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셔 공원 설치 작품
크리스토와 쟝-끌로드(CHRISTOS & JEANNE CLAUDES)
"포장작가"로 알려진 크리스토 부부가 독일의 오버하우젠의 공업용 가스탱크를 빌어서 공간 가로지르기 기법의 설치 "The Wall"을 선보였다. 크리스토 부부가 쌓은 장벽은 여러 가지 색을 칠한 1만 3천개의 오일 드럼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의 45%가 노란 색,30%가 오렌지 색, 그리고 전체의 2%-6.6%가 그 이외의 색으로 이루어지도록 고안했다. 이 장벽은 높이는 26미터이고, 폭은 68미터인 구조물이다.
또 1927년 피터 베렌스(Peter Behrens)에 의해서 설계된 이 가스탱크는 오버하우젠 지역에 가장 먼저 생겨난 저장고로서 높이 117미터에 총 216.5리터들이의 용량을 가지고 있었고, 철판으로 만들어진 실린더 모양의 관통 형 건물이었다. 과거에는 이 가스탱크를 코르크 가스 저장탱크로 사용했다고 한다. 이 가스탱크가 손상에서 복구된 이후로 IBA 엠셔 공원에 포함되어 보다 고상한 품격을 지닌 예술전시 공간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불과 불꽃전(Feur und Flamen)"이 이곳에서 있었음) 그리고 이 전시는 오버하우젠 성(Schloss Oberhausen)의 "란트 마르켄 예술(Landmarken- Kunst)" 중 한 행사로 기획되어졌다.
가스 탱크 위에서 오버하우젠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데다가 독일의 경제 성장을 이룩한 "라인강의 기적"을 물씬 느끼게 하는 루어 지역의 산업시설 공장 지대 풍경을 뒤로 하고 있었다. 이 가스 탱크의 10층 엘리베이터를 내려 난간 아래로 내려다보면 크리스토 부부의 장벽을 볼 수 있었는데, 루어 공업지역의 한 가스 탱크안의 풍경을 완전히 바꾸는 시각적 충격을 갖게 했다.
사람 하나 크기 정도의 석유 드럼통이 마치 분필조각을 쌓아 놓은 것처럼 작게 보였다. 이곳 10층에서부터 관람자들은 천천히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눈앞에 펼쳐진 장관을 목격할 수 있었는데, 아래에 내려와 올려다본 장벽의 장관은 위에서 본 것과는 정반대로 그야말로 나 스스로가 작은 한 인간임을 확인하게 하는 것이었다.
크리스토 부부의 장벽 작업과
일본과 미국에서 파라솔을 설치한
환경작품을 담은 카타로그의 표지)
처음 크리스토가 이와 같은 작업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1958/59년 "포장된 오일 드럼통"작업에서 기인하는데, 1962년에 파리의 Rue Visconti에 드럼통으로 쌓은 바리케이트 "철로 만든 커튼"에서 더 발전 된 형태가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크리스토가 1966/67년 크뢰러 뮬러 미술관에서 설치했던 피라미드 모양의 "56개의 오일 드럼통"으로 이어졌고 1968년 카쎌과 오텔로, 1973년 아브다비에서 오일드럼통 작업들을 선보였었다. 그 중에 무엇보다도 뉴욕에서의 "담"과 "철로 만든 커튼"에서 가장 깊은 근원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 가스탱크의 지하층에는 크리스토 부부가 지난 1992년에 베를린 국회의사당을 포장할 때 있었던 일들을 자료화한 기록자료 전시가 있었는데, 1970년대 이후 환경을 대상으로 조각 개념을 확장한 크리스토를 비롯한 환경미술가들의 집념과 예술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높이 사게 했다.
10년이 넘게 독일의 정치가들을 상대로 로비활동을 벌여 결국에는 자신의 예술을 실현해 낸 크리스토 부부의 기록영화는 아주 감동적이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크리스토의 베를린 국회의사당 포장 계획을 앞에 놓고 저마다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앞세워 신랄한 논쟁을 벌이는 독일 국회의 안건 처리 장면이었다.
