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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분의 삶의 자리를 찾아서’ [이스라엘, 1995.-96.]

행복나무 Glücksbaum 2000. 2. 24. 19:52

 

성서의 땅을 찾아서(1)

 

이번 이스라엘 방문은 이스라엘에 도시가 생긴지 3,000년을 맞이하는 해요, 또한 예수 탄생 2,000년을 기념하는 해여서 "예수, 그분의 삶의 자리를 찾아서" 뜻 깊은 제3차 순례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우리 일행 38명은 1996년 3월 5일(화) - 12일(화)까지 이스라엘의 여러 곳을 방문하기로 했다.
 
원래는 48명이 순례의 길을 떠나기로 되어있었으나 떠나기 일주일 전, 텔.아비브에 자동차 폭탄테러 사건으로 여러 사람이 인명피해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일로 세계는 떠들썩했고, 한독가정의 여성 참여자들이 독일 남편의 만류로 끝내 참석을 포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시대 팔레스티나의 정치적 상황
 
기원 전 63년에 로마는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이두매 출신의 안티파렐을 실권자로 세웠다. 기원 전 43년에 그가 암살당하자 그의 아들 헤로데가 로마로부터 ‘유다와 사마리아의 왕’이라는 칭호를 받고 33년 간 팔레스티나를 다스렸다(기원 전 37-4년). 헤로데는 자신의 왕위를 안정시키는 것을 가장 큰 목표로 삼고 요새와 식민지 설치 및 예루살렘 성전 증축 등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세금을 무자비하게 징수했다. 그는 유다 인들에게 그들의 종교와 풍속에 따라 살도록 허용했으나 한편으로는 그리스의 문화를 개방시켰다. 헤로데의 전제적인 통치태도는 민중들에게 경제적인 부담뿐만 아니라 체제에 대한 반발까지도 불러일으켰음에 틀림이 없다. 그는 그의 통치 초기와 말기에 격렬한 국민들의 저항을 겪어야만 했다.
헤로데 대왕이 죽은 후, 즉 예수가 탄생한 지 몇 해후에 그의 왕국은 세 아들에게 분할되었다. 헤로데 아르켈리오는 유다와 사마리아를, 헤로데 안티파스는(세례자 요한이 죽음과 예수의 수난에 관련하여 신약성서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 막6:17-29, 눅23:5-12참조) 갈릴레아와 베레아를, 그리고 헤로데 필립비는 대부분의 북동부지역을 차지했다.
아르켈리오가 그의 잔혹한 행위 때문에 얼마 안 있어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 폐위 당하자 그때부터 유다와 사마리아 지역은 로마에서 직접 파견한 총독의 지배를 받는 속주가 된다. 기원 후 34년에는 필립비가 죽고 39년에는 안티파스가 파직을 당하여 그들의 영지가 각각 로마의 총독 관할로 귀속된다. 기원 후 41- 44년 사이에 팔레스티나는 헤로데 아그리빠 1세(야고보의 죽음과 베드로의 투옥사건으로 알려진 인물. 행전 12장 참조)의 통치를 받다가 그 후 다시 로마 총독의 지배 하에 놓인다.
로마인들은 팔레스티나를 직접통치(주후 6-41, 44-46년)하게 되자 식민지에 대한 과세를 목적으로 전국적으로 호구조사를 실시하고 자산목록을 작성했다. 이렇게 해서 과중한 과세의 부담에 짓눌리게 되자 유다 인들은 신앙적 이유로 호구조사령에 반대하고 나서기도 했다.
결국 세금의 부담에 대한 유다 인들의 불만은 주후 6년에 갈릴레아 출신 유다라는 사람을 중심으로 결성된 혁명당(Zealot : 열혈당)이 로마에 대항해 일으킨 폭동으로 표면화되기에 이른다.(행전5:37 참조). 혁명당은 하느님의 뜻이 반드시 실현되어야 하며, 하느님 한 분 이외에는 어떤 통치자도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될 수 없다는 강한 결의로 로마에 항거했다. 로마는 즉시 혁명당의 이 첫 봉기를 진압한 다음, 적어도 2만 명 이상의 유다 인을 십자가형에 처했다. 그러나 필사적으로 종교적 열성을 견지하고 있던 그들은 60년여 동안 계속 로마에 항거했다. 그리하여 66년에는 점차 높아진 백성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로마정부를 타도하고 정권을 인수했으나(제1차 독립전쟁, 66-70년), 로마는 4년 후인 70년에 대군을 파병해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도시를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그 마지막 일단은 마사다의 산상에서 항전하며 73년까지 버티다가 패망하였다.(요세푸스, *유대전쟁 7권 참조)
예루살렘이 파괴된 이후 팔레스티나는 황제 특사의 지배를 받았다. 132년에는 ‘시메오나 바코흐바’라는 인물의 영도 하에 또 한차례의 무력봉기가 유다를 휩쓸었으나(제 2차 독립전쟁, 132-135년) 로마의 반격은 즉각 나타나 135년 예루살렘은 완전히 전멸되었고 유다 인들은 여러 곳에 흩어져 살게 되었다.
기원 후 1세기경의 팔레스티나는 이처럼 유다 민족사상 가장 혼란이 심한 시기였으며, 그와 같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초대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은 발 디딜 땅을 찾아야만 했었다.
 
 
 
예수시대 유대교 안의 제 종파
 
 
1) 바리새파
바리새파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일반적으로 짐작되기로는 이들은 일찍이 세속적이고 종교에 무관심한 일반 평민들과 구분하여 “하시딤”(경건한 자)들이라 일컬어지던 세대들의 후예가 아닌가 싶다. 이 부류는 아마도 셀류시드 왕조가 유대인들에게 부과하려 했던 헬라화 과정에 반발하여 일으킨 마카비 전쟁 직전부터 시작하여 이 전쟁이 진전되는 동안에 생겨난 것으로 본다. 그들이 바리새파사람이름으로 처음 등장하게된 것은 요한 히르카누스 통치기간 중이었다.(주전 135- 105년 경) 이 바리새파 란 의미는 일반적으로 ‘분리된 자’ 란 뜻으로 해석되었다.
 
바리새파란 종교의식의 준수에 있어서 여타 동족들보다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으나 아무튼 율법의 정확한 해설자라는 평을 받고 있는 일단의 유대인들을 말한다. 일반 바리새파들의 종교성의 특징은 바로 이러한 모세 율법의 정확한 해석과 이 율법의 철저한 준수였다. 그들의 교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바리새파는 예정론을 주장했으며 이 교리가 인간의 자유의지와도 합치된다 고 생각했다.
 (2) 바리새파는 영혼 불멸과 육체의 부활을 믿었다.
 (3) 바리새파는 천사와 악마의 사상을 고도로 발전시켰다.
(4) 바리새파는 기록된 히브리어 성서와 구전을 종교에 있어서의 최상의 권위로 인정했다.
 
