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älbs/화롯가 이야기들

빈 그릇이 되기 위하여

행복나무 Glücksbaum 2022. 11. 18. 18:37

빈 그릇이 빈 그릇으로만 있으면 빈 그릇이 아니다.
채우고 비웠다가 다시 채우고 비워야 빈 그릇이다.
빈 그릇이 늘 빈 그릇으로만 있는 것은
겸손도 아름다움도 거룩함도 아니다.
빈 그릇이 빈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채울 줄 알아야 한다.
바람이든 구름이든 밥이든 먼저 채워야 한다.

채워진 것을 남이 다 먹을 땍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비워져
푸른 하늘을 바라보아야 한다.

채울 줄 모르면 빈 그릇이 아니다
채울 줄 모르는 빈 그릇은 비울 줄도 모른다.
당신이 내게 늘 빈 그릇이 되라고 하시는 것은
먼저 내 빈 그릇을 채워 남을 배고프지 않게 하라는 것이다.
채워야 비울 수 있고 비워야 다시 채울 수 있으므로
채울 것이 없으면 다시 빈 그릇이 될 수 없으므로
늘 빈 그릇으로만 있는 빈 그릇은 빈 그릇이 아니므로
나는 요즘 추운 골목 밖에 나가 내가 채워지기를 기다린다.

시, 정호승


[19.Jan.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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