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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진전을 위한 기행: “일본 군국화 반대” . 오키나와 섬. 2006

행복나무 Glücksbaum 2022. 12. 10. 00:47


[2006 오키나와 섬 평화 진전을 위한 기행. “ 일본 군국화 반대” ] 2006년 11월 13일(월)-16일(목), 3박 4일 동안, 서울노회 통일 사회부와 서울.북노회의 평화통일위원회와 공동 주관한 오키나와 평화 기행에 대하여 정리해본다.
한기장 서울노회에서는 장로 1명과 6명의 목사, 그리고 서울 북노회에서는 기장 전국연합회 간사인 청년 1명과 8명의 목사 등 전체 16명이 기행에 참여하였다.

13일 이른 아침 인천공항에서 모인 일행은, 비행기 일정상, 직항이 아닌, 후쿠오카를 들려 늦은 오후에 오키나와에 도착하였다. 나시오 이치로 목사와 통역을 해 줄 김지일 전도사(오사카에서) 등 영접을 나왔다.
류쿠(琉球)로 불렸던 오키나와는 일본 남단 약 1,000km에 걸쳐 있는 섬들로 이뤄진 곳으로, 15~16세기 대교 역 시대에는 명·조선·일본과 활발한 대외 무역활동도 전개하였던 독립국이었다. 그러다, 류쿠는 1609년 사쓰마 번(오늘날 가고시마 현)의 무력 침공·합병으로 명과 사쓰마 번의 지배를 받는 양속(兩屬:양 쪽에 속함) 관계를 갖게 됐고, 그 이후 류쿠왕국은 1872년 류쿠 번으로 격하되고, 1879년 군대와 경찰을 동원한 일본 정부에 의해 국왕이 폐위된 뒤, 오키나와현으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1945년 일본의 패전 이후에는 미군 점령 아래 있다가 1972년 일본으로 복귀한 곳이다.

미군은 오키나와 섬 상륙 직후부터 요미탄과 카데나 기지를 점령해 단기간에 확장·정비한 후, 남부 전선의 군사 작전, 일본 본토 폭격, 군수물자의 수송 등을 위한 군사기지로 사용을 하였으며, 그 이래로, 오키나와는 동아시아 주둔 미군의 후방 보급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 무려, 일본 전체 면적의 0.6%밖에 되지 않는 오키나와 지역의 75%가 군사 기지화되어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배경을 가진 오키나와의 나하 공항에 도착하니, 마타요시 쿄우코 님(오키나와 기노완 세미나 하우스), 니시오 이치로 목사(우루마 전도 소)와 함께, 오사카에서 우리 일행의 통역을 돕기 위해 오신 재일 조선인 김지일 전도사(오사카)와 그의 장모께서 마중을 나오셨다.

우리 일행은 도착하자마자, 후텐마 기지가 보이는 카카즈 고대라는 언덕에 올라가 오키나와의 미군기지 현황에 대한 설명을 니시오 이치로 목사를 통해 들은 후, 숙소인 기노완 세미나 하우스에 도착하였고, 저녁 식사 후에는, 기노완 고백교회에서 7명의 교우들과 더불어 오키나와 평화운동과 더불어, 매주 금요일 미군기지 앞에서의 집회를 이끌고 계시는 시마나 젠지 목사의 ‘오키나와의 평화운동’이라는 특강을 듣고, 토론을 하였다.
그의 이야기 가운데, 전투기가 뜨고 내릴 때의 굉음으로 인해 딸이 젖을 먹지도 않고 잠을 못 자고, 때로는 벽에 머리를 부딪히는 이상 현상을 보여, 미군 사령관을 찾아가 항의를 하게 된 것이, 오키나와 평화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참으로 맘이 아팠다.