바리새주의는 그러한 종교 개념의 최종적인 결말이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종교는 율법에 순응하는 것을 뜻하게 되었고, 하느님의 은혜는 오로지 율법을 행하는 자들에게만 약속되어 있는 것으로 되었다.
바리새파적인 기풍을 진작시키는 것은 다름 아닌 전통을 조문마다 철두철미하게 지키는 일이었다. 마음의 내적인 성향보다 외적인 형식을 더 중요시하는 것은 대부분의 종교에서 볼 수 있는 경향이다.
우리는 세례 요한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 인들을 가리켜 ‘독사의 자식들’(눅3:7)이라고 한 사실과 또한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의 자기 의와 위선과 그리고 모세의 율법을 아주 세세한 것까지 아주 철저하게 지키면서도 율법의 더 중한 것들에는 무관심한 것에 대해 그들을 질책하셨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마5:20)
 
2) 사두개파
사두개파(Sadducee)란 말은 사독(Zadok)이란 이름에서 온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 이름에서 다윗 재위 시 사독으로 표기되었다. 사독이란 이름을 가진 이름난 유대인들 중에서도 다윗 재위 시 제사장으로 있었고 마카비 시대의 정치적 혼란 때까지 계속 대제사장의 가문을 지켰던 사독 집안이다. 셀류시드 왕조에 의해 부과된 팔레스틴의 헬라화 계획을 추진하는 동안 외세와 접하게 된 자들이 바로 사두개파 계열의 대제사장들이었다. 그들이 정치적 권력이 신장됨에 따라서 종교적 헌신도는 줄어들었다. 그래서 마카베오 상의 저자는 그러한 지도자들을 그들의 조상들의 유산에 대한 변절자요, 배반자로 여겼던 것이다. 예수 당시 사두개파는 수적으로 소수파였지만 정치와 종교에 있어 폭넓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요세푸스의 증언으로 판단해 보건대, 그들은 교육받은 자들이요 대부분 고위직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3) 엣세네 파
주요 유대인 종파 가운데 제 3의 종파인 엣세네 파는 신약성서 안에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들의 숫자는 대략 4,000명 정도였으며, 단순하고 절제하는 생활에 전념했다고 한다. 좀 더 엄격한 엣세네 파 사람들은 결혼도 하지 않았다. 이 단체의 공동생활에 입단하려면 반드시 3년간의 수련기간을 거쳐야 했으며, 일단 이 종파에 입단하면 누구든지 자기 개인재산을 공동재산에 넣어야 하였다. 종교적 훈련으로는 의식적인 씻음, 세례, 정해져 있는 여러 시간 동안의 기도, 일출시 일과 시작, 구약의 계속적인 독서와 연구 등이 있었다. 엣세네 파는 예언자들을 통해 예언된 하느님의 약속들이 자기네 공동체의 역사 속에서 성취되어 가고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내적인 정결의 상징으로 흰옷을 입었다. 그들의 안식일 법 해석은 심지어 바리새파보다 훨씬 더 엄격했다. 사해 서쪽의 황무지는 그들이 좋아하는 정착지였다. 금세기 중반 무렵에 쿰란 부근에서 수도원과 흡사한 공동체의 유적이 발굴되었고, 인근 여러 동굴에서 이들이 감추어 놓은 항아리 안에 봉해진 여러 개의 두루마리가 발견되었다. 이 두루마리 안에는 히브리어와 아람 어와 헬라어로 기록된 수백 개의 외경 단편들이 쓰여져 있었다.
 
4) 헤롯 당
대부분의 학자들에 의하면 헤롯당은 어떤 종파도 정치단체도 아닌 것이 분명한 것 같다. 헤롯 왕가의 통치를 지지하고 따라서 자연히 헤롯 왕조를 지탱케 하는 권위를 지녔던 로마인들의 통치를 지지하던 영향력 있고 고위직에 있던 유대인들을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하다. 복음서에 보면 헤롯당은 한 번은 갈릴리에서(막3:6) 그리고 또 한 번은 예루살렘에서(마22:16,막12:13) 예수의 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5) 젤리옷 당(열심당)
요세푸스에 의하면 유대인의 ‘제 4의 철학’이라고 표현된 제리옷 당은 주후 6년에 로마인들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갈릴리 사람 유다가 창설했다.(행5:37) 이스라엘이 이방의 로마 황제에게 조공을 바치는 것을 반대했다. 그들은 종교적인 신앙내용에 있어서는 바리새인들과 의견을 같이 했으나 그 정신에 있어서는 마카비 전쟁의 지도자였던 맛다디아와 그의 아들들이 보여주었던 열심을 재생시키려 했다. 1세기 중엽에 이집트에서 온 또 한 명의 애국적인 선동자가 호전적인 유대 민족주의자 약 4,000명을 동원한 일이 있었다. 그들은 은폐된 단검으로 무장하고 다녔기 때문에 시카리, 곧 자객들이라고 불려졌다.(행21:38) 제리옷 당원들은 결국 예루살렘의 멸망을 초래하고 말았다. 제리옷 당은 반항의 최후 보루인 마사다 요새에서 3년간을 버티다가 최후를 맞이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세리와 함께 제리옷 당원이 있었다.(눅6:15)
 
6) 일반 평민
팔레스틴 유대인들의 대다수(90% 이상)는 앞에서 거론했던 종파나 단체에 소속되지 않았다. 이 다수 자들은 그 땅의 백성들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이 용어는 다만 통치자들 및 귀족들과 구분되는 의미에서 평민을 뜻했다. 이 말은 신약시대에 와서는 특별히 무지 혹은 무관심으로 인해 모세의 율법과 여기서 파생된 세세한 규례들을 지키지 못하는 자들을 의미하게 되었다. 요한복음 7장 49절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거기에 보면 ‘이 무리’ 라는 지칭은 율법을 모르는 무식한 대중들에 대해 경멸조로 사용되어 있다. 바리새인은 ‘그 땅의 백성들’ 과 함께 식사할 수 없었으며 이 두 계층 간의 통혼은 가증한 것으로 죄라고 여겼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셨으며 이들과 자유로이 상종하였다. 이들을 가리켜 ‘목자 없는 양’(마9:36)이라고 하셨다. 예수께서 이들의 편을 드실 뿐만 아니라 바리새인들의 세세한 규례들을 준수하는 일에 소홀하셨다는 이유로 종교 지도자들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이스라엘 순례 지의 이모저모
 
1. 예루살렘
히브리어로 ‘예루’는 기초 또는 반석, ‘살렘’은 평화(대하20:16, 욥38:6)의 뜻으로 예루살렘은 하느님이 놓으신 평화의 기초라는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현재 인구 50만의 예루살렘은 신시가지와 구 시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데 신시가지는 대부분 20세기에 들어와 유대인에 의해 건설되었고 서 예루살렘이라고도 부른다. 구 시가지는 성벽으로 둘러쳐져 있고 그 안은 회교도 지구, 기독교 지구, 알메니아 인 지구, 유대 인 지구로 크게 4구역으로 나누어져 각각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현재의 예루살렘 성벽은 약 400년 전 인 오스만 터키의 슐레이만에 의해 축성된 것이고 그 토대에는 다른 시대의 돌들이 층을 달리하고 있다. 2천 년 전 예수시대의 돌들도 남아 있다고 한다.
이 성벽에는 8개의 문이 있는데 그중 황금 문은 메시아가 오실 때 연다는 전설과 함께 지금까지 닫혀 있고 남은 7개의 문은 열려 있다. 자동차 출입이 가장 많은 문은 남, 서쪽 문 욥바(Jaffa)문. 이곳부터 지중해의 욥바까지 이르는 큰 길이 있다. 옛날에는 대상들이 다마스커스나 메소포타미아를 향해 출발한 동북쪽 문은 항상 인파가 몰려 있고, 헤롯 문(또는 연꽃의 문)은 다마스커스 문 북쪽에 있는데 예루살렘에서 가장 번화한 Salah Elden길과 황금 문 북쪽인데 사람이 그렇게 많이 지나가지 않는다. 문 위에 네 마리의 사자가 새겨져 있어 사자 문이라고도 하고,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한 곳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에(행 7:59) 성 스테판 문이라고도 한다. 이 문은 겟세마네에서 성안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분뇨의 문은 남쪽 통곡의 벽이 세워져 있는 벽 가까이 있다. 옛날 성안 사람들이 이곳을 나와 기드룐 골짜기에 쓰레기를 버려서 똥 문이라고 했다.
시온 문은 시온 산으로 통하는 조용한 문인데 유대인 거주 지역이 가깝다. 신문(새문)은 동쪽 작은 문인데 1889년에 건축된 노트르담 교회와 기독교인 지구를 연결하기 위해 만들었다.
 
