪어야 했다. 그것은 이를 테면 한국 사회의 현대화 과정을 의미 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과도기적 사회 변천과정에서 한국 사회에는 불안이 점증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회 불안은 6.25 동란 이후로 더욱 격심해졌던 것이다.

 

이승만을 에워싼 자유당 정권은 단적으로 말한다면 독점 자본과 경찰권의 야합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독점 자본이 비대와 함께 여러 가지 경제적 불균형상태가 조성되어 가고 있었다. 동란에 의한 막심한 산업시설의 파괴에도 불구하고 동란 후의 한국의 경제가 어느 정도 전면적인 성장을 보여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국민의 생활수준의 향상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당시 한국의 경제가 정치인과 야합한 소수인의 자본가에 의해서 독점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통계에 의하면, 해방 전인 1941년의 남한의 산업시설은 94%가 일본인에게 속해 있었으며 해방 이후 그것을 정부가 접수하여 몇몇 사람들에게 불합리한 방법으로 불하해주었다. 한국의 독점자본은 이와 같이 하여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이들 소수의 독점 자본가는 정부로부터 여러 가지 형태의 특혜를 받음으로써 손쉽게 그들의 자본을 증대시킬 수 있었다. 그 반면에 중소기업의 성장은 저지되고 경제적 분배는 불균형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물가는 해마다 격심한 상승률을 보였으며 그것은 일반 시민의 구매력을 저하시켰다. 노동자들의 임금이나 봉급의 인상은 물가상승에 비례하지 못하였다. 그 위에 농산물 가격의 하락은 농민생활을 더욱 곤경에 빠뜨렸다. 설사 농산물 가격에 상승되었다 하더라도 다른 생활필수품인 공산품의 가격에는 훨씬 미치지 못하였다. 1953년에서 1959년에 이르는 사이에 비료가격의 상승은 500%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경제의 독점과 불균형, 물가상승은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불안정의 원인이 되었다.

 

경제적 불안정과 더불어 연쇄적으로 일어난 것이 사회적 무질서였다. 갑작스럽게 특권과 부를 누리게 된 소수의 신흥계급과 가난 속에 허덕이는 일반인들 사이엔 일종의 적대 감정이 흐르게 되었다. 6.25 동란은 수만의 전쟁미망인과 10만의 고아를 남겨 놓았다. 농민들은 생계유지가 어려워 농토와 고향을 버리고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들었다. 실업자 수의 정확한 통계를 찾아보기 어렵지만, 1961년의 한 연감에 의하면 실업자 총수 279,000명 중에는 대학 졸업자로서의 실업이 72,000명, 제대한 실업자, 폐업한 실업자, 감원된 실업자가 각각 51,000명임을 가리키고 있다. 대학졸업자와 제대 장병의 실업이 가장 많았다는 사실은 고등 교육과 군사교육을 받은 많은 젊은이들이 불평과 불만에 차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ㅇ든 사회의 불안 속에서 새로운 가치관은 확립되지 않은 채 기존의 전통적인 모럴은 파괴되어 갔다. 그러한 환경에서 사회적 범죄는 늘어가고 있었다.

 

6.25 동란기를 전후한 한국의 정치적 상황은 더욱 희망적이 아니었다. 강인한 권력에의 의지를 소유한 이승만과 그를 에워싼 자유당 정권은 한국이 가고 있는 방향과는 아랑곳없이 권력 유지에만 급급하였다. 동란 중이었던 1952년에 제2대 대통령 선거를 몇 달 앞두고 이승만은 그가 국회를 통해서 재선 될 가망성이 희박해지자, 헌법을 개정하여 대선을 직선제로 바꾸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의도가 국회에서 거부되자, 그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반대파 국회의원을 탄압하는 가운데 그해 5월 26일에 그가 의도한 대로 헌법을 개정하여 직선제로 고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이승만은 그가 대통령의 자리를 물러나지 않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헌법을 뜯어고치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1954년에는 3선을 위하여 현 대통령에 한해서만 중임제한을 폐지한다는 내용의 헌법 개정이 또한 불합리한 방법에 의해서 강행되었다. 그리하여 헌법과 법률들은 집권자들의 부당한 행위까지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또 그러기 위하여 집권당은 경찰력을 동원하여 야당을 탄압하곤 하였다. 그것은 이제 막 자라나야할 한국의 민주 정치를 독재정치로 이끌어가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정치적 추세는 정치적 부패의 근본적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 정치적 부패와 부정은 1960년 3월 정.부통령 선거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던 것이다. 자유당 정권은 민심이 이미 그들에서 멀리 이반되어 있다는 사실도 무시하고, 이 선거에서 경찰과 공무원을 총동원하여 갖은 불법적 수단을 감행하였다.

 

1960년 2월 28일, 지방 도시인 대구에서 학생 데모가 일어났다. 그것은 학원에 대한 정치적 간섭을 배격하는 학생들의 항변이었다. 선거 당일이었던 3월 15일에는 마산에서 다시 학생 데모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것은 부정선거에 대한 학생들의 저항이었다. 경찰은 이들에게 발포해서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데모는 일단 진압 되었으나 4월에 이르러 바닷가에서 한 학생의 처참한 시체가 발견되자, 마산에서는 다시금 학생과 시민의 데모가 일어났다.

 

이와 같이 하여 마산에서 일어난 부정선거에 대한 규탄의 학생 데모는 서울에 비화되어 4월 19일에는 서울의 거의 모든 대학교의 학생들이 들고 일어나게 되었고, 고등학교까지 이에 합세하였다. 그리고 주요 지방 도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학생 데모행렬은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민주주의 사수와 이승만 정권의 타도를 외치며 서울 시가를 누볐다. 데모 행렬의 일대가 대통령 관저 가까이로 물러가자 경찰은 발포하여 유혈의 참경을 빚어냈다. 계엄령이 선포되어 군대가 출동해서 사태는 일단 가라앉았다. 계엄령 하인 4월 25일에는 대학 교수단의 데모가 서울의 시가를 누비고, 이에 호응한 학생과 시민은 서울의 시가를 온통 메웠다. 군대 역시 침묵으로 학생과 시민들을 편들었다.

 

이승만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국민의 기대와 그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하는데서 온 불평과 불만이 고조된 때에, 3.15 부정선거는 드디어 학생들을 혁명으로 불러내고야 만 것이다. 그것은 또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이루어진 것이기도 했다. 그것은 한국에 있어서의 최초의 민주혁명이었다. 국민은 이제 누구나 한국의 민주주의는 살아있고, 또한 앞으로도 살아 나가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한우근, 한국통사, 개정 3판,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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