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älbs/화롯가 이야기들

고해성사 안내문

행복나무 Glücksbaum 2022. 10. 31. 14:22

명동성당 지하 고해소를 찾아올 때는
풀잎에 매달린 아침 이슬을 하나씩 가져오세요
추수가 끝난 들녘의 노을을 들고 와도 좋고
상고대 핀 흰 강변을 그대로 가져와도 좋아요
무엇보다도 명동성당 지하 고해소를 찾아올 때는
먼저 은행에 들러 당신의 돈을 다 찾아
배고픈 거리에 볍씨 뿌리듯 뿌리고 오세요
쓰러진 눈사람이 일어나 돈을 주워 가면
빈손에 가득 눈사람의 눈물을 담아 오세요
당신도 인생의 눈길을 함부로 걸어
눈길에 난 당신의 발자국이 길이 되지 못했지만
명동성당 지하 고해소를 고요히 찾아올 때는
병든 아내나 노모의 손을 꼭 잡고 오세요
고해소 문 앞까지 찾아올 수는 있지만
내 문을 두드릴 수 없는 당신을 위해
나는 항상 밖으로 영원히 열려 있으므로
고해소 문을 두드릴 수는 있지만
나를 열고 들어올 수 없는 당신을 위해
나는 이미 열려 있는 당신의 영원한 문이므로
오세요
당신이 아침이슬이 되어 고해소에서
풀잎과 장난을 쳐도 좋아요

시, 정호승


[31. Aug.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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