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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니가타현 사도광산(佐渡鉱山)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윤석열 검사정부 외교부는 동의

행복나무 Glücksbaum 2024. 7. 28. 05:10

일본 정부가 한국과 한국인을 향해 도발하는 사건이 계속 발생하고 있다. 그러나 윤석열 검사정부는 일본 정부에 굴욕 외교를 하면서 '한일 외교 관계 비정상화'는 이제 고착화됐다. 이 정부를 빨리 걷어내야 한다.

일제강점기 조선인(한국인) 강제동원 노동의 비참한 현장인  일본 니가타현 사도광산(佐渡鉱山)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는데 윤석열 검사정부 외교부는 동의하고 말았다. 외교부와 민족반역신문 조선일보는 "일본이 사도광산 현지에 일제강점기 강제 노역에 동원됐던 조선인 노동자의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 시설을 선제적으로 설치함에 따라 등재를 위한 한·일 간 합의가 이뤄졌다"라고 발표하고 보도했다. 마치 외교 성과라도 거둔듯 호도한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공개한 안내 간판인 '조선반도출신노동자관계시설적지안내'(朝鮮半島出身労働者関係施設跡地案内)를 보면 가장 중요한 '강제동원노동'이란 기술(記述)이 빠져있다. '조선인 동원 강제노동 사실'이 삭제된 것이다. 독일의 과거 역사 반성에서 이웃 국가들에 피해를 입힌 역사의 현장에 자신들의 죄악상을 일일이 명기하는 '당연한 태도'와는 너무 다른 일본이다.

2015년 7월 하시마(군함도)를 메이지일본의 산업혁명유산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때 이웃 국가인 한국을 설득시켜야 한다는 유네스코 등재 조건에 따라 일본 정부는 “1940년대 일부 시설에서 수많은 한국인과 여타 국민이 ‘본인의 의사에 반해’(against their will) 동원돼 가혹한 조건에서 ‘강제로 노역’(forced to work)을 했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설명문을 관계 시설에 명기하겠다고 했다. ‘본인의 의사에 반해’, ‘강제노역’ 등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동원 과정과 노동 환경의 강제성을 명확히 하겠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당시 한국의 외교부는 일본 정부와 합의해 유네스코 시설 등재를 약속했지만 이 약속도 일본 정부는 지키지 않았다. 이후 한국의 시민단체와 문재인 정부가 강력하게 항의를 했고 유네스코 본부는 일본 정부에 '약속을 지켜야 한다'라고 강력 권고했지만 9년이 지나도록 일본 정부는 외면하고 있다.

이번엔 유네스코 등재 시작부터 강제노동 강제성은 전혀 언급조차 없다. 조선인 강제노동은 주어가 없이 ‘모든 노동자’로 표현하는 등 일본인과 식민지 조선인이 함께 고통을 받았다고 희석화시켰다.

일본 정부는 2015년 박근혜 정부 때보다 한국 정부와의 외교 협상이 수월했다. 일본이 한국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이런 식으로 강행하는 건 윤석열 정치검사 정부의 대(對) 일본 정부에 비굴하게 구는 것에서 이유가 있다. 잘못된 일본의 태도를 윤석열이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거의 일본 식민지 시기 때 조선총독부와 같은 기능을 용산정부가 대신하고 있으니 말이다.

일본의 외교, 언행이 교묘하고 이중적인 외교, 혼네와 다테마에(本音と建前), 간(肝)이라도 당장 빼줄 거 같은 외교 언사와 실제 실행의 차이.

2022년 1월 29일 문재인 정부 시기 '사도 광산' 문제에 대하여 나는 여기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다.

<이 광산은 1910-1945년 한반도 식민지 기간 동안 일본으로 강제징용을 당한 당시 조선인(한국인)들이 광산에서 강제 노역을 당하면서 참혹한 죽음에까지 이르게 된 광산이기 때문에 일본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명을 반대하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 외교부는 ‘아이보시 고이치’(相星孝一) 주한 일본대사를 초치해 일본 정부가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징용 현장인 사도(佐渡) 광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추진하기로 결정한 데 대해 강하게 항의했다. 최종문 외교부 2차관은 외교부 청사로 아이보시 대사를 불러 강한 유감과 항의의 뜻을 전달하고, 한국인 강제 징용노역 고통의 역사를 외면하고 사도 광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 추진하려는 시도를 즉각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최 차관은 일본 정부가 2015년 일본 근대산업시설이라고 ‘군함도’를 세계유산 등재 당시, 한국인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안내문과 표식을 스스로 약속한 후속조치부터 더 이상 지체 없이, 충실히 이행할 것을 촉구했다.
일본 정부는 ‘군함도’ 한국인 강제징용 표기 약속을 이행하라는 유네스코 본부의 약속 이행 공식 촉구도 무시하고 심지어 도쿄 한 복판에 ‘군함도’ 홍보관을 신설하고 “조선인(한국인) 강제징용과 학대”는 없었다고 공공연하게 거짓말까지 하고 있다.

