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älbs/말과 말들...

6월항쟁 20주년: 박종철 사망사건의 전말 (上)

행복나무 Glücksbaum 2022. 11. 17. 00:34

아아, 박종철, 민주화 밑거름되다.

20년 전 한 젊은이가 세상을 떠났다. 한국 정치사상 가장 빛나는 민주주의 혁명인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이다. 부정한 권력이 만든 범죄에 국민은 분노했다. 그 분노는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타올랐다. 쿠데타로 권력을 잡고 시민의 가슴에 총구를 난사하는 천인공노할 만행도 서슴지 않았던 철권정권도 온 국민의 고문 규탄과 민주화 열망에 무릎 꿇지 않을 수 없었다.
빛나는 민주화의 밑거름이 된 박종철의 죽음. 세월의 흐름도 그 죽음의 의미를 퇴색시킬 수 없다. 6월 민주항쟁 20주년을 맞아 ‘민주화운동의 대부’인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 수석(65)으로부터 박종철 사망사건의 전말을 담은 원고지 200장 분량의 기고문을 받았다. 이를 3회에 거쳐 게재한다.
〈편집자 주〉
...

박종철 열사가 물고문당한 옛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실.
서울대생 박종철군이 공안당국의 물고문에 숨진 사건은 동아일보와 중앙일보 등의 연이은 특종보도로 그 전말이 세상에 알려졌다. 천인공노(天人共怒)할 군사정권의 ‘범죄’에 분노한 국민들은 6월항쟁을 일으켰고, 한국 언론은 민주화 투쟁과정을 끈질기게 보도함으로써 값진 승리를 일궈내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이 같은 한국 언론의 빛나는 업적이 진보적임을 자처하는 일부 언론학자에 의해 왜곡되거나 감추어지고 있다. 이러한 점을 우려하며 1987년 민주항쟁과 한국 언론의 역할을 되짚어본다.
한국 정치사상 가장 빛나는 민주주의 혁명인 6월항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었다. 1987년 치안본부에 연행되어 고문 끝에 숨진 박종철 사건이 세상에 드러나자, 이 천인공노할 사건을 향해 끓어오른 국민들의 분노는 온 나라를 진동케 했다. 1980년 피비린내 나는 광주항쟁을 야기하고 정권을 잡은 5공 신군부 세력조차 성난 국민들의 열화와 같은 고문 규탄과 민주화 요구에 무릎 꿇지 않을 수 없었다.
“경찰들, 참 큰일 났군!”
1987년 1월 15일 오전, 신성호 기자(중앙일보)는 검찰 간부 방을 지나다가 한 간부의 독백을 들었다. ‘예사롭지 않은 일’이라는 기자의 직감이 일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어쩌다 그런 일이…”라면서 아는 척하며 간부에게 접근했다. 그 간부의 입에선 ‘남영동’ ‘서울대생’ 등 ‘큰일 난 사건’의 단서가 될 만한 꼬투리가 새어나왔다. 퍼즐맞추기와 같은 복잡한 탐문취재 끝에 경찰수사 과정에서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날 중앙일보에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단신기사가 실렸다. 박종철의 이름과 그 죽음이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물론 6·10항쟁과 6·29선언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시초였다.
.......