 
2. 통곡의 벽
성전을 받들고 있는 한 축대를 ‘통곡의 벽“이라고 부른다. 로마 군에 의해 파괴되고 남은 부분의 일부가 탄식의 벽이다. 벽의 높이가 약 21m로서 아래서부터 일곱째 단까지가 제 2성전 시대의 것이고 그 위의 4째 단이 로마시대, 그 위가 마므룩 시대의 돌이다. 지하에는 제 2성전 시대의 것이 17단 더 묻혀 있다.(기원전 587년 성전 파괴, 기원전 514년 재건, 기원전 70년 파괴-아빕월 9일) 성전이 파괴되자 유대인은 이곳에 와서 기도하게 되었고 특히 성전 파괴일 아빕 월 9일(7-8월쯤)에는 많은 유대인이 이곳에 모여, 메시아의 강림과 성전재건을 위해 단식기도를 한다. 성벽 돌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은 기도하러 온 사람들의 소원을 기록한 종이이다.
예루살렘은 70년 로마 장군 티투스에 의해 점령되고 유대민족은 이산되기 시작하였다. 132년 시메온 바르 코흐바의 봉기도 실패로 끝난 후 135년 로마황제 하드리아누스(Hadrianus 제위 117-138년)에 의해 이스라엘에서 추방당함으로서 디아스포라(나라 잃고 다른 나라에서 사는 이방인)가 되었다. 이들은 예레미아 애가 서를 읽고 통곡을 한다.(롬 9:- 12:) 자연의 조화는 오묘하게도 밤이 되면 이 돌 벽에 이슬이 맺히게 되고 벽에서 자라는 ‘히소프’라는 풀에 떨어져 장벽이 눈물을 흘리는 듯이 보이게 된다. 이것은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유대인의 모습처럼 여겨지면서 언제부터인가 이 장벽의 이름이 ‘탄식의 벽’, ‘통곡의 벽’으로 불려졌고 기도하는 제단이 되어져 버렸다.
기도는 꼭 동쪽의 성전을 바라보며 기도하고, 남자는 ‘키파’라는 모자를 써야만 기도하러 들어갈 수 있다. 단체는 꼭 9명이 되어야 공중기도를 할 수 있다.(증인도 9명)
 
세 지방교회에서 모인 우리 순례 단원들은 성벽의 돌 틈에 각자 준비한 기도문을 끼워 넣고 뜨겁게 교회와 자신의 가정과 우리의 분단을 극복하고 화해하는 통일된 조국을 꿈에 그리며 쫓기는 일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뜨겁게, 뜨겁게, 간절히… , 그리고 목메어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3. 모리아 산 (창 22:2) - 성전(대하 3:1)
시편 120편부터 140편의 성전으로 올라가는 노래가 있다. 헤롯 대왕 40년경 부속건물을 건축했으며 주후 70년경 로마에 의해 솔로몬의 성전이 파괴되어 지금은 솔로몬 성전은 남아 있지 않고 그 위에 주피터 신전이 세워졌다가 7세기경(715년? 691년?) 칼리프 오마르가 건축한 8각형의 바위 돔 성전이 서 있고, 그 아래 ‘엘. 악사’라는 이슬람 사원이 (14세기경 재건) 서 있다. 이 모스크는 이슬람의 3대 성지중의 하나이다. 성전에 들어갈 때는 신을 벗고 들어가야 하며 모슬렘은 이곳에서 기도하면 500번의 효과가 있다고 한다. 1990년 6월 성전사건으로 22명이 사살되기도 하였다. 이 성전 안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물로 바쳤던 제단 돌(바위)이 있는데 모슬렘은 그 바위 위에서 마호멧이 알라신을 만나고 내려왔다고 믿는다. 이브라함이 살던 브엘세바에서 모리아 산까지는 약 80km로, 도보로는 약 3일간의 거리이다.(주전 17-18세기경으로 본다.) 지하로 가면 모슬렘의 ‘영혼의 샘’이라는 곳이 있는데 마호멧이 이곳을 뚫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구멍이다. 이곳은 다윗 시대의 탈곡장소로도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4. 아인 케렘
 
1) 세례요한의 탄생기념교회
세례 요한이 태어난 마을 ‘Ein Kerem’. 예루살렘에서 약 6km 지점에 위치한 유대산지로 이곳이 세례 요한인 태어난 마을이라고 인정받기는 4세기경으로 이때 기념교회가 세워졌다. 예수의 탄생일 6개월 전에 기념예배를 드린다.
 
2) 마리아 방문 교회(2층으로)
1955년 건축 됨(눅 1:39- 유대 산골 엘리사벳의 집 방문) 천장의 성화 중에는 헤롯이 어린아이들을 죽일 때(마 2:16) 요한도 천사의 도움으로(막힌 바위 앞에서) 살아났다는 전설을 그린 대목도 있다. 경상도의 어느 수녀원에서 기증했다는 한국말로 된 “마리아의 찬가”가 벽면에 부착되어 있다. 한복을 입고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상도 찾아볼 수 있다.
 
3) 야드바셈 (일명 600만 학살 추모관)
독일에서 산업노동자로 한 맺힌 삶을 살아 본 우리 일행은 조국을 잃고 서럽게 살아간 유대인의 고난 찬 삶 앞에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들이 경험한 것이 우리의 경험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곳은 금세기 최대의 비극으로 독일의 나치스에 의해 학살당한 600만 명의 유대인들을 추모하는 위령과 관련 자료를 보관하고 있으며 다시는 이 땅에 이러한 비참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과거의 처참하고 암울했던 어둠의 역사를 회상하기 위한 기념관이다. 여러 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진 기념관에는 연대순으로 유대인 박해 당시의 여러 가지 자료와 각종 유물 품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료실에는 나치스에 의해 학살당하고 희생당한 개인기록과 강제 수용소 이름과 희생된 유대인의 숫자가 기록되어 있는 검은 기념비들이 세워져 있다.
 
기념관 밖의 정원에는 유대인들의 탈출을 도왔던 사람들을 기념하는 기념식수로 쥐엄나무들이 나란히 줄서 있는데 이 나무 숲 아래 특별히 많은 사람들이 둘러서 추모하는 돌무더기가 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서 유태인을 도운 쉰들러의 묘다. 죽음의 문턱을 향해 가는 유대인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던 한 외국인에 대하여 지금도 유대인들은 경의를 표한다.
 
야드바샘은 ‘기념과 이름’이라는 뜻으로 이사야 56:5절에 나오는 기념물과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처절했던 어둠의 역사를 잊지 않고 보존하여 다시는 반복하지 않기 위한 기념물이며, 무고한 희생자들의 이름을 영구 보존하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이름이 붙여졌다.
 
