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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윤증의 효와 노강서원

행복나무 Glücksbaum 2024. 1. 16. 16:35

명재 윤증은 인조 14년(1636) 12월 만주족이 쳐들어와 병자호란이 발생했을때 선생 급히 강화도로 피난하였다 한다.한 달 뒤 만주족이 강화도까지 들어왔다고 하니 일찍이 피난을 떠났다는 이야기, . 그러자 그의 어머니 이씨 부인은 결심한 바가 있어 부군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적의 손에 죽느니 자결하는 편이 떳떳할 것입니다. 이렇게 뵙고 영결하려는 것입니다.” 부군이 외출하자 부인은 하인들에게 뒷일을 부탁하고는 스스로 목을 매었다.
소년 윤증의 나이 겨우 9세요, 손위의 누나도 10세에 불과하였다.
윤증은 하인을 데리고 모친의 시신을 거두어 임시로 묻었다. 8개의 돌을 가져다 사방에 묻고 또, 숯가루를 뿌려 표시해 두었다.
어린아이로서 이처럼 차분하게 상주의 도리를 다했다고 한다.

강화도를 점령한 만주족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조선사람을 포로로 삼았다. 적의 포로가 된 소년 윤증은 허리춤에 간직하고 있던 자그만 보첩을 꺼내서 누나에게 주며 이렇게 당부하였다. “만약에 서로 헤어지게 되기라도 하면 누나는 이것을 신표로 삼기 바랍니다.” 적은 포로를 이끌고 한강을 건너 보름가량 김포에 머물렀다. 그때 나라에서 적과 협상을 벌여 1500명의 포로가 우선 풀려났다. 윤증은 다행히도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누나는 적의 손아귀를 빠져나오지 못하였다. 그는 만주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는 보첩을 꺼내 보이면서 하소연하였으나 누구도 도와주지 못하였다. 그런데 의주에 이르렀을 때 소식을 들은 어떤 관리가 적에게 몸값을 주고 소녀를 구해냈다. 어린 동생이 누나에게 준 문서 하나가 목숨을 살려냈다. 불의의 사태에 침착하게 대응하는 소년의 지혜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런데 만주족의 침략으로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슬픔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윤증의 가슴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럴수록 그는 열심히 글을 읽었다. 그로서는 어머니의 원수를 갚고 나라의 수치를 씻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공부뿐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조선 조정이 그를 찾았다. 하지만 윤증은 자신의 부족함을 이유로 세상에 나서기를 사양하였다(현종 10년).
사양한 이유는,
“정축년(인조 15년)의 난리에 신의 어머니가 강화도에서 숨졌습니다.
효성이 부족하여 비명에 어미를 잃었는데도, 저는 이처럼 구차하게 목숨을 보전하고 있습니다.
하는 일 없이 세월을 보내며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하고 웃고 먹고 옷을 입는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픕니다.”

조정에서는 높은 벼슬을 주고 여러 차례 그를 불렀으나, 윤증의 태도는 한결같았다고 한다.
오직 자신의 부족함을 질책하며 성리학과 예학 연구에 더욱 정진하였다고 한다.
아마도 노강서원을 이끌었던 같다.



Foto-노강서원(논산시 광석면 오강리) 뜨락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에 살아가는 후손들은 선생의 유훈에 따라 이웃사랑을 힘껏 실천하였다고 한다.
연간 수입의 3분의 1, 즉 1천 석이나 되는 쌀을 해마다 가난한 이웃을 위하여 썼다고 한다.

나는 성리학과 충효가 어떤 관련이 있는지 궁금해진다.  
그래도 백설이 덮힌 산하는  청청한 소나무를 돋보이게 하누나.


[재입력/ 06. Juni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