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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도여수(Lutz Drescher) 평신도 선교협력 동역자

행복나무 Glücksbaum 2024. 1. 22. 05:18

1953년 12월 01일 ~2024년 01월 19일 소천.

한국을 극진히 사랑했던
도여수(Lutz Drescher) 선교동역자의 부음을 접했다.
그의 헌신적인 삶에 감사를 드리며 하느님 나라의 안식을 기원합니다.

1992. 02~ 2001. 07까지 나와도 독일 DOAM(동아시아선교위원회와 모임)에서
직,간접 교류했던 동역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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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만 해도 페북으로 이랬는데…

김 인태 목사님
73세 생신 축하드립니다.
하느님의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

- Lutz Drescher (도 여수) 드림.


Pastor In-Tae Kim
Alles Gute zum 73. Geburtstag
Gott schützen Ihnen...

- Lutz Drescher (Do Yeo-Soo) 드림

[21. Juli 2023]





디아콘루츠 드레셔(1953.1~2024.1.17  72세의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하고 하느님 나라에 가신 그 분을 애도하며 공유한다. 또한 한국의 민주화와 통일에 큰 기여를 한 그 분으로 빈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진다.

루츠 드레셔는 한국의 영은교회 빈민 민중교회(오용식 전도사,)에서 1980년대에 바닥공동체생활을 한바있고  한국의  지난한 역사의 협곡을 지나온 분이다.
독일로 귀환후 하이델버르크대학에서  디아코니아학, 개신교사회실천학과정을 공부하신 루츠 디아콘 동아시아선교회의 중요 직무를 맡아 독일개신교의 동아시아 선교에  중추를 담당하였다. 특히 북한과의 긴밀한 소통의 한 축도 담당하였다.
독일의  신교 교회와 사회실천파트인 <디아코니아>는 평화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

한국과 관련된 장문의 기사가 2021년 4월 14일 독일의 일간지인 융에벨트 신문에 나왔다. 여기에 그 번역 요약문을 게제한다:

<독일 일간지 융에벨트 기사 번역 요약문-루츠 드레셔 인터뷰>:

다음은 1947년부터 간행된 독일의 일간지인 “융에 벨트지”는 진보적 매체이다.(룻츠 드레셔는 올해 나이 68세로 서남선교회의 동아시아 담당자로 직무를 수행하다가 독일 동아시아선교회의 대표로 직무를 수행하다가 건강상 직무에서 물러나 명예대표로  봉사하고 있다)

- 어떻게 해서 종교교육과 사회교육을 전공한 분이 한국을 가게 되었나요?
1981년 교회의 디아콘(독일에는 개신교안의 직제로 목사와 디아콘이 있는데, 디아콘은 이웃사랑실천을 하는 전문 섬김사역자로 디아코니아학과 사회교육학 등 전문 과정을 마친후 실천현장에서 일한다. 약 1만여명의 디아콘들이 독일에 있다. 한국에서는 한국디아코니아대학에서 2년과정을 2017년이래 진행하고 있다)으로 일을 시작하였을 때 한국인 목사님을 통해 한국의 광주민중항쟁 소식을 접하게 되어 충격을 받았다. 그 후 1986년 서남독 선교회가 한국에 선교동역자로 갈 의향을 물었고 즉시 그 제안에 응했다. 당시 관계하고 있던 한국에 있는 목사들과 실무자들은 민주주의와 인권운동으로 인해 수감되기도 하였다.

-  군사독재의 상황과 정치적 격변기에 어떠한 경험을 하였습니까?
1987년 2월 23일, 한국에 도착한지 얼마 안되어 최류가스의 세례를 받았다. 얼마후 대학생 박종철의 의문사를 폭로한 의사의 증언으로 전국적으로 시위가 벌어졌고 시위중 최류탄에 맞아 죽은 이한열 학생의 사건으로 6월 10일 거대한 항쟁이 시작되었다. 1987년 7월 9일에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을 기화로 있었던 160만여명의 군중 모임은 독재를 넘어선 하나의 축제와도 같았다.
한국생활 초기의 민주주의 학습과정과 언어학습과정이후 서울의 변두리에 있는 빈민가에서 한국의 민중들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 나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김대중 대통령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한국어 과정을 마치고 나는 서울의 북쪽에 있는 하계동에 있는 한 작은 교회에서 직무를 맡아 생활을 하였는데, 그 마을 이름은 “돼지마을”이었습니다. 4천여명의 사람들이 빈민촌(상계동)을 이루어 살아가던 그 지역에서 다양한 민중경험을 하였다. 그 마을은 나에게 새로운 고향이 되었다. 가난했지만 정말 사람냄새가나는 삶의 경험이었습니다. 이 작은교회는 광주민중항쟁을 통해 생겨난 민중교회에 속한 교회였다. 민중은 소외당하고 배제당하고 정치적으로 배척당하는 사람인데, 이러한 민중은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하에 생겨난 독립운동과도 맥락을 같이한다.