 부조 - “마지막 행진”
 현관을 들어가면 벽에 4부로 된 “마지막 행진”이란 부조의 회화가 있다.( 이스라엘 최대의 조각가 마프탈리 베셈이 기증 )
 
  제1부(대학살) - 인간성의 파괴, 가정의 파괴, 목잘린 물고기 : 가스실의 죽음
  제2부(항 거) - 회당이 불타고,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항거, 야곱의 사다리(소망을 상징)
  제3부(귀 환) - 사자(유대 지파)가 돌아옴
  제4부(갱 신) - 사자와 안식일 촛대, 가정의 회복, 선인장, 우는 사자
 
머리가 잘려나간 물고기는 죽임을 당한 이스라엘을 상징하며, 연기 나는 굴뚝은 학살당한 이스라엘 민족의 사체를 태우는 화장터의 굴뚝에서 4년 동안 계속 품어 나왔다는 생의 파괴당함을 상징하고 있다. 촛불로 자기 가슴을 태우는 여인은 어린 자식을 빼앗기고 가슴 아파하는 어머니의 탄식이다. 하늘로 향한 계단, 날개 달린 배는 그래도 민족적 희망과 종교적 비전을 가지고 살아가는 민족적인 기상이다. 엄청난 비극 속에서도 기적적인 소생을 표현한 초현실주의적인 상징물이다.
계속되는 부조의 쪽 면에 있는 사자는 신생 이스라엘의 독립을 상징하고 있으나 사자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다. 새로운 세계를 향한 도약을 위해 불사조처럼 떨치고 일어나려는 이스라엘의 자유 의지를 이곳에서 가슴 저리게 이해하게 된다.
마지막 야드바셈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결코 잊어서는 안될-- 마지막 우리의 뇌리를 때리는 글이 있다. “망각은 파멸을 가져오지만, 기억은 구원의 비결이다.”
 
4) 어린이 추모의 방
1,944년 Auschwitz에서 죽은 어린이 Uziel의 부모가 독일의 나치의 손에서 죽어간 150만 명의 유태인의 어린이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해 세운 기념관으로 어린이들의 이름을 영어와 히브리어로 계속해서 불러 주고 있다. 컴퓨터로 어린이의 이름과 성장,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어둠 속에 거울의 효과를 통해 무수한 촛불이 영혼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5. 베들레헴 - 예수 탄생 교회
 
베들레헴이란 “떡의 집”이란 뜻을 가지고 있으며 현재 파레스틴 사람들이 거주하는 지역(Beit Lehem)으로 유대인은 없다. 이곳의 상점 안의 장사꾼들은 간단한 한국말로 여행객의 관심을 끈다. 예루살렘 남쪽 약 8Km 해발 790m에 위치해 있으며 고대로부터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연결하는 길 중의 한곳에 있는 마을이었다.
지금도 예루살렘에서 헤브론, 브엘세바로 가는 길에 위치해 있다. 야곱(이스라엘)의 아내 라헬의 무덤(창35:19)이 있으며 보아스의 밀밭(룻2:), 다윗의 출생지(삼상16:1-13), 예수 탄생과 목자들의 들(눅2:)이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339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성. 헬레나가 성지순례를 통해 유대 땅을 둘러보았다. 베들레헴 동굴 위에 세워졌던 아도니스 신전을 헐고 그 자리에 예수탄생교회를 건축했다.
200년 후에 팔레스틴 사람들의 민란이 일어나 이 교회가 파괴되었으며 소요가 진정된 후에 비잔틴제국의 아우구스티누스 황제는 그 자리에 가장 아름다운 교회를 다시 세울 것을 명령했다. 서기 500년대 중엽 십자군에 의해 외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 요새화 되어 재건되었고 그 후로 1400년 동안 훼손되지 않고 보존되었다.
내부모양은 십자가 형태이며 교회로 들어가는 입구는 ‘만 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지에 들어갈 때 “누구든지 머리를 숙여 경배할 수 있도록 작고, 낮게 문을 만들어 놓았다. 경배의 문이라 한다. 안은 목조로 된 삼랑식의 바실리카 형태이고 앞 제단은 희랍정교회의 것이어서 복잡하다. 제단 아래는 곳곳에 굴이 있고 모자이크가 보인다. 제단 아래의 동굴은 예수님이 탄생하신 곳이다. 오른쪽이 입구이고 왼쪽이 출구이다. 출구로 나오면 아르메니아 교회가 관리하는 곳이며 더 나아가다 보면 카톨릭이 관리하는 예배당이다. 페르시아 인이 점령하였을 때에도 이 교회는 파괴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조상인 동방박사가 이곳을 방문하였기 때문이다. 구유의 광장을 지나면 ‘겸손의 문’이 있는데 십자군이 왔을 때 이교도들이 말을 타고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만들어 졌다.
이 교회 안에는 한때 교황 후보였던 히에로니므스를 기념하기 위한 “제롬의 방”이 있다. 그는 교황에 낙선한 후 교황이 된 절친한 친구를 미워할 것 같아서 로마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서와 헬라어로 된 신약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하는데 일생을 바쳤으며 가톨릭이 공인한 불가타 역 라틴어 성서를 완역하였다.
이 히메로니므스는 히브리어의 잘못 번역한 모세의 뿔에 관한 일화로도 유명하며, 성서번역을 하는데 어느 로마 부인의 도움이 받게 되었는데 그 부인이 죽자 그 부인의 유골을 선반에 올려놓고 작업을 계속했다는 전설도 전해지고 있다. 400년경 사망하여 그 시신은 로마로 옮겨졌다. 교회의 뜰에는 그의 석상이 세워져 있다.
 
 
6. 블레셋 지역
 
1) 길르앗 야림 -
2) 엘라 골짜기
  - 산지 이스라엘과 평야의 블레셋의 필연적 갈등(다윗과 골리앗)이 상상이 되는 상수리나무 골짜기이다.
    기 양편에는 50m 정도의 산이 있고 골짜기 넓이는 약 400m정도이다(삼상 17:) 소년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던 곳으로 유명하고, 이 골짜기 상류에는 아둘람이 있다.(수 12: 15)
 
 3) 쉐펠라
    - 다윗과 골리앗이 싸우던 장소인 구릉지대의 명칭이다. ( 이곳에서 순례자들은 다윗이 사용했던 돌멩이를 주우려고 계곡을 달음질쳤
      다.)
 
 4) 엠마오
    - 성경에는 예루살렘에서 5리 정도의 동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외의 특별한 자료는 없다. 엠마오의 정확한 위치는 불확실하나 그
      중에서 가장 가능성이 많은 곳이 라트론(Latrun)으로 마카비 전쟁 시 헬라에게 승전했던 곳이다. 이곳에는 비잔틴 시대의 교회와 십
      자군 시대의 유물이 널려 있을 뿐이고 그 입구 정도에 아무렇게나 쓴 ‘엠마오’(Emmao)라고 써놓은 녹슬은 철 대문만이 그곳을 가리
      키고 있다.
 
 5) 소렉
     - 사사기 삼손의 고향, 왼쪽으로는 벳세메스가 있다. 삼손과 드릴라
 
 6) 갓 -
 
 7) 에스글론 -
 
 8) 텔. 아비브 - 욥바 선지자 요나가 다시스로 탈출을 기도한 곳이다.
 