이튿날은 아침 9시부터, 저녁까지 꽉 찬 일정을 보냈는데, 일본 시민단체인 ‘평화 실현을 위한 모임’에서 건립한, 한국인 강제 징용 피해자의 넋을 기린 [한의 비]가 세워진 곳을 방문하였고, 이어 오키나와의 지역구 3선의 원인 치바나 쇼이치 님의 인도로 요미탄 기지를 둘러보았다. 평범한 슈퍼마켓 주인이었던, 치바나 쇼이치(知花昌一)님은, 1987년 전국 체전이 열리는 오키나와 현의 소프트볼 경기 개회식에서 스코어보드 위 국기게양대에 걸려있던 히노마루를 끌어내려 불에 태우는 사건을 일으켰고 결국 재판에서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으며, 현재까지,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에 대한 저항운동을 일선에서 펼치고 있는 분이다.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토지가 요미탄 기지 안에 있었는데, 반환을 하기로 한 이후에도 계속 땅을 차지하고 있는 미군으로부터 70평 정도 되는 땅을 되찾아 현재, 기지 안에는 그의 땅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미군 쪽에서, 작지만 새로운 길을 만들고, 새롭게 철조망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권리를 되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과정을 통해 얻어질 수 있는 것인지 실감하였다. 또한, 그와 함께 1945년 봄, 오키나와 전쟁의 비참한 상황을 상징하는 찌비찌리 동굴을 방문하였는데, 이곳은 일본군은 미군을 “피도 눈물도 없는 잔혹한 동물”로 묘사하며 “포로가 되면 여자들은 능욕당하고, 남자들은 사지가 찢겨 죽는다.”라고 선전하며 항복이 아닌 죽음을 강요한 일본의 사상 교육으로 인해 어머니와 자식이, 부부가, 주민들이 서로, 칼과 낫, 끈 등으로 서로 죽이며 ‘집단 강제사’를 당한 곳이었다. 오키나와 섬 주민들은 자기나라 군국주의의 희생양, 희생자가 되었다.

동굴 방문에 이어서, 저희 일행은, 보도를 통해 널리 알려진 헤노코 기지 건설 반대 운동 현장과 반대운동 본부를 방문하였다. 젊은 목사님이신 타이라 나쯔메 목사님과 교우들을 중심으로 평화운동을 펼쳐왔는데, 12명의 교우들 중 8명이 카누와 보트를 타면서 벌인 해상 투쟁을 통해 수영을 전혀 못하던 이들이, 이젠 잠수, 구조잠수 등의 자격증을 갖고 있을 정도로, 치열한 활동을 벌여 온 과정을 들을 수 있었다.

둘째 날, 저녁은 일본 기독교단에 속한 오키나와 교구 목회자들과 평화단체 관련자들이 함께 모여, 평화 단체의 활동, 오키나와 미군기지로 인한 피해 정도 등에 대한 보고를 듣고, 한. 일 교회가 평화를 위해 협력해 나갈 것을 다짐하는 자리로 마무리하였다.

셋째 날에는, 다시 니시오 이치로 목사님의 인도로, 류큐 국의 상징이자 류큐 왕의 거주지였던 수리성을 들려, 평화 기념 공원을 방문하여, ‘평화의 주춧돌’과 오키나와 섬 내의 전투 당시, 미군, 일본군 사이에서 절벽 아래로 뛰어내릴 수밖에 없었던 오키나와 민중들의 한이 담긴 절벽과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이 ‘평화의 주춧돌’에는 가해자·피해자 그리고 오키나와 섬 주민이었던민중들을 가리지 않고 239,209명의 전사자와 희생자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이 가운데는 한국인 341명, 대만인 28명 등의 이름도 있었는데, 조선인의 이름도 남한(대한민국)과 북한(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으로 나뉘어 있는 것을 본 저희 일행은 공원 운영회에 그 과정을 질의하고, 항의하기도 하였다.

셋째 날 저녁에는, 4곳의 교회로 나뉘어 오키나와 지역교회에서 수요예배를 드리고, 교우들과 사귐을 가지는 시간으로 마무리하였다.

