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독일은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4대 강국에 의해 점령되었다. 그러나 이 '군사적 점령'은 구체적인 점령기간을 정하지도 않은 상태였고, 분할된 각 점령지역이 장차 별개의 국가가 될 것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독일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연합국의 전후 독일정책은 전쟁 중에 수립되었다. 1944년 말, "독일통제기구협정" 이 베를린에 설치되었고, 이 기구의 임무는 全독일에서 통일된 점령군 정책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정이 불가능할 경우 각 군사정부의 사령관은 자국 정부의 지시에 따라 해당 구역 내에서 독자적인 결정을 할 수 있었다. 이로써 전승국의 독일정책에 관한 거부권이 도입된 셈인데, 全독일에서 사태 발전이 어느 일방 점령군의 목표대로 되지 않을 경우 점령지역 내에서는 독자적인 행동이 가능해졌다. 이미 독일분단의 씨앗은 뿌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독일의 역사학자 안드레아스 힐그루버는 그의 저서 {독일현대사}에서 연합국이 서로 대립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배상문제라고 언급하고 있으나, 이는 매우 지엽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보다 중요한 문제는 소련의 동유럽으로 진출야욕과 1919년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고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려는 미국과의 세력다툼이 주요한 요인이라 여겨진다. 그렇지 않다면, 미국이 소련의 배상요구에 대해 그렇게 완강하게 반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소련은 배상을 통해 소련의 경제력을 미국과 동등한 수준으로 끌어올리려 했고, 그럼으로써 그들의 영향력을 확실하게 중․동부 유럽에 뻗으려고 했다. 미국으로선 이러한 소련의 의도를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힐그루버가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언급하면서 상당히 비중있게 다루고 있는 배상문제는 이러한 대립 속에서 배경을 찾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 그들의 이념적인 대립 또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독일이 항복한 후에 열린 포츠담회담에서 연합국은 "독일을 경제적 통일체로 간주한다."라는 것에 동의했으며, 독일을 "민주화하고, 민주주의 이념의 성공적 발전"을 추구한다는 것에 합의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일반적이고 화려한 수사 뒤에 숨겨진 그들의 서로 다른 생각들이다. 미국 등 서방측은 자본주의 경제체제 및 서방식 민주주의 체제를 생각했던 것이며, 소련은 소련식 사회주의 체제를 구상하고 있었다. 이미 소련은 독일이 항복하기도 전인 1945년 4월 30일에 발터 울브리히트를 중심으로 한 독일인 공산주의자들을 모스크바로부터 독일로 파견하여 소련식 행정체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소련은 소련으로부터 미국과 영국을 분리시키기 위해 병합, 인민민주주의 지대, 완충지대를 구사했고, 완충지대가 실패로 돌아가자 동부 독일을 인민민주주의, 즉 소련식 체제로 개편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전략 아래 소련은 1946년 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을 강제로 만들어 냈고, 미국 군사정부 사령관 클레이는 1946년 5월 3일 배상물품 인도 거부로 맞대응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46년 6월에서 7월에 걸쳐 파리 외상 회담에서 소련의 몰로토프 외상은 "소련 지역의 예를 따른 민주화"를 요구했고, 미국은 이에 대해 "미국은 유럽으로부터 힘의 정치적 군사적 퇴각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강조하였다. 덧붙여서 미국지역에서부터 연방제 독일을 수립하겠다고 밝혔다.
이 무렵부터 구체화되기 시작한 미국의 공격적 외교방향은 1947년, 트루먼 독트린과 마샬플랜으로 명확하게 드러났다. 마샬플랜을 수용하느냐 하는 여부를 둘러싸고 유럽은 이제 분명하게 동서진영으로 구별되기 시작했다. 마샬플랜에 독일의 서방 3국 점령지역을 포함시킨 것은 독일을 서방식으로 해결하겠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소련으로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소련은 마샬플랜에 대항하여 1947년 7월 14일에 소련점령지구에만 해당되는 "독일경제위원회"를 신설하였고, 미국은 서부지역만의 재건을 정책을 바꾸었다. "全독일" 표방은 미국에게는 더 이상 부합되지 않았으며, 특정조건하에서만 소련과 일치하였다.