1987년 1월 당시 명동성당에서 열린 고 박종철군 추도 및 고문근절을 위한 침묵시위. <경향신문>
14일 오전 11시 20분쯤,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수사실에서 조사받던 서울대생 박종철군(당시 21)이 조사 도중 갑자기 쓰러져 숨졌다. 경찰은 박군의 사인을 쇼크사라고 발표했으나, 검찰은 박군이 수사관의 가혹 행위로 인해 숨졌을 가능성에 대해 수사를 시작했다.
이 보도가 나가자 경찰로서는 어떠한 형태로든 해명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6일 오전에 있었던 강민창 치안본부장의 발표다.
1월 14일 오전 8시 10분쯤, 서울 관악구 신림동 하숙방에서 연행하여 오전 9시 16분께 아침으로 밥과 콩나물국을 주니까 조금 먹다가 어젯밤 술을 많이 먹어서 밥맛이 없다고 냉수나 달라고 하여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10시 51분께부터 신문을 시작, 박종운군의 소재를 묻던 중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 부속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쯤 사망하였음.
이보다 앞선 이틀 전, 의사 오연상(중대부속병원)은 간호사와 함께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불려갔다. 동행한 수사관은 “꼭 살려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5층 9호 조사실이었는데, 바닥에는 물이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7~8명의 수사관이 허둥대며 한 청년에게 열심히 인공호흡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청년은 이미 숨진 상태였다. 시신은 중앙대학교 용산 병원 응급실을 거쳐 경찰병원 영안실에 안치되었다.

온 국민 규탄에 철권정권 무릎 꿇어
17일 동아일보는 오연상 입을 빌려 대공분실 조사실 상황과 시신상태를 보도했다. 복부가 팽만해 있고 폐 안에 수포음이 있다고 전해졌다. 수포음이란 물고문을 연상케 했다. 확산되는 의혹만큼 경찰의 사실은폐 욕구도 커갔다.
14일 19시 40분쯤. 남영동의 치안본부 대공분실 경찰 간부 2명이 박종철의 시체를 유족에게 인계하는 데 필요한 관련 서류를 들고 서울지검 공안부장 최환을 찾아왔다. ‘변사 사건’으로의 검찰 묵인을 압박한 것이다. 이후 검사의 지휘 아래 유족에게 시체를 넘기게 된다. 이 사건도 ‘조사 중 쇼크사’라는 경찰의 주장을 받아들였다면 사실상 물증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었다.
첫 단추가 잘못 꾀어지면 결코 옷매무새를 바르게 할 수 없는 법이다. 기록상 쇼크사라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던 최환은 관할 용산 경찰서에 “변사사건에 대한 상세보고를 하라”고 지시했다. 경찰의 ‘회유’와 ‘협박’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케 하는 사례는 수없이 많다. 사체 부검을 위한 압수수색영장에도 불구하고 경찰이 사체를 내놓지 않으려고 버텼다. 최환의 설득으로 가까스로 사체의 인도에는 동의하였지만, 이제는 “사체부검을 경찰병원에서 하자”고 억지를 부렸다. 결국 한양대 부속 병원에서 부검키로 합의했다. 부검담당 의사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 과장인 황적준 박사가 맡았다. 안상수 검사, 박동호 한양대 병원 의사 배석하에 부검을 하게 된다. 가족으로는 박종철군의 삼촌 박월길씨가 입회했다.



박종철의 사인은 ‘쇼크사’한 것이 아니라 물고문이었음은 부검 참관인들의 증언으로 만천하에 밝혀졌다. 이것은 이 사건의 분수령이었다. 부검의인 황적준 박사는 “물고문 도중 질식사한 것으로 보인다”는 소견을 냈다. 여기가 끝이 아니다. 경찰 측은 부검 감정서에 사인을 심장마비로 해달라는 회유와 협박을 거듭했다. 같은 날 발표된 검찰과 경찰의 발표가 서로 어처구니 없게 달랐던 이유 중에 하나다. 진실을 영원히 가릴 수는 없었다. 끝내 거짓 감정 의견을 제출할 것을 강요한, 박종철 축소조작 은폐의 최종 책임자인 강민창은 직권남용과 사인을 은폐한 직무유기 혐의로 구속됐다. 이런 판결에는 황적준의 일기장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기장에는 그 진실을 지켜내려는 치열함이 고스란히 배어난다.