이미 독일에서는 자신의 정치 색을 분명히 알 수 있을 만큼 정계의 유명한 인사들이 이와 같은 예술가의 엉뚱한 계획에 대해 보인 반응을 살펴보면, 기민당의 보수적 정치인들은 포장이라는 개념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무언가를 포장한다는 것은 은닉하는 것이요, 부끄러운 것을 가리는 일이다. 그런 고로 독일의 정치를 상징하고 독일 민족의 자존심을 상징하는 독일의 국회의사당을 포장한다는 것은 독일 민족과 독일 정치를 기만하는 것이고 이것을 허락하는 것은 독일 정치사에 남을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다"
그러나 한 사민당 대표의 말은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토 부부에게 표를 던지는 것을 돕기에 충분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우리시대의 예술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정부가 지원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확실히 말하고 싶은 것은 한 인간이 자신의 신념을 10년이 넘도록 굽히지 않고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지켜나가 오늘과 같은 국회의 논쟁의 안건으로 삼을 수 있다면, 나는 그의 신념을 존중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15일 동안의 베를린 국회의사당 포장.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포장된 예술가의 작품을 벗 삼아 사진도 찍고 춤도 추며 한판 축제를 벌였다. 그것을 위해 크리스토 부부는 그들의 청춘을 던졌다. 처음 자신의 예술계획에 들떠 국회의사당을 찾았던 무렵의 크리스토 부부에게는 젊음의 기운이 차있었으나 완성된 포장을 보고 환히 웃는 그들의 얼굴에는 옅은 주름이 퍼져 있었다. 지금껏 나는 환경작가들을 환경을 바꾸는 확장된 개념의 예술가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으나 다른 한편 그들은 불가능에 도전하는 사람들이었다. 자신의 프로젝트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예술가에게는 정치적 수완이나 경제적 능력이 뒤따라야 하고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할 만한 미학적 예술가적 신념이 있어야 한다. 인간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은 신념을 가진 인간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쿤스트 포름의 안드레아스 댕크는 다음과 같이 썼다.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서 그의 작업에 있었던 정치적 파괴력이 이제 사라졌다. 오늘날 그들의 설치작업을 위한 동기 부여는 상징적 기능과 함께 진부한 것이 되었다. 크리스토는 파리의 Rue Visconti에다가 알제리 항쟁에 격분해서 무명의 반파시스트가 벽에 쓴 '파시스트는 지나갈 수 없다!(Le Fascisme ne passera)'는 말 바로 그 아래에 '비웃는 커튼'을 설치했다. 그리고 그 당시 여러 미네랄 원료회사의 빈 오일 드럼통의 사용은 마지막을 만났다. 손톱 자국 하나 나지 않은 번쩍이는 오일 드럼통은 사용된 흔적도 없고 재활용을 기다리고 있다. 관객들이 보다 더 잘 감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리프트를 설치하고, 내용적인 의미와 설치의 형태 또한 상대화하고, 100미터의 높이가 깡통의 집합을 감동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는 얼마나 관람자에게 친절한 행위인가? 1962년 그가 파리의 Rue Visconti에 설치했던 깡통들과는 정반대의 것이다. 최소한 그의 깡통들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에 대하여 혁명적 차단을 의미했었다. 그들의 카타로그에는 다음과 같이 써있다. "우리 시대에 존재해 왔고 존재하고 있는 우리 산업의 기초적 에너지를 위하여..."
날카로운 잡지사 기자의 글을 읽고 있으면서 지금의 크리스토와 같은 작가들이 있게 하는 서구 미술계와 그 비평의 힘을 절감하게 되었다.
형식주의적 비평의 시각에서 보면 크리스토 부부의 오늘의 작업은 과거의 작업을 더욱 심화 발전시켜 미적 기교의 세련됨과 확장된 스케일, 그리고 적합한 공간의 설정과 그 기법 면에서 대가다운 설치의 새 국면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고,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그를 칭찬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개인사와 그의 작업에 스며있는 정치적 기질들을 제대로 읽고 그를 칭찬해왔던 이에게는 안들레아스 댕크에게서와 같이 다소간의 아쉬움을 갖게 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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