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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시대, 정치적 분위기

행복나무 Glücksbaum 2000. 3. 5. 19:53

  

 

우리는 예수의 하느님나라 선교활동의 무대였던 현장을 찾아가는 관계로 오늘날의 이스라엘의 정치적 상황이 아니라 예수 당시의 정치적 분위기를 살펴보아야 하겠다. 기원 전 63년에 로마는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이두매 출신의 안티파렐을 실권자로 세웠다. 기원 전 43년에 그가 암살 당하자 그의 아들 헤로데가 로마로부터 '유다와 사마리아의 왕'이라는 칭호를 받고 33년간 팔레스티나를 다스렸다(기원 전 37-4년). 헤로데는 자신의 왕위를 안정시키는 것을 가장 큰 목표로 삼고 요새와 식민지 설치 및 예루살렘 성전 증축 등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세금을 무자비하게 징수했다. 그는 유다 인들에게 그들의 종교와 풍속에 따라 살도록 허용했으나 한편으로는 그리스의 문화도 개방시켰다. 헤로데의 전제적인 통치 태도는 민중들에게 경제적인 부담뿐만 아니라 체제에 대한 반발까지도 불러일으켰음에 틀림이 없다. 그는 그의 통치 초기와 말기에 격렬한 저항을 겪어야만 했던 것이다.

 

헤로데 대왕이 죽은 후, 즉 예수가 탄생한 지 몇 해후에 그의 왕국은 세 아들에게 분할되었다. 헤로데 아르켈리오는 유다와 사마리아를, 헤로데 안티파스(세례자 요한이 죽음과 예수의 수난에 관련하여 신약성서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 막6:17-29, 눅23:5-12참조)는 갈릴레아와 베레아를, 헤로데 필리보는 대부분의 북동부지역을 차지했다. 아르켈리오가 그의 잔혹한 행위 때문에 얼마 안 있어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 폐위 당하자 그때부터 유다와 사마리아 지역은 로마에서 직접 파견한 총독의 지배를 받는 속주가 된다. 기원 후 34년에는 필립보가 죽고 39년에는 안티파스가 파직을 당하여 그들의 영지가 각각 로마의 총독 관할로 귀속된다. 기원 후 41- 44년 사이에 팔레스티나는 헤로데 아그리빠 1세(야고보의 죽음과 베드로의 투옥사건으로 알려진 인물. 행전 12장 참조)의 통치를 받다가 그 후 다시 로마 총독의 지배하에 놓인다. 로마인들은 팔레스티나를 직접통치(기원후 6-41, 44-46년)하게 되자 식민지에 대한 과세를 목적으로 전국적으로 호구조사를 실시하고 자산목록을 작성했다. 이렇게 해서 과중한 과세의 부담에 짓눌리게 되자 유다 인들은 신앙적 이유로 호구조사 령에 반대하고 나서기도 했다.

결국 세금의 부담에 대한 유다 인들의 불만은 주후 6년에 릴레아 출신 유다라는 사람을 중심으로 결성된 혁명당(Zealot:열혈당)이 로마에 대항해 일으킨 폭동으로 표면화되기에 이른다.(행전5:37 참조). 혁명당은 하느님의 뜻이 반드시 실현되어야 하며, 하느님 한 분 이외에는 어떤 통치자도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될 수 없다는 강한 결의로 로마에 항거했다. 로마는 즉시 혁명당의 이 첫 봉기를 진압한 다음, 적어도 2만 명 이상의 유다인을 십자가형에 처했다. 그러나 필사적으로 종교적 열성을 견지하고 있던 그들은 60년여 동안 계속 로마에 항거했다. 그리하여 66년에는 점차 높아진 백성들의 지지를 받아 로마정부를 타도하고 정권을 인수했으나(제1차 독립전쟁, 66-70년), 로마는 4년 후인 70년에 대군을 파병해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도시를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그 마지막 일단은 마사다의 산상에서 항전하며 73년까지 버티다가 패망하였다.(요세푸스, *유대전쟁 7권 참조)
 

예루살렘이 파괴된 이후 팔레스티나는 황제 특사의 지배를 받았다. 132년에는 '시메오나 바르코흐바'라는 인물의 영도 하에 또 한차례의 무력봉기가 유다를 휩쓸었으나(제2차 독립전쟁,132-135년) 로마의 반격은 즉각 나타나 135년 예루살렘은 완전히 전멸되었고 유다인들은 여러 곳에 흩어져 살게 되었다.

기원 후 1세기경의 팔레스티나는 이처럼 유대민족사상 가장 혼란이 심한 시기였으며, 그와 같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초대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은 발 디딜 땅을 찾아야만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