 9) 헤브론
    - 이곳은 아브라함의 땅이다. 예루살렘에서 3.2km 떨어진 이곳은 해발 900m 고지에 위치해 있다. 산악지대이지만 관개시설이 잘 되어 있고 경사가 층으로 잘 정돈되어 있는 비옥한 땅이다. 그래서 과수를 재배하기에 적합한 지역이다. 이 지역 에스골 골짜기에는 양질의 포도가 생산되고 있는데 이곳이 바로 모세가 사람을 보내 염탐하였던 곳이다. “포도 한 송이를 꺾어서 막대기에 꿰어 둘러메고--”(민 13:23).
아름다운 과수원과 수풀로 둘러싸인 헤브론은 토기사업과 손으로 불어 만드는 헤브론의 유리 공업이 알려져 있고 양가죽 코트로 유명한 곳이다. 이러한 유리와 토기는 옛날과 똑같은 방법으로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다. 헤브론은 팔레스타인인이 있는 도시 중에 가장 오래된 도시 중의 하나이다. 성서에는 기원전 1,700년경에 세워졌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롯이 베들레헴에서 아브라함을 떠난 후 … 아브라함은 천막을 거두어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나무가 있는 곳으로 가서 자리를 잡고 거기에 제단을 쌓고 야훼께 바쳤다.(창13:18). 그의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아브라함은 헷 사람들에게 장지를 사기 위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들한테 몸 붙여 사는 나그네에 지나지 않으나 내 아내를 안장하게 무덤으로 쓸 땅을 좀 나누어주십시오.“(창 23:4). 아브라함은 헷 사람 에브론과 그들 풍습대로 흥정한 끝에 4백 세겔을 주고 막벨라 굴을 샀다.”(창23:8-16). 그래서 이곳 막벨라 굴은 사라와 아브라함, 이삭, 리브가, 레아와 이집트에서 옮겨온 야곱이 묻힌 가족 묘소가 되었다. 다윗 왕이 즉위한 후 7년 6개월 동안 이곳 헤브론을 수도로 정했고 그 후 그가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그곳을 전 이스라엘의 수도로 삼았다.
헤브론은 다윗에게 수난과 슬픔을 안겨주기도 한 곳이다. 다윗 왕의 넷째 아들은 압살롬이었다. 용모가 출중하고 언변이 좋은 왕자였던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 왕에게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다윗 왕은 신발도 신지 못하고 황급히 예루살렘을 떠나 요단강 건너편으로 피신하였다. 압살롬의 반란은 극적으로 진압되었으나, 다윗 왕에게는 잊을 수 없는 비극이었다.
이곳 막벨라 동굴 무덤에는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리브가, 야곱과 레아가 이 막벨라 동굴에 매장되었다.
 
(현재 이 지역들은 아랍지역이다.)
 
 10) 벳세메스
 
 11) 벧 구브린
     - 성서에 등장하는 지역은 아니나 주후 70년경 가장 큰 기독교인들의 마을이 있었으며 로마에 대항하여 항쟁한 유적지이다. 종 모양의 크고 다양한 천연동굴이 많이 있는데 그 당시 2,000여 개의 동굴에 숨어살았던 기독교 신자들은 거의 체포되고 순교하였다고 한다.
 
12) 아쉬돗 - 담수 이동
 
 
7. 엘라 골짜기
 
산지 이스라엘과 평야의 블레셋의 필연적 갈등(다윗과 골리앗)이 상상이 되는 상수리나무 골짜기이다. 골짜기 양편에는 50m 정도의 산이 있고 골짜기 넓이는 약 400m정도이다(삼상 17:).
 
 
 
8. 텔. 브엘세바
 
- 텔(언덕) 브엘(우물) 세바(맹세 또는 7개) - 아브라함의 우물로 가는 길은 시장을 지나가게 된다. 이 시장은 매주 목요일 선다고 한다. 주로 이곳은 이스마엘의 후손(아랍인)과 베두인(4만 5천여 명의 유목민)이 많으며 이스라엘의 남방한계선(단에서 브엘세바까지)에 위치한 곳이다. 러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정착하여 공업지대를 이루고 있으며 네겝 지방의 서울이라 할 수 있다. 베두인들의 정착촌도 이곳에 있으며 그들은 주로 남자는 공장에서 일하고 여자는 양을 치며 생활한다. 출애굽 이후 시므온 지파에게 분배된 땅이고 더 남쪽에는 아말렉이 살았다. 이곳은 족장들의 최초의 정착지이고,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이 그 어머니 하갈과 방황했던 땅이기도 하다.
 
 
 
9. 쿰란
 
기원전 2세기부터 이스라엘은 헬라와 로마의 지배아래 있으면서 네 개의 종파가 발생했다. 즉 에세네, 열심당이라고 하는 제롯(어떤 주장은 제롯당을 포함하지 않는다.), 바리새파, 사두개파이다.
엣세네(Essener)란 순결, 경건의 뜻인데 성경에는 엣세네 파의 기록이 없다. 다만 필로, 요세푸스의 저서에 나온다. 그러나 1947년 베두인 목자에 의해 발견된 사해 문서로 말미암아 연구대상으로 등장했다. 이들은 하나의 교단을 형성하여 쿰란 부근을 본거지로 활약했으며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들은 독자적인 생활을 영위하기 위하여 엄격한 계율 아래서 수도원적인 공동생활을 했다. 그들에겐 4가지 계층이 있는데 , 제사장, 레위 족, 성원, 초심자이다. 이방인과의 분리 성을 고취하고 모세 율법을 준수하고 정치와 타협을 고부하고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면서 기독교 수도원과 유사한 공동사회를 형성하여 엄격한 종교훈련과 생활을 했다. 이 공동체에 입회하기 위해서는 3년 간 2단계의 준비를 거쳐야 했으며 처음엔 지원자로 다음에는 견습과 수행으로 마지막 해에는 서약과 함께 세례를 받고 공동체의 성원이 되었다. 피로의 기록에 의하면 이들은 결혼하지 않는 독신주의자들이고 개인 재산을 인정이 않고 공유했으며 비교적 검소한 생활을 했고 정치적으로 무력을 사용하거나 투쟁하지 않는 평화주의에 투철했고 다른 사람을 비방 내지 중상 모략하거나 피해를 입히지 않도록 늘 조심했고 은둔적인 생활을 했다.
이들의 신학은 이원론적으로 하느님과 악마, 빛의 아들과 어둠의 자식으로 구분했으며 광야의 동굴에서 은둔생활을 하면서 메시아를 기다렸고 새벽에 한시간 기도했고 하루에 정규적인 기도와 목욕을 했다. 양피지에 율법을 기록하는 등 경건한 삶을 살았다. 세례요한도 이 엣세네 파였으리라고 짐작된다. 이들은 또한 예수를 믿지 않았으나 초대교회의 원형으로 흰옷입고 메시아를 기다렸다. 키브츠 운동의 시작 기원이 이 엣세네 파에서 나왔다. 이 공동체는 누군가의 계속적인 지원으로 약 200년 간 지속될 수 있었으며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이 파괴된 때 난리가 닥쳐올 것을 예상하고 난리 후 읽기 위하여 항아리를 만들어 그 속에 두루마리를 넣고 동굴 안에 보관하였으나 이들 모두 마사다에서 전멸한 것으로 안다. 그 후 2,000년 동안 이 곳이 워낙 건조한 날씨 덕분으로 동굴 안에 그대로 보존되어 올 수 있었다.
 
