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ine Welt/독일 이야기

동독의 붕괴

행복나무 Glücksbaum 2002. 3. 2. 21:26

동독은 1980년대를 경제위기와 함께 시작한다. 제 10차(1981년 4월 11-16일)와 제 11차(1986년 4월 17-21일) 사회주의 통일당 전당대회에서의 중심논제는 과학기술혁명, 특히 정밀전자산업의 계속적 발전과 집약화(노동력, 원자재와 에너지 의 절약)에 관한 것이었다. 많은 동독의 시민들은 1980년대를 정체상황이라고 느꼈다. 기존의 것들을 넘어서 전제 사회가 나아갈 수 있는 목표가 존재하지 않았다. 개인의 자발성이 경진된 체제의 한계에, 상품 공급의 한계에, 그리고 국가라는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많은 시민들이 자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예를 들면 시민들은 동독 정부가 조인하고 대중매체가 공개했던 유럽안보협력회의협정(KSZE-Vereinbarungen)의 권리들을 주장하였다. 민간시민단체의 수효가 늘어났다. 점점 많은 수의 동독주민들은 사회체제에가 개혁될 가능성을 더 이상 믿지 않았으며, 서독으로의 출국이나 도피를 통해 늘 똑같은 일상이 되풀이되는데서 탈출하고자 했다. 소련, 폴란드, 헝가리에서의 개혁은 내부적 압력을 증폭, 강화시켰으며 당 자체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89년에 들어서서 동독은 극단적인 위기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동독시민들 사이의 불만은 점차 고조되었지만, 정지지도부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려 하지 않았다. 지방선거 결과의 조작(1989년 5월7일), 시위자들에 대한 경찰력 투입, 북경사태 유혈진압에 대한 옹호 등, 또한 동독 건국 40주년의 축하행사를 준비하면서도 여전히 베를린 장벽의 존속을 고수했던 사실 등은 이런 불만을 고조시켰다. 이 통치․사회 체제는 경직되었을 뿐만 아니라, 무력을 자신을 방어할 태세를 동시에 갖추고 있었다. 출국희망자 수는 늘어났다. 탈출 자들은 8월 부다페스트, 프라하, 바르샤바 주재 서독대사관 및 동베를린 주재 상주대표부를 가득 메웠다.

 

이미 수천 명이 불법적으로 국경을 넘어 오스트리아로 넘어간 후, 1989년 9월 11일 헝가리는 공식적으로 국경을 개방하였다. 동독 건국기념일을 맞아 국제적인 체면을 잃지 않기 위해, 사회주의 통일당 지도부는 서독대사관에 머무르고 있는 동독시민들의 출국을 허용하였다. 수만 명을 헤아리는 망명의 물결에 뒤이어 동독 내부에서는 공공연한 저항 시위가 차츰 기세를 더해갔다. 교회에서의 평화기도에 연계되어 특히 라이프치히에서는 “월요시위”가 생겨났다.

 

신 포럼(Neues Forum), 민주주의새출발(DA), 동독 사회민주당(SPD), 통합좌파(VL) 등 반대그룹들이 조직되고 그들은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요구를 주장했다. 이때 무엇보다도 개신교회의 역할이 새롭게 부각되었다. 많은 목사들이 교회 기반단체들과 함께 새로운 정당과 운동에 참가했다. 교회대표자들은 정치지도자에 공개적으로 자신의 요구를 주장하였으며, 모든 참가자들에게 비폭력을 촉구했다.

 

문화기관들과 예술동맹들에서와 마찬가지로 블록정당(독일자유민주당(LDPD), 기독교민주당(CDU)에서도 처음으로 비판적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무엇보다도 법치국가, 의사표현, 여행의 자유, 필요한 개혁에 관한 보다 광범위한 사회적 대화, 사회주의통일당의 권력 독점 및 전 사회에 퍼져있는 국가 공안국 통제체제의 제거 등을 요구하였다.

 

사회주의통일당 지도부는 이런 항의에도 불국하고 40주년 기념행사를 계획한대로 강행하였다. 항의 시위는 폭력에 의해 해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빈이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Michail Gorbatschow)는 동독의 개혁이 불가피 할뿐만 아니라 이미 뒤늦은 것으로 간주했으며, 만약 상황이 악화될 경우 소련은 현직 동독지도부를 더 이상 지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시켰다.

결과적으로 사회주의통일당 지도부 내에서 갈등이 생겨나게 되었다. 드레스덴과 라이프치히에서 사회주의통일당 지역 지도부의 일부가 반대파 대표와 대화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사회주의통일당의 권력과 조직이 와해되기 시작했다. 1989년 10월 18일 에리히 호네커, 귄터 미타크(Günter Mittag)와 요아힘 헤르만(Joachim Hermann)이 당 지도부로부터 물러나게 되었다.

 

에곤 크렌츠(Egon Krenz)가 사회주의통일당과 국가에서 호네커의 지위를 물려받았다. 통제된 개혁으로써 사회주의통일당의 지위를 본질적으로 유지하려고 했던 그의 시도는 좌절되었다.

1989년 11월 8일 새롭게 정치국이 구성되었고 슈토프(Stoph) 정부가 퇴진했으며 각료회의 의장으로 한스 모드로프(Hans Modrow)를 선출된 것도 동독전체를 휩쓸고 있던 시위를 진정시키지 못했다.

