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낮은 산도 산은 산이어서
봉우리도 있고 바위너설도 있고
골짜기도 있고 갈대밭도 있다.
품 안에는 산짐승도 살게 하고 또
머리칼 속에는 갖가지 새도 기른다.
어깨에 겨드랑이에 산 꽃을 피우는가 하면
등과 엉덩이에는 이끼도 돋게 하고
가슴팍이며 뱃속에는 금과 은같은
소중한 것을 감추기도 한다.
아무리 낮은 산도 알건 다 알아서
비바람 치는 날은 몸을 웅크리기도 하고
햇볕 따스하면 가슴 활짝 펴고
진종일 해바라기를 하기도 한다.
도둑 떼들 모여와 함부로 산을 짓밟으면
분노로 몸을 치 떨 줄도 알고
때아닌 횡액 닥쳐
산 한 모퉁이 무너져 나가면
꺼이꺼이 땅에 엎으러 져 울 줄도 안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근심 어린 눈으로
사람들 사는 꼴 굽어보기도 하고
동네 경사에는 덩달아 신이 나서
덩실덩실 춤을 출 줄도 안다.
아무리 낮은 산도 산은 산이어서
있을 것은 있고, 갖출 것은 갖추었다.
알 것은 알고 볼 것은 다 본다.
시, 신경림 (1933-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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