 
10. 엔게디
 
엔게디는 쿰란 남쪽 35km 지점인 동시에, 맛사다 북쪽 16km 지점인 사해의 중간 부분에 해당하는 사해의 서쪽 언덕으로 유대광야 중에서 오아시스에 속한다. 성경엔 엔게디가 처음 나오는 곳은 여호수아 15:62에 나오고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하여 엔게디에 숨었던 곳이며,(삼상 23:29-24:22) 주전 3,000년경부터 사람이 살았던 유적이 있고 이곳 계곡에는 폭포도 있다. 엔게디 폭포 위쪽에는 주전 3000년경이전인 동석기 시대의 신전과 제단이 남아 있으며 약 500m 남쪽에는 비잔틴 시대의 유대교 회당의 유적도 있다. 주후 5세기경에 사용하던 유대인 회당에는 공작들이 포도를 먹는 모자이크 바닥이 아주 곱게 남아 있고 모세의 오경을 모셔 놓았던 제단 부분이 예루살렘을 향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1. 사해
 
사해를 히브리어로 “얌하멜라흐”라고 하는데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해저 392m, 총면적 1,015평방Km의 바다로 염류 농도 33%, 염류 매장 추정량은 염화 마그네슘이 220억t, 염화나트륨 120억t, 염화칼슘 20억 톤, 불화마그네슘 10억 톤이며 여름 하루 동안 사해 물의 2,5cm 정도가 증발한다고 한다. 사해는 북쪽으로 요르단과 남쪽의 이스라엘 지역으로 매년 이동하는 편차가 2,5cm정도라 한다.
 
 
12. 마사다
 
사해 서편 4km에 위치하며 사해 수면 450m 높은 가파른 요새 마사다의 길이는 600m, 폭 300m로 주전 250년 경 ‘알렉산더 야나이’라는 대제사장이 처음으로 요새를 만들었고 주전 40년경 헤롯왕이 요새 겸, 별장으로 쓰기 위해 웅장한 궁전을 북쪽 끝에 만들었고 23m 높이의 38개 감시탑과 5.5m 높이의 성벽으로 철옹성을 만들었다. 1955 - 56경부터 1963년까지 이갈 야딘 교수 팀에 의해 발굴되었는데, 로마 군에 종군했던 요세푸스의 기록을 전설로만 여겨오다가 발굴 결과 물 저장소(몰탈 로 방수한 물 저장소, 약 4만 톤으로 1,000명이 40년을 쓸 수 있는 양을 보관), 창고(과일 말린 것, 올리브 유 등을 보관), 병기창고, 병사들의 막사, 헤롯의 호화 목욕탕(로마에서 배워 온 문화로 지하에는 냉탕이 있고 온탕, 온돌식의 증기탕이 있다.) 그리고 시나고그(회당)등의 자취를 확인할 수 있었다. 요새내의 비잔틴 교회에 있는 모자이크는 자연석으로 색을 넣어 그 색이 변하지 않게 한 것이 특색이다. 순례자는 처음에는 꼬불꼬불한 산길을 따라 등산했으나 지금은 케이블-카로 단숨에 정상에 오른다.
 
이곳은 영화를 통해서 잘 알려진 이야기의 고장이다. 주후 70년 예루살렘이 로마 군에 의해 파괴된 후 열심당과 그의 가족 967명이 이 천혜의 요새에 올라가 싸우다가 전원 자결한 곳이다.(73년) Zeloten 즉 열심당은 주전 6년 로마 총독 구레뇨가 국세 조사를 실시했을 때 이에 반대하여 조직한 국수주의적 유대인 집단(행1:13, 5:37)인데 베드로도 이 집단에 속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예루살렘을 격파한 후 로마의 티토 장군의 휘하에 있던 실바 장군은 5,000여명의 로마 군을 이끌고 와서 마사다를 포위하고 항복할 것을 권유했으나 열심당의 지도자 ‘엘리아살 벤 야에르’는 끝까지 항전할 결의를 보였다. 로마 군은 요새를 공략하기 위하여 서쪽에 흙을 쌓아올려 요새에 올라가 함락시키기로 작전을 세우고 토사를 쌓았으나 마사다 성 위에서의 공격이 만만치 않아 많은 로마군사의 희생을 가져왔다. 결국 이스라엘 포로들을 동원하여 토사를 계속 쌓았다. 요새의 열심당은 노예가 된 동족을 죽일 수는 없었다. 73년 달 밝은 가을, 로마 군이 요새를 쳐들어오기 전날 밤이었다. 엘리야살의 연설을 듣고 난 빛의 전사들은 각자 가족에게로 돌아가 아내와 자식들을 자신의 칼로 죽이고 함께 죽을 장소로 되돌아와 10명씩 그룹이 되어 제비에 뽑힌 사람이 9명씩 죽이고 남은 자 중에서 제비를 뽑아 엘리아살만 남기고 모두 죽게 되었으며 엘리아살은 형제들이 죽은 것을 확인하고 나서 그 형제에게 자기를 죽인 후, 모든 건물에 불을 지른 후 죽으라고 당부했다. 그 형제는 사명을 다하고 자결했다. 다음날 아침 로마 군은 필사의 저항을 각오하고 요새로 진격해 들어왔으나 보이는 것은 널려 있는 시체 뿐, 적을 격멸하여 얻는 승리의 기쁨 대신, 자유 아니면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다는 유대인의 정조와 인격 앞에 숙연해 졌다. 숨어 있던 다섯 아이와 두 여자를 통해서 그들의 최후가 전해진 것이다.
 
 
13. 엔 보켁
 
현재는 온천 관광지 및 유흥가로 발전하고 있다. 신경통, 부인병 등의 약효가 있다는 유황온천은 세계도처에서 많은 관광객이 몰려들며 가까운 곳에 있는 사해에서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우리 일행도 ‘머드’라는 역청 진흙을 몸에 바르고 아이들처럼 좋아했다. 어떤 이는 심한 장난질로 일행 중의 사람들을 사해 물속에 곤두박질시키고 있다.
 
 
14. 소돔
 
마사다에서 조금 남쪽으로 내려가면 사해 끝인 것처럼 흙바닥이 보이는데 사해의 허리가 잘록하게 좁혀지는 곳으로 이 부분을 지난 남쪽의 사해는 무기질의 농도가 높아 소금기둥도 많고 물의 색깔도 옥색으로 매우 아름답다. 남쪽으로 더 내려가면서 온천장들이 있다. 엔 보켁 근방에서는 “역청”이라는 검은 색의 진흙이 나오는데 이것은 배의 방수와 사람의 인체를 치료하는 치료제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 근방에는 현재 많은 호텔들이 건축되고 있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조금 더 내려가다 보면 서쪽 언덕 위에 롯의 아내가 소금 기둥이 되어 서 있는 것을 올려다 볼 수 있다.(창 19:26) 소돔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살던 곳이고(창 13:1-13) 죄의 도시로 유황불의 심판을 받아 멸망한 곳이다.(창19징)
현재의 소돔 지역은 사해의 물에서 칼리와 취소를 얻어내는 공장과 그 부속 건물이 있다. 이 화학 물질들은 엘랏 항구를 통해 외국에 많이 수출되고 있다.
 
 
15. 벳세메스
 
예루살렘에서 소렉 골짜기를 향하여 갈 수도 있고, 텔아비브로 가는 길옆으로 현대 벳세메스가 있다. 라트론 마을 남쪽에 위치한 태양의 집(Bet Shemesh)이다. 엘리 선지자 시대에 불레셋과의 싸움에서 법궤를 빼앗겼는데(삼상 4:11), 그후 일곱 달만에 벳세메스에서 돌려받았다. 블레셋 사람들이 돌려보낸 법궤가 이스글론에서 이곳으로 옮겨와서 20년간 이곳에서 보관되어 있었다.(삼상6: 1-14) 봄철에는 이 주위에 우슬초가 많이 자란다.
 