넷째날, 오키나와에서의 마지막 날은 제2차 대전에서 패배한 일본에 속한 오키나와는 패전국의 섬이란 족쇄를 일본에 이어 미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미군 군정청의 신탁을 받게 되었다.
류쿠왕국의 백성에서 일본국의 지배, 그리고 또 다시4년간 미군정의 지배를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섬의 복판에 비행장, 해군기지, 그에 딸린 해병대, 그리고 위성 및 레이다 기지국이 온섬을 뒤덮고있다.
반환된 후텐마 기지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사키마 미술관을 방문하여, 침략 전쟁의 참상을 화폭에 담은 작품을 돌아본 후, 나하 공항을 통해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1. 오키나와섬의 간략한 역사

오키나와 섬은 일본 본토가 아니었다. 따라서 일본이 아닌 류쿠 왕국의 독립된 나라였다. 이곳이 아시아 태평양전쟁 최후이자 최대 규모로 일본군과 미군이 싸운 전장 터였다.

1) 오키나와 섬에서 벌어진 3개월간의 격전
서태평양까지 뻗었던 일본군의 거점을 미국이 차례로 붕괴시켜 일본 패색이 짙어진 1945년 3월 23일, 오키나와 전투는 미군의 포격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4월 1일 미군이 오키나와 섬 중부 해안에 상륙하여 6월 23일 일본군의 조직적 공격이 종결되기 전까지 3개월간 이어졌다.
오키나와 섬은 남북 120킬로미터의 작은 섬이다. 미군은 이 섬은 1,500척의 군함으로 포위하고 전투 부재 18만 명을 포함한 54만 변의 대병력으로 공격했다. 일본군은 현지에서 징집된 보조 병력을 포함하여 11만 명이었다.
작은 섬에서 그것도 압도적으로 열세인 병력임에도 전쟁이 3개월이나 이어진 것은 일본군이 지구전을 취했기 때문이다. 산호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오키나와 섬 중남부에는 수많은 종유 동굴이 있다. 일본군은 그런 동굴과 새로 지하 진진에 숨어 계속 싸웠다.
일본군은 왜 지구전을 택했을 까? 당시 일본 정부와 군은 미군과 일본 본토에서 맞서 싸우는 ‘본토 결전’을 예상했다. 그러나 준비가 다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시간을 벌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미군을 가능한 한 오랫동안 오키나와에 붙잡아 두기 위해 지구전 작전을 펼쳤다. 그러나 이 지구전을 위해 전 주민이 전투에 휘말렸고, 오키나와 현민 1/4이 목숨을 잃었다. 이 작전은 한반도 남단 제주도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일본 정부는 제주도로 미군이 상륙한 것을 예상하여 오키나와와 마찬가지로 이곳에도 방어선을 구축하고 많은 지하요새와 해안에 인간 어뢰정을 보내수 있는 해안 포대를 준비해왔었다. 제주도가 아니라 오키나와에서 미군을 상륙하여 전투를 벌였기 때문에 이 지구전에 전주민이 휩싸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전쟁이 가져다주는 가공할 폐해를 생각해보면 모서리 쳐진다.