블록정당과 대중조직들은 구 지도부를 해체함으로써, 또 이제 그들에게 주어진 자주성을 강조하고 새로운 강령을 채택함으로써 구성원 감소와 신뢰 실추를 막으려 노력했다. 권력 남용, 구 정치지도층의 특권과부패가 밝혀지면서 시위는 한층 거세졌다. 국가와 사회주의통일당을 분리하겠다는 약속은 신빙성이 없어 보였고, 당원들은 중요한 국가 요직에 아직 많아 있었으며, 국가 공안국 해체는 지지부진하기만 하였다.

 

이런 가운데 동독시민의 여행 허가,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결정적인 돌파구가 마련되었다. 이는 동독시민들의 주된 요구 중의 하나가 실현된 것이며, 결국 개혁과 과정을 돌이킬 수 없게끔 만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새로운 문제들이 등장했는데, 이것은 양 독간 생활수준의 차이 및 화폐문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인민회의나 다른 이념 대표기구들은 정당성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원탁회의”가 생겼는데, 여기에는 기존 정당 외에도 다양한 반대그룹들이 동등한 권한을 지닌 채 참가하게 되었다. 기본적으로는 협의, 청문권이 부여되어 있었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점차 중요해졌다.

사회주의통일당 당원들은 크렌츠 지도부에 맹렬히 저항해, 1989년 12월 3일 사회주의 통일당 전체 중앙위원회 퇴진을 요구했다. 사회주의 통일당 특별 전당대회(1989년 12월 8일과 15일)는 당 해체를 거부하긴 했지만 권력독점 요구 및 과거 사회주의 통일당 관행과의 결별을 약속하였다. 새로운 당수도 선출되었고, 당과 국가의 분리가 강조되었다. 또한 사회주의 통일당은 당명에 “민주사회주의당”이라는 명칭을 첨가하였다(SEDPDS). 1989년 12월 1일 인민회의는 동독헌법에서 사회주의 통일당의 권력독점을 규정한 문구를 삭제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사회주의 통일당-민주 사회주의당의 몰락은 계속되었다. 1990년 1월 중순까지 1백만 명 이상의 당원이 탈당했다.

 

정치적인 과거의 완전한 단절을 의도하며 민주사회당으로 당면을 변경한 두 번째 시도도 정당성을 회복하지 못했다. 대부분 사회주의 통일당-민주사회주의당과 기본의 블록 정당 출신각료들로 구성된 모드로프 정부는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넓히기 위해 야당과 반대그룹을 각료직에 임명함으로써 정부의 책임을 나누려고 노력했다.

 

이런 노력의 목표는 1990년 3월 18일 예정된 선거 때까지 동독을 통치할 수 있는 상태로 유지하면서 우선 불가피한 개혁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어려운 경제상황을 타개하는 것이 중심과제였다. 처음부터 모드로프정부는 서독과의 새롭고 긴밀한 협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국내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으며, 탈출행위를 막을 수 있는 전망을 제시하려고 노력하였다. 한스 모드로프는 여기에서 국가 연합적인 구조를 배제하지 않는 “조약공동체(Vertragsgemeinschaft)”라는 개념을 강조하였다. 모드로프 정부는 “우리는 한 민족”이며 “독일은 통일된 조국”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양 독일의 통일을 주장했던 시위, 1989년 11월 28일 서독수상 콜에 의해 제안되어 동서독간의 국가연합 구조를 상정했던 “10개항 통일방안(Zehn-Punkte-Programm)”에 의해 그들의 정치적 목표를 수정해야만 했다.

기독교민주당과 자유민주당(LDP, 이전의 독일자유민주당) 그리고 재건설된 독일사회민주당 등 동독 정당들이 서독 정당인 기독교민주당(CDU)/기독교 사회당(CSU), 독일사회민주당(SPD), 그리고 자유민주당(FDP)으로 접근한 것은 시민들의 통일 노력에 큰 힘이 되었다.

 

1990년 2월 10일 서독 수상 헬무트 콜 및 외무장관 한스-디트리히 겐셔(Hans-Dietrich Genscher),는 소련 지도부가 경우에 따라 독일통일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고서 소련으로부터 돌아왔다. 이에 따라 모드로프 정부는 독자적인 국가구조를 발전시킬 수 있는 기반을 상실하게 되었다. 1990년 3월 18일 인민회의 선거에서 기민당(CDU), 민주주의새출발(DA)과 독일사회주의연맹(DSU)으로 구성된 “독일연합(Allianz für Deutschland)”은 압도적인 다수의 지지를 받았다. 이 연합은 독일통일을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선택한 동독 사민당(SPD)과 함께 로타 드 메지에르(Lothar de Maiziere, CDU)를 새 수상으로 하는 대 연정을 구성하였다.

 

뒤이어 양 독일정부는 협상을 통해 1990년 7월 1일부터 발효된 화폐․경제․사회통합 형성을 위한 국가조약을 체결하였다. 7월말 동독의 대 연정이 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정에서 이탈한 정당과 정부간에 제 2차 국가조약(“통일조약(Einigungsvertrag)”)을 체결하기 위한, 정당을 초월한 합의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험난한 협상을 거쳐 1990년 8월 31일 “독일통일 달성을 위한 조약(Vertrag über die Herstellung der Einheit Deutschland)은 조인되었고, 1990년 9월 18일 “실행과 해석을 위한 합의”를 통해 보충되었다. 이 합의는 독일 기본법 제23조에 따라 다섯 개의 신 연방국과 독일연방공화국의 국제법적 특권을 규정한 “2+4” 조약(“Zei-plus-Vier” Vertrag)이 2차 대전 당시의 4개 승전국에 의해 모스크바에서 서명되었다. 1990년 10월 3일, 양 독일은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었다. 국가로서 동독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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