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영국․프랑스․소련 4개국에 의하여 분할 점령된 베를린의 처리문제.
패전국 독일의 수도 베를린은 소련군의 점령지대 안에서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의 공동관리 하에 놓인 고립지대였다. 1940년대 후반 냉전체제 하에서 독일의 분열양상이 심각해지자 독일문제의 일환으로서 베를린의 지위를 둘러싸고 동서대립이 생겨 결국 베를린 시 자체도 동서로 분열되었다. 그 후 베를린 문제는 냉전의 추이를 그대로 반영하여 1960년대 이후 냉전으로부터 동서공존으로의 이행경향이 강화되면서 베를린 문제도 사실상 서베를린의 처우문제로 변질되었다.
베를린은 4개국의 점령지대로 분할된 독일의 타 지역과는 별도로 특별지역으로 취급되어 시 전체가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의 4지구로 분할되었다. 그리고 4개국의 공동점령을 위하여 4개국의 사령관으로 구성되는 연합국 베를린통치기구가 설치되어 연합국 독일관리이사회의 일반적 지휘 하에 놓여졌다. 포츠담협정에서 규정된 독일의 통일적 취급을 둘러싸고 동서대립이 격화됨에 따라 베를린의 4개국 공동관리에도 마찰이 심해졌다.
소련은 1948년 3월 20일 독일관리이사회를 탈퇴, 서독지역 통화개혁안 및 그것의 베를린 적용안에 대하여 반발하고, 6월 16일 연합국 베를린통치기구에서의 활동도 중단함으로써 4개국 공동관리는 사실상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소련은 그 해 봄부터 베를린 출입제한을 단계적으로 확대하고, 6월 하순에는 베를린 출입의 육로와 수로를 전면 봉쇄하였다.
이에 대하여 서방측 3개국은 미군을 중심으로 공수대작전으로 이에 대항하였다. 전면봉쇄기간 중 9월에는 독일인에 의하여 베를린시의 행정도 분열되어 동․서베를린에 각각 별도의 시청이 생겼다. 이러한 제1차 베를린 위기는 소련 측의 봉쇄해제로 끝났으나, 1949년 가을 서독의 독일연방공화국과 동독의 독일민주공화국이 수립됨에 따라 베를린의 양분열도 각각 심화되었다.
1950년대 전반에 서방측 세계로 서독의 정치적․경제적 편입이 진행되자 소련의 독일정책은 통일독일보다 2개의 독일을 주장하게 되었다. 한편 동․서베를린 내의 교통은 개방되어 있었기 때문에 1950년대 중반에는 동독 이민의 약 반수가 베를린을 망명경로로 선택하였고, 이것이 동독에 미치는 영향은 컸다. 따라서 소련 측으로서 베를린 문제는 독일문제와는 달리 해결해야만 하는 과제가 되었다.
1958년 11월 소련의 흐루시초프는 서방측 3개국에 포츠담협정 불이행을 이유로 베를린에 관한 4개국지위협정 무효화를 서방측에 통지하고 서베를린 비무장 자유 도시화를 제안하였다. 서방측은 베를린에서의 4개국 지위는 포츠담협정에 의거하지 않으며, 포츠담협정 불이행의 책임은 소련에 있다고 반발하고, 이 제안을 거절하였다. 이리하여 베를린은 다시 긴장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1960년부터 급증하는 베를린 경유 동독난민을 단절시키기 위하여 1961년 8월 동독정부는 베를린장벽을 구축하여 동․서베를린간의 교통을 단절시킴으로써 제2차 베를린위기는 절정에 달하였다. 서방측 3개국은 4개국 지위협정을 이유로 항의만 하고, 대항조치는 취하지 않음으로써 군사적 충돌은 피할 수 있었다. 이렇게 베를린 장벽이 고착화됨에 따라 동․서독은 안정되었고, 베를린 문제의 위험요소는 제거되었다. 동시에 독일분할상태의 유지를 묵인할 것을 전제로 하여 유럽의 긴장완화가 이루어져 베를린 문제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이 점차로 저하되었다.
* 버뮤다회담 (Bermuda meetings) : 1957년 3월 21-24일 버뮤다제도의 해밀턴에서 이루어진 미국 대통령 D. D. 아이젠하워와 영국 총리 H. 맥밀런과의 회담.
1956년 G. A. 나세르가 수에즈운하를 국유화함으로써 나타난 중동 기타 지역에서의 민족주의 세력의 증대와 소련의 인공위성발사(1957년 10월)가 밝혀지자 공산권의 군사적 우위에 대처하여 미국과 영국이 힘의 정책을 확립하기 위하여 이루어진 회담이다.
회담 결과 미 ․영 양국의 외교정책 조정을 위한 의견 교환의 계속, 영국에 대한 미국제 미사일의 공여, 핵실험의 계속,바그다드조약 군사위원회에 미국이 참가할 것 등이 약속되었다. 버뮤다회담이란 일반적으로 상기한 미 ․영 정상회담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그밖에도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첫째, 1953년 12월 4-8일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 ․영국 총리 처칠 ․프랑스 총리 J. 라니엘 등의 3국 회의가 이루어졌는데, 유럽과 아시아의 제반 문제가 협의되었으며, 1954년 1월부터는 소련도 참가시키는 4대국 외무장관회의를 열기로 합의하였다.
둘째, 1961년 12월 21-22일 양일에 걸쳐 미국 대통령 J. F. 케네디와 영국 총리 H. 맥밀런이 회담, 소련의 핵실험 재개에 따라 미국도 대기권 내 핵실험을 재개하겠다는 데 대하여 영국이 양해하였으며, 베를린문제에 대하여 소련과 예비회담을 행할 것을 결정하였다.
'Eine Welt > 독일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독의 붕괴 (0) | 2002.03.02 |
---|---|
라인강의 기적은 없었다. (0) | 2002.03.02 |
독일의 분단 (0) | 2002.02.24 |
전후 복구의지와 세계냉전(冷戰)체제로 인한 분단 (0) | 2002.02.21 |
바이마르공화국과 히틀러 시대 (0) | 2002.0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