2) 군인보다도 오키나와 섬 도민의 사망자 수.
오키나와 현 자료에 따르면 오키나와 전투에서 죽은 사람은 모두 약 20만 명이다. 미군 전사자 1만 2,500명에 비해 일본군은 약 9만 4,000명이며, 주민 사망자 수도 이와 비슷하다. 그러나 군의 명령으로 말라리아 지대에 강제로 이주당해 사망한 사람 등을 포함하면 사망자 수는 몇 만 명이 더 늘어날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민간 사망자 중에는 전투에 휘말려 죽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군의 민간공사(民間共死) 사상에 다라 집단 자결로 내몰려 죽은 경우와 스파이 협의로 살해된 경우, 또는 피신한 참호에서 일본 군대가 쫓아내서 죽은 경우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이런 오키나와 섬의 전투의 쓰라린 경험을 통해 “군대는 주민을 지켜주지 않는 다.”는 교훈이 평화에 대한 강한 염원과 함께 오키나와 사람들의 마음속에 새겨지게 되었다. 오 키나오 섬 도민은 이런 이유에서 일본에서 독립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3) 평화의 주춧돌
오키나와 섬 남단 이토만 시 마부니에는 제2차 세계대전 50돌을 기념하여 건립된 ‘평화의 주춧돌’이 있다. 거기에는 적과 아군, 가해자와 피해자, 민간인 희생자를 가리지 않고 23만 9,209명(2004년 6월 현재)의 전도사 이름이 새겨져 있다.
섬에서 살아가던 일반 주민, 일본군/ 군무원, 미군 외에 한국인 전몰자 341명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북한 82명, 타이완 28명). 이는 한반도에서 무려 1만 명(추정)이나 끌려와서 진지 구축과 탄약 운반 등에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현지 조사에 따르면 오키나와 전투 이전에 이곳에는 100개가 넘는 군 위안소가 설치되었으며, 거기에는 조선에서 강제로 혹응 속아서 끌려온 여성들이 일본군 위안부로 다수 수용되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최근 매년 40만 명이 넘는 일본의 중고생이 오키나와를 수학여행지로 선택하고 있다. 오키나와 전투의 실태와 일본군의 특성 등을 배울 수 있는 지역이라는 이유로 매년 방문자가 증가하고 있다.

2. 평화를 위한 기원 그리고 행동
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우리의 평화기행을 세계 평화를 우리들이 역사적으로 살펴보고 평화를 위한 우리의 과제를 찾고자 하는 뜻을 가지고 이곳을 방문했다.
오키나와에서의 3박 4일은 무척이나 빡빡한 일정이었다. 그러나 그 빡빡한 일정 속에서, 평화운동 일선에서 평화를 일구는 것이야 말로, 예수의 복음대로 사는 것이요, 이것이 우리의 신앙적 과제라고 여기고, 일당 백, 일당 천의 역할을 감당하고 계신 여러 목회자들과 교우들을 비롯해 오키나와 민중들의 열정과 헌신의 삶, 전쟁의 참혹한 흔적이 담겨있는 현장, 그리고 사람들이 버젓이 사는 곳을 밀고 들어와 있는 저 오만함, 절대로, 자기 나라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고, 있을 수도 없는, 주거지 근처의 군사시설을 그것도 ‘평화’ ‘안보’라는 미명 하에, ‘나 아니면 지켜줄 사람 없어!’라고 강요하는 저 뻔뻔함, 실은 이가 다 빠진 사자이면서도, 막바지 발악을 하는 미국의 실체를 조금 더 가까이, 조금 더 깊게 알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오키나와를 비롯한 아시아 각국, 또 우리들이 살고 있는 대한민국 안에도, 평택을 비롯하여 의정부, 김해, 군산, 광주, 영월, 수원, 대구, 원주, 동두천, 양산, 성남, 부산, 인천, 천안, 심지어 제주도까지 도시 안에 공군기지가 있고, 공군 폭격장이 있고, 무기고가 여전히 자리 잡고 있음을 기억하면서,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구체적인 실천 과제들을 풀어나가고, 또 이를 위해 헌신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우리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해본다. [첨언]
개인적으로는, 예수의 행적과 더불어, 현대사에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는 그 정체성을 어떻게 명확히 드러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더 구체적인 고민하는 계기도 되었다.


[13-16. November.2006]
일본 군국주의 식민지 시대 (1910–1945년까지) 조선 여인으로서  일본군 성노예로 전쟁터에 끌려 다닌 위안부 소녀상이다.
한국 극우 단체 사람들이 불법으로 원정 철거 시위를 하였다.
이에 대해  베를린 미테지구(클라이이스 구의회가 강한 유감을 표하였다.
한국 개망신.

                                                                                                               [사진/ 평화 소녀상, 베를린.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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