1천 만부 이상 발행 부수를 찍는 우익 대표신문 요미우리신문(読売新聞)은 1월 29일 오늘자 아침 사설에서 말하기를,

“정부가 귀중한 문화재의 세계유산 등록을 추천하는 것은 당연한데, 왜 국내에서 무용의 논쟁을 불러일으키는가. 역사 문제에 대한 주의를 바꾸고 대외 발신을 강화하는 계기로 해야 한다. (中略) 결국 추천을 결정한 것은 아베 전 총리 등 자민당 내 보수파의 목소리를 우선했기 때문일 것이다. 정부가 태도를 조기에 명확히 하지 않았던 것은 역사문제에 그르친 인상을 주는 것이 아닐까. 애초에 사도 금광산에 대해 '강제노동 피해 현장'이라고 주장하며 추천 취소를 요구하는 한국의 주장은 근거가 없다”そもそも、佐渡金山について「強制労働の被害現場だ」 と主張し、推薦取りやめを求める韓国の主張は筋が通らない。 (下略)”

내놓고 대놓고 요미우리신문은 거짓을 말하고 있다.
일본 최대 발행 부수인 요미우리신문이 거짓말을 노골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강제노동 피해 현장'이라고 주장하며 추천취소를 요구하는 한국의 주장은 근거가 없다”라고?  

사도 광산은 일제 강점기에 조선인 약 1,140명이 강제 노역을 했던 곳으로 한국 정부는 파악하고 있지만 강제 노역 숫자는 2,500명 -3,500명이 넘는 것으로 일본의 기록으로도 전해지고 있다.

사도 광산은 일본 에도시대(江戸時代) 또는 도쿠가와 시대(徳川時代),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운 에도 막부가 일본을 통치한 1603년부터 1868년까지의 시기- 부터 금광(金鑛)으로 유명했다. 태평양전쟁 시기에는 금뿐만 아니라 구리 등 전쟁 기초 물자를 확보하는 광산으로 활용됐다.
일본은 침략 전쟁 시기인 1939년부터 1945년까지 한국에서 강제 연행한 한국인은 724,787명에 이르러는 것으로 기록이 있다. 여기에 군인, 군속 365,263명을 합하면 조선인 강제연행자 수는 100만 명을 넘는다.
특히 미쓰비시광업이 운영한 사도 광산에는 조선인들이 대거 강제동원된 것으로 확인됐다.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지원재단 보고서(2019년)에 따르면 전쟁 기간 동안 사도 광산에는 약 1,200명의 조선인이 강제동원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는데, 최근 밝혀진 자료는 약 3,500명 이상이 강제 동원된 것으로 나오는 기록도 있다.

와세다대학 제2문학부 동양문화과를 졸업하고 한국으로 유학을 와 고려대학대학원 석사과정(한국사) 수료. 현재 니가타 국제정보대학 정보문화학부 교수인 ‘히로세 사다조’(広瀬貞三)의 연구 논문 ‘사도광산 조선인 노동자(佐渡鉱山と朝鮮人労働者(1939 - 1945)조사’가 있다.  https://cc.nuis.ac.jp/library/files/kiyou/vol03/3_hirose.pdf
“1939년 7월 일본 정부는 조선인 남성을 일본 광산, 탄광, 토목의 3개 분야로 한정해, 노동자로서 동원하기로 하고1939년도의 조선인 광산 노동력 도입은 8만5000명으로 결정했다. 처음에는 각 기업에 의한 「모집」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지만, 1942년 7월부터 '노무협회 알선'으로 변경해 1944년 9월부터 '징용'에 의했다. 이들은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가 밀접하게 연계해 국책으로 수행됐다. 사도 광업소는 1939년 2월 조선인의 제1진 '모집'을 시작했다. '모집' 지역은 충청남도에서 시작되었다.”라고 조사됐다.  
연구 보고서는 “1943년 6월 137명의 사망기록이 게재돼 있다. 이에 따르면 · 평균 사망 연령은 32.8세다”
이 연구 조서서 연구 논문에 의하면 “사도 광업소에서의 조선인(한국인)의 투쟁은 두 건 확인된다. 첫 번째, 1940년 2월 17일 98명이 열악한 노동 조건을 참다못해 작업을 거부하고 시위에 나섰다.
두 번 째로는, 1940년 4월 17일에 사도군 키리우치초의 한국인 노동자 97명이 “3월분의 임금 지급을 요구”하며 태업에 나섰고, 이후 한국인은 도망을 간다. “사도 광업소는 이렇게 조선인이 대량으로 도망하는 원인을 “1·자유 방종 및 부동성 성격  2. 부화 뇌동성 계획적 도망자” 등으로 간주했다. “강제적으로 동원된 조선인은 탈출을 시도하고 회사 측은 경찰이나 직업 소개소 등 강제력 시스템을 가동해 이들을 잡아 폭행을 가했다”고 조사됐다>


글, 김상수

[ Juli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