1947년 11월 25일에서 12월 15일까지 열린 런던 외무장관 회담은 이제 냉전을 사실상 공식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회담에서 미국 국무장관 먀샬과 영국 외무장관 베빈은 슐레지엔의 독일 귀속을 주장했다. 이것은 소련은 미국이 그들의 지배권을 소련 점령지역인 동쪽으로 확대하려는 시도로 보았고, 미국의 독일정책은 마샬의 한 마디에 급선회하게 된다. 미국은 '서방식' 해결을 위해 서방점령지역의 독일인의 지지를 유도하게 되었다. 독일인들은 사실 미국이 소련보다 더 독일에 파괴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을 따르지 않고 다수가 서방측에 기울고 있었다.
이 시기 독일인들은 어떠했는가? 그들은 크게 세 그룹으로 나뉘었다. 첫째는 정통적인 독일 외교정책인 '줄다리기'정책을 계승한 소국으로 축소된 중립국 독일을 지향하는 그룹과, 동방화된 독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방으로 통합된 독일을 지향하는 그룹이었다. 이 세 집단의 공통점은 하나의 독일, 즉, 이른바 '全독일'을 지향했으며, 어느 누구도 독일의 분단을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는 점이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그룹은 중립국 독일을 지향하는 세력과 서방통합을 주장하는 이들이었다. 소련은 독일에서는 인기가 없었다. 따라서 동방화를 추구하는 세력은 독일 내에서 소수집단이었으며 큰 영향력을 갖지 못했다. 중립국 독일을 지향하는 세력은 그것이 독일의 전통적인 대외 정책이었으므로 중요하다. 반면, 서방화를 지향하는 그룹은 당시만 해도 별로 알려지지 않은 집단이나, 전후 독일의 재건을 담당한 이들은 바로 이들 서방화지향 세력으로부터 나왔다. Konrad Adeunauer가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다. 특히 이들은 서방 3개국 연합국으로부터 충분한 지원을 얻을 수 있다는 이점도 갖고 있었다. 2차대전 직후의 독일에서 서방 3개국의 지원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논쟁 역시 주로 중립국 독일을 지향하는 그룹과 서방화를 지지하는 세력 사이에 논쟁은 1949년 1,2차 연방하원선거에서 후자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이제 독일은 분명하게 서유럽통합에 적극 나서게 된다. 이것은 미국․영국․프랑스에게는 매우 고무적인 사실이었다. 이제 서방 3개국, 특히 미국은 그들의 계획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1947년 런던 외무장관 회담의 결렬 이후, 미국은 독자적인 서방국가 계획 실현에 소련과 어떠한 종류의 합의를 도출하는 것을 포기하였다. 이후 미국은 본격적인 대소련 봉쇄를 시도하게 되며 소련에 대한 효과적인 전진기지로서 서독의 부흥과 서유럽통합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1948년 3월에 브뤼셀 조약이 체결되어 서유럽 국가들의 공동 방위를 꾀하게 되었다. 이것에 대해 힐그루버는 소련을 대상으로 한 동맹체제로 평가하고 있으나, 실상은 독일에 대한 방어체제로 기능하였다.
그러나 서유럽이 소련과 동구 국가들에 대항하여 제대로 방위하기 위해서는 독일의 부활이 필요했다. 부언하자면, 독일의 막강한 경제력이 서유럽 방위에 필수적이었다. 이에 미국은 본격적으로 독일의 부활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적어도 서부 독일 지역만이라도 다시 부흥시켜 서독을 서유럽방위의 전초기지로 삼고자 했다. 프랑스가 여기에 반대하면서, 베스트팔렌 조약과 같은 해결책을 시도했지만, 프랑스로서는 미국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다. 동부 독일이 소련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임이 분명해지자 미국과 영국, 프랑스는 서방 3국의 점령지대를 하나로 통합하여 새로운 국가를 수립하는데 합의하였다. 1949년 9월 21일, 정식으로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이 출범한다. 동독은 조금 뒤인 10월 7일에 독일민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이로써 독일은 전범국가라는 멍에를 쓴 채, 분단국가로 다시 부활하게 되었다.
'Eine Welt > 독일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라인강의 기적은 없었다. (0) | 2002.03.02 |
---|---|
독일, 베를린의 전후 문제 (0) | 2002.02.25 |
전후 복구의지와 세계냉전(冷戰)체제로 인한 분단 (0) | 2002.02.21 |
바이마르공화국과 히틀러 시대 (0) | 2002.01.28 |
제2의 독일제국 탄생 (0) | 2002.0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