- 북한에도 여러번 다녀오셨다는데 어떻게 가능했었는지요?
9년간(1987-1995) 저는 남한에서 지내는 동안 북한 방문을 포기해야했다. 만약 북한을 방문했다면 남한에서의 직무가 힘들었을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1989년 처음으로 북한에서 온 조선그리스도교 연맹 대표단을 만났었다. 북한에 그리스도인? 사람들이 묻는다. 북한에는 두 개의 공식적인 교회 연맹이 있다. 그 연맹안에는 13,000여명이 속해있는데, 평양에 두 개의 교회가 있고 500개의 가정교회가 있습니다. 한국역사에서 그리스도인과 공산주의자들은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축으로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잘 알려진 사실인데, 김일성의 모친쪽은 기독교 가문이라는 점이다. 그의 모친 강반석(반석은 바위라는 의미)은 칠골교회 명예직 직분으로 교회를 섬겼다. 1988년 처음 지어진 봉수교회에 이어 김일성은 1992년에 칠골교회를 지었다. 그 교회는 변두리에 숨겨서 지은 것이 아니라 신도시 한복판에 지었다.  
나는 2001년 서남독선교회의 대표자격으로 북한의 초청을 받아 북한을 처음으로 방문하였고 2001년부터 2016년까지 직무를 수행하는 기간동안 4번 방문하였다.

- 분단된 남한과 북한의 공동의 경험지평과 38선(후에, DMZ)을 두고 갈라진 차이점을 무엇이라 말할 수 있는가요?
나는 네 번 북한을 방문하면서 독일에 사는 남한 사람들과 같이 동반하였다. 많은 것을 보고 경험을 하였지요. 그런데 우리가 두 개의 분단된 땅을 생각하며 종종 간과한 것이 있었는데, 공동의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한국의 본래 종교는 샤머니즘이다. 그 종교의 현상으로 감정과 엑스타시가 큰 역할을 한다. 흥미있는 것은 눈물을 흘리며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북한에서 김일성 가계가 등장할 때와 남한의 교회에서 예배드릴 때의 현상과 흡사하다.
다른 하나의 북한과 남한의 커다란 전통은 유교인데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묘지석에 위대한 수령동지 김일성은 우리와 함께 영존한다고 서술되어있다. 한국에서는 조상들이 우리와 함께 살아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문화적인 공동의 뿌리가 있지만 지난 75년간의 서로 양립된 발전 과정은 3만여명의 북한의 난민들은 남쪽에서 이질감을 느낄 정도의 상태가 되었다.

- 75년간 분단된 한국이 통일에 대한 노력을 어떻게 전망할 수 있을까요?
1950-1953의 한국전쟁은 정말로 끔찍한 상흔을 남겼습니다. 한국의 보수적인 교회는 군사적 반공주의에 입각하여 아직도 존재하고 과거에 인권침해의 치명적인 결과를 양산했다. 냉전의 희생양으로 아직도 수백만명의 한국인들이 이주해서 외국에 살고 있다.
북한은 한국전쟁으로 미국의 공습으로 초토화된 경험이 있다. 지금까지 북한 사람들에게 미국인은 치명적인 상으로 각인되어있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도 그러한 영향에서 진행된 것이다.

- 문재인 정부의 현재와 미국과의 관계는 어떠한지요?
3년전 따듯한 봄날의 경험은 지나갔다. 남한의 시민사회나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의 운동도 상당히 막혀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서로간의 군사적 대치를 멈추고 상생의 길을 모색해야한다는 입장은 계속되고 있다.

https://www.jungewelt.de/artikel/399499..html...


인터뷰, 룻츠 드레셔 ( 한국명: 도여수)


[재입력/ 17. Januar 2024]





[21. Januar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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