 
16. 사마리아인과 여인숙(눅 10: 30-) - 여리고
 
예루살렘은 해발 750m, 여리고는 해저 250m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끝없이 내려가기만 한다. 고도가 바다 표면보다도 낮은 지점에 이르면 기압 차이를 귀로 느낀다. 현대식 포장길과 로마 당시의 돌길을 따라서 포장한 좁은 오솔길이 있다. 이 도로 주위엔 붉은 산과 와디(Wadi)라는 마른 계곡 하천만이 보일 뿐이다. ‘와디’라는 것은 광야의 골짜기인데 건기에는 물이 없고 우기에는 물이 흘러가는 개천을 말한다. 이 도상에 와디켈트라는 오아시스가 있는데 이곳에서 그 당시의 상인들이 강도를 만났으리라 짐작된다. 헤롯은 이곳에다 별장을 지었으며 이 오아시스에서 여리고 지역까지 긴 수로를 만들었다. 수로 하류 쪽에는 종려나무가 울창하고 그 옆 수직 절벽에 성 조지 수도원이 있다. 첼통이 330년 최초의 수도원을 이 유대광야(눅 3:4, 10:30)에 설립 후 71개의 수도원이 있었는데 수도원으로 들어갈 수 있지만 되돌아 나오는 문을 만들어 놓지 않은 것이 유명하며 지금도 50개의 수도원이 남아 있다고 한다.
 
 
17. 와디 샘 지역
 
마른 개천, 시내를 “와디”라고 한다. 비가 없는 건기에는 마른 골짜기로 보이지만 비가 오게 되면 금방 급류가 흐르는 개울이 된다.
 
 
18. 켈틱 수도원
 
수도원 제도에 공헌한 켈틱 수도원 운동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켈트족(Celt)족은 본래 아리안(Aryan)족의 일파이며 아일랜드, 웨일즈, 스코틀란트 고지에 주로 살았던 인종을 말한다. 그러므로 600년경 아일랜드, 브리텐언, 중부 유럽, 스페인, 심지어 일부 이탈리아까지도 켈틱 수도원 제도의 영향 아래 있었다. 켈트 종족이 운영한 수도원이라는 뜻이 아니라 위의 지역에서 크게 발달한 수도원제도이다. 켈트 수도원 제도는 앞에서 말한 대로 베네딕트 수도원의 발흥보다 시대적으로 약 100년 앞선 것이며 수도원의 종풍은 이집트의 수사 성 안토니와 성 파코미누스의 수도생활과 규칙, 그리고 희랍과 프랑크족에 수사 성 바질과 성 카시안의 수도생활 규칙을 대체로 추종한 수도제도였다.
대체로 켈틱 수사들은 그리스도의 권면대로 완전하게 되기를 목적하였으므로 엄격성을 강조하였고 고행주의가 더욱 지배적이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완전하게 되고자 하면 먼저 자기의 가진 것을 다 팔아야 한다.”는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려 했다. 육체의 감각적 쾌락을 완전 포기하여 금욕하였고 세속사회의 유혹과 야망, 명예욕과 종교적 순수 정신적 지위 같은 데서 오는 명예욕도 완전 제거를 요구했다.
이집트 수도원의 특색이 그러하듯이 평소에는 공주 생활을 하지만 수도사들의 공동생활 자체를 통하여 그들의 영성훈련을 심화시키려하기 보다 항상 그들은 개인적인 고독과 은둔생활의 경향이 강하고 개인적인 수도생활의 목적을 위한 방편으로서의 공주생활이 되는 셈이다. 명상과 기도, 과묵과 침묵, 겉칠은 육체 노동과 간소한 식사, 로마의 사도적 전승의 교구에 대한 적극적인 옹호와 수도원장 지도에 대한 절대 복종, 규칙에 제정된 엄격한 참회의 고행 등이 그 특징이었다. 수사가 되려는 많은 지원자들이 수도원에 들어왔는데, 그들은 농민과 같은 일반 서민 계급에서만이 아니고 프랑크족 및 버간디 족(Burgundian)의 귀족들과 그 자녀들도 있었다. 파트릭(Patrick)의 노력으로 아일랜드가 켈틱 수도원의 본산지가 되었을 때부터 켈틱 수도원의 수사들은 학문을 존중하여 그들 가운데 많은 학자들을 배출하였다.
 
 
19. 여리고
 
여리고는 주전 8,000년부터 있던 도시이며 해저 350m로 세계에서 가장 낮은 도시이다. 기온은 온화하여 섭씨 10도 이하로 내려가지 않는다. 7만 명의 주민 중에 1만 4천명이 아랍인이다. 여리고는 예로부터 종려나무가 많았고(삿 1:16), 예수께서 소경의 믿음을 보시고 눈을 뜨게 하신 곳이다(눅18:35-43). 삭개오의 동네이고(눅19:1), 예수께서 마귀의 시험을 받은 곳이다(마4장). 엘리야가 승천했고(왕하2:11), 엘리사의 샘(왕하 3:13-20)에서는 분당 20톤의 물이 솟아오르는 샘이다. 여리고는 대단히 더운 곳이다. 물이 풍부하고 땅이 비옥하여 각종의 과일의 산지로도 유명하다. 야자나무 열매를 비롯하여 바나나, 오렌지 등 여러 과일이 생산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래 고대 이집트에서 강제노동을 하던 노예들이었다. 견디기 어려운 고난의 역사 속에서 모세가 출현했고, 모세의 인도로 “출애굽”이란 해방이 이루어 졌다. 그러나 이집트를 떠난 이후 여정은 순탄치 않았다. 40년 동안 시내광야에서 방황해야 했고, 마침내 요단강 동편 모압 평지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모세는 죽고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에 의해 여리고를 함락한다. 요단강 건너 멀리 보이는 산이 느보 산이다. 이 동편에 있는 산이 모세가 죽음을 맞이한 곳이다. 법궤를 메고 요단강을 건너갔던 길갈(수 4:19)도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 하여 여기에 도착한 것은 주전 1520년경으로 추측되며 유적은 13세기의 것만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애굽에서 힉소스 족이 여기에까지 와서 살았고 이집트 군은 여기까지 함락시켰던 것 같다. 1950년 영국의 여성 고고학자 캐더얼린 케년(Kathleen Kenyon)은 이곳을 집중적으로 발굴, 기원전 7,000년대 신석기 시대에 쌓았던 성벽 부분뿐만 아니라 성을 지키는 높이 8m의 망대 부분을 발굴하였다. 예수께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신 산을 시험 산이라고 하는데 여리고 성터에서 유대광야 쪽으로 멀리 보이는 산으로 그 중턱에 희랍 정교회의 카란텔 수도원이 있다. 광야를 보면 하나님의 기적을 바라고 살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이 된다. 여리고로 들어가는 마을에는 입이 무성한 돌 무화과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이 나무를 ‘삭개오의 나무’라 부른다. 삭개오는 키가 유난히 작은 사람이었다.
 
 
20. 벧스안(Beth Shan)의 도시
 
벧스안은 예루살렘으로부터는 120km 지점이고, 여리고에서 북쪽으로 85km 지점에 있다. 요단강 쪽에서는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교통의 요지였다. 옛날에는 요단강 동편에서 이 벧스안을 거쳐 이스르엘 계곡을 따라 므깃도로 나아갔고, 이 므깃도에서 이론계곡을 따라 하데라에 도착하여 지중해 해변도로를 이용하여 에집트로 왕래하였다. 주전 3,000년경부터 주민이 살았으며, 18회 이상 도시가 건설되어 언덕을 이루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점령하기 이전까지는 애굽의 통치를 받는 지역이었다가 출애굽 이후 본토 민과 이스라엘 이주민간에 싸움이 계속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사울 왕이 블레셋과 싸우다가 길보아 산에서 죽자 사울 왕의 시체를 벧스안 성벽에 못박았다는(삼상31장) 이야기도 살펴 볼 수 있다. 희랍의 통치, 애굽의 통치, 로마의 통치를 받아 왔으니 그 당시로서는 지리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주전 63년부터는 옷감 중 아마포의 주산지였다. 주후 200년경에 건축된 로마 원형 극장이 “사울 왕의 거리”에 인접해 있는데 5,000명이 입장할 수 있는 규모이다. 지금도 이 원형극장은 상용할 수 있는 극장으로 벧스안의 로마 식 건축물들이 계속해서 발굴되고 있다. 이 유물들은 예루살렘 록펠러 박물관에 가면 자세히 볼 수 있다. 원형극장으로부터 건너다보이는 언덕 위에는 고대의 가나안의 집터들을 발견할 수 있다.
 