▲1월 15일/오후 4시 40분-이기찬 경정으로부터 “치안본부장 지시이니 사체부검팀을 구성하라”라는 연락을 받고 4명으로 부검팀을 구성./오후 6시 20분쯤-치안본부에 도착, 바로 본부장 방으로 갔다가 5차장 박처원 치안감실로 안내됨. 이때 박 치안감은 “박군의 사체에 외상이 없고, 3~4회 욕조에 담갔으니 익사일 것”이라고 설명./밤 8시 30분쯤-한양대 영안실에 변사체 도착. 밤 9시쯤 안상수 검사, 한양대 박동호 교수, 박군 삼촌만 참가한 가운데 부검 시작./밤 10시 25분-부검 끝내고 영안실 사무실에서 안 검사에게 약 40분간 외상부위와 사인에 대해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사임을 배제할 수 없다”라고 설명./밤 11시 30분쯤-5차장 승용차로 치안 본부에 도착. 본부장 소집무실에서 와이셔츠 차림의 강민창 본부장과 차장 등 간부들을 만나 부검 소견을 설명.

▲1월 16일/ 새벽 2시- “아침에 있을 급한 불(본부장의 기자회견)부터 끄자”라는 간부들의 설득에 따라 착잡한 심정으로 ‘외표검사상 사인이 될 만한 특이소견 보지 못함’ ‘내경 소견은 오른쪽 폐하엽 하면에서 출혈반 소견’을 내용으로 발표용 부검 소견 작성에 동의./아침 7시 40분쯤-본부장실로 직행, 잠옷 차림의 강 본부장 만남. 가슴 부위와 목 부위의 압박에 의한 피하 출혈 사진을 제외한 나머지 부검 사진 13장을 본 강본부장은 만족한 표정./오후 3시께-부검에 입회한 한양대 박 교수와 박군 삼촌의 목격담이 동아일보에 비교적 상세히 보도된 것을 읽고 ‘어떤 일이 있어도 ‘부검감정서’만은 사실대로 기술해야겠다’라고 결심./오후 3시 20분-본부장 소집무실과 5차장실을 왕래하면서 대기하는 동안 강 본부장, 박 5차장, 주 4차장, 유 2차장이 나에게 “19일까지 감정서를 ‘심장 쇼크사’로 보고하라”고 회유.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강 본부장이 “목욕이나 하라”며 국과수 간부에게 100만 원이 든 봉투를 건네줌. 인사하고 나오는데 강 본부장이 “당신 은혜는 잊지 않겠다”라고 말함.

▲1월 17일/ 아침 6시 10분쯤-아내에게 “정의의 편에 서서 감정서를 작성하겠다”라고 결심을 밝힘./오후 5시쯤-친구인 배 검사는 “정치적 문제이니 만큼 신중하게 처리하라”라고 말함. 돌아오는 길에 형님은 “사실대로 알리는 것이 내 생각이다”라고 조언해주며 격려./밤 9시 55분-국과수 간부의 연락을 받고 워커힐 호텔 커피숍에 도착. 이 간부는 “3차장에게 ‘모든 사실을 정확히 밝히겠다’고 최종 보고했다”라고 전했으나 3차장(이경조 치안감)은 국과수에서 사인 문제를 어느 정도 묵인해줄 수 있는가 물었다고 한다./밤 10시 10분쯤-국과수 간부에게 워키토키로 신길산업(특수수사 2대)으로 부검의 조서를 받으러 오라는 통보.

▲1월 18일/ 새벽 4시-특수수사 2대 김기평 수사관에게 참고인 진술을 통해 모든 것을 사실대로 털어놓음.

경찰 “조사중 쇼크사다” 주장
시신은 16일 오전 9시 10분에 벽제에서 화장되었다. 어머니 정차순씨는 경찰병원 영안실에서 막내아들의 시신을 붙들고 “내 아들이 대체 왜 죽었소? 못돼서 죽었소? 똑똑하면 다 못된 거요?”라는 독백을 거듭했고, 임진강 지류에 잿빛 유골 가루를 뿌리면서 아버지 박정기씨는 “철아, 잘 가그래이…. 아버지는 아무 할 말이 없대이…”라고 허공에 대고 외쳤다. 이 작별인사는 절창이 되어 두고두고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거창한 웅변이 어떻게 이 말의 진실을 당할 수 있으랴.

1988년에 있었던 박종철 고문치사 현장 검증. <경향신문>
부검에 입회했던 한양대 병원 박동호 교수와 삼촌 박월길씨는 자신들이 듣고 본 것을 언론에 증언했다. 동아일보 1월 16일자는 그들의 증언을 인용해 “숨진 박군은 머리에 피하 출혈과 목, 가슴, 하복부, 사타구니 등 수십 군데에 멍 자국이 있었다”고 보도했다. 이어서 각 언론은 경쟁적으로 박종철군에 대한 고문 의혹을 제기하여 국민의 양심을 자극하였다. 이렇게 하여 고문사실은 기정사실화되었다.
당국은 더 이상 고문치사 사실을 숨길 수 없게 되었다. 전두환 정권의 고위 관계자들은 1월 17일, 관계 부처 장관과 유관기관 책임자가 참석한 정부대책회의, 이른바 관계기관대책회의라는 것을 연다. 여기서 결정된 것은 경찰로 하여금 자체조사토록 한다는 것이었다.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긴 것이다. 내무부와 치안본부 측은 이미 이때부터 ‘대공수사요원의 사기’ 운운하면서 경찰 자체조사를 강력히 요구했다. 경찰이 그토록 집요하게 자체조사를 요구한 이면에는 사건 조작의 음모가 들어 있었다. 그것을 전두환 정권 자체가 사실상 양해하고 추인해준 셈이다.

부검의 황적준 일기장 중요단서로
1월 18일, 경찰은 자체조사에 들어갔다. 요식적인 절차를 거쳐 두 명의 수사관이 물고문을 자행한 것으로 조사를 마무리지었다. 신길동 치안본부 특수수사 2대에서 조사할 때부터 재조사요원들은 상부로부터 “조한경 경위 등 2명을 조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는 경찰 상층부가 이미 조작 은폐 사실을 알고 그렇게 지시했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조작에 개입했음을 확인해 주고 있는 증거다.
1월 19일 발표된 치안 본부장의 자체조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는 박종철군이… 대공 수사 2단 5층 9호 조사실에서… 다시 머리를 욕조 물에 넣는 과정에서 급소인 목 부위가 욕조 턱에 눌려 질식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연행 시간은 8시 10분, 사망 시간은 11시 20분쯤. 사망원인은….”
같은 날 내무부 장관과 치안본부장이 해임되었다. 1월 22일에는 고문경관의 직속 상관인 유정방 경정과 박원택 경정에 대한 징계가 결정되었다. 19일 오후 5시 30분쯤에는 서울 형사지방법원에서 이들 경관 2명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
그날 경찰은 일찍이 그 유례를 볼 수 없었던 기상 천외한 피의자 호송작전을 펼쳤다. 두 경찰관은 ‘신길산업’이라는 위장 간판이 달린 치안본부 특수 수사대에 연행되어 있었다. 저녁 9시 40분께 나타난 두 대의 미니 버스 안에는 20여 명이 똑같은 점퍼를 입고, 모자로 얼굴까지 가린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 있었다. 고문 경관으로 지목된 조한경, 강진규의 얼굴을 언론에 노출시키지 않기 위한 쇼였다. 가짜로 두 사람만을 고문 경관으로 내세운 데 대한 경찰의 배려요, 예의였다. 이들 두 사람은 이러한 작전 끝에 서대문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이 호송작전으로 국민들의 의혹은 더욱 증폭되고, 여론은 더욱 악화되었다.
20일 낮 1시 40분, 서울대학교 학생회관 2층에서는 박종철군에 대한 추모제가 거행되었다. 방학 중인데도 15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였고, 조속한 진상규명을 요구하였다. 그들은 “우리의 종철이를 두 번 죽이지 말라” “고문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구호를 외쳤다. 언어학과 학생들의 추도시 ‘우리는 너를 결코 빼앗길 수 없다’를 한여학생이 읽을 때는 누구도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글, 김정남


[10.Apr.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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