 
21. 아인 하롯 샘
 
기드온의 정병 이야기
 
 
22. 나사렛 동네
 
나자렛은 이스라엘 남부 갈릴리 지방의 한마을로서, 갈릴리 호수 남서쪽으로 24km, 지중해로부터 약 32km 떨어진 에스드렐론 평야 북쪽의 해발300m 위의 분지로 삼면이 산으로 둘러 쌓여있다. 그곳의 기후와 강우량은 온화하고 식물을 재배하기에 적합하나 마을 수원이 하나밖에 없는 것이 큰 난점이다. 인구는 약 4만 명으로 60%가 기독교인이다. 나머지는 아랍인들로 시민권이 있으며, 원하면 군대도 갈 수 있다. 이곳은 성모 마리아가 수태고지(눅1:26)를 받았고 예수께서 거의 30년 간 사셨던 곳(눅2:39-52)이며,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나사렛을 떠나기도 하셨다(막1:9). 그리고 나서 예수님께서 왜 나자렛을 떠나 가버나움에서 사셨는지 대해서는 아무런 이유도 언급되지 않았다.
유적으로는 마리아가 수태고지를 받았던 동굴 위에는 1955년에 시작하여 1969년에 완성된 중, 근동에서 가장 현대적인 마리아 수태고지 교회가 서 있다. 물론 그 이전, 비잔틴 시대, 십자군 시대, 18세기에도 교회가 세워졌었으니 수차의 전쟁을 통해서 파괴되고 또 다시 건축하고를 수차례 계속했다. 2층 정면에는 이태리에서 기증된 성 모자의 그림이 있고 교회 정면에는 예수를 비롯하여 사자, 황소, 독수리가 세워져 있으며 현대교회 건축학적으로 중요한 건물이다. 그 옆에 예수님 일가가 사셨던 동굴 위에 세워진 성 요셉 교회가 있다. 지하로 내려가면 마리아가 물을 길로 왔었다는 전설이 있는 ‘마리아의 우물’이 있다. 수원은 앞 비스듬히 50m에 있는 성 가브리엘 교회의 지하에서 시작된다.
나자렛은 콘스탄티누스 황제 통치(A.D 324-337)전까지는 성소로서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심지어 이슬람교도의 정복(700년경)으로 많은 박해를 받았으나 십자군 시대까지 관심 지역이 아니었다. 십자군 운동 기간 중 다시 해방되어 그 중요성을 되찾게 되었다. 오늘날 나자렛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기독교 도시의 하나가 되었다.
 
1)예수 탄생 알림 교회
 
2)마리아의 우물
 
3)요셉 교회
 
 
24. 가나
 
5,000명의 아랍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3세기경 아람어로 된 비문이 나왔기 때문에 프랜시스칸 수도회에서 6세기 경 이를 기념하여 가나 교회를 세웠다. 교회 안은 어두운데 지하에 당시 포도주를 담았던 돌 항아리가 있다. 문 앞에서는 가나의 포도주를 시음하는 시음장과 포도주를 판매한다.
우리 일행은 이곳에서 결혼 2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 내외를 위해 축하의 잔치를 가졌다.(1976년 4월 19일 결혼) 사실은 4월 19일은 한달 정도 남아 있었는데 조금 앞당겨 즐거운 시간을 가져보고자 한 것이다. 값싼 은반지지만 우리 내외는 서로 나누어 끼며 지금까지 살아온 것 하느님께 감사하며 다시 한 번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25. 갈릴리 호수
 
이스라엘은 대부분이 황토색의 황무지거나 나무가 자라지 않는 광야이다. 이스라엘에서 수정같이 맑고 푸른 물이 출렁거리는 갈릴리 호수는 신비롭기만 하다. 호수 주변에는 비도 적당히 내려 농사도 잘된다. 갈릴리 주변 마을인 가버나움, 벳세다, 거라사 등은 예수께서 자주 들리신 곳이다. 호수에서는 물고기도 잡을 수 있어 호수 주위로 여러 마을들이 있다. 지금도 베드로 고기라는 민물고기의 일종인 바스(Bass)를 잡아 호숫가의 식당에서 ‘베드로 고기 정식’으로 판매한다. 싱싱한 고기를 기름에 튀겨 큰 접시에 담아 내어놓는다.
 
갈릴리는 발로 찾아다니며 읽는 제 5복음서라는 말이 실감나게 예수님의 흔적이 많은 곳이다. 이 아름다운 곳을 배경으로 하여 멀리는 헬몬 산의 눈을 바라보며 예수님은 3년간 제자들을 훈련시켰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말씀을 선포하면서 공적인 활동을 시작한 곳도 이곳이다.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을 부르신 곳도 이곳이다. 이 호수의 이름은 갈릴리, 게네사렛, 디베랴 등으로 불린다. 갈릴리 호수는 남북의 길이가 21km, 동서의 폭이 14km, 헬몬 산에서 발원한 물이 요단강을 통해 이 호수로 흘러 들어오고 갈릴리 호수의 물은 다시 사해로 흘러 들어간다.
 
 1) 갈릴리 호수 유람
갈릴리 호수 주위는 아름답게 보였다. 풍요로운 농원과 멀리 키브츠가 보인다. 우리 일행은 유람선에선 선상예배를 드렸다.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는 고백의 시간도 가졌다.
 
 
26. 티베리아
 
갈릴리 호수의 해변은 해저 208m로 이 아름다운 호숫가에 헤롯왕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는 주후 20년경 티베리아를 휴양도시로 개발하였다. 아름다운 궁전과 극장, 천연 온천수, 부근에는 공공 온천장도 건설하였다. 지금도 티베리아는 세계 유수한 아름다운 휴양지 중의 하나이며 로마의 감시가 심하던 그 당시엔 랍비들의 제자 훈련 장소이기도 하였으며 주전 400년의 미쉬나 문서(바벨론 탈무드)와 더불어 주후 6세기경 예루살렘 탈무드가 만들어진 역사적인 장소이다. 예루살렘을 대신하여 지식인, 학자등, 영적 지도자들의 중심지가 되었던 곳이다. 약 3만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으며 시내에는 골란고원의 화산들이 폭발할 때 날아온 돌들로 만들어진 십자군 시대의 성벽들이 보인다.
우리 일행은 이곳을 지나며 순례의 혼란을 경험했다. 그것은 순례의 길에 세속적인 관광 상품구매에 눈길을 빼앗긴 일과 순례하는 발걸음과 자세가 무너진 것에 대한 반성을 하게 했다. 성지를 순례하고자 했던 목적을 상실하면 가난에 찌든 이스라엘의 돌무더기만 보고 오게 된다는 교훈을 함께 되새겼다.
 
 
27. 요단강 세례소
 
요단강은 단에서 흐르는 강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요단강은 북쪽의 갈릴리 호수를 지나 깊은 계곡과 벼랑사이를 흐르다가 남쪽의 사해까지 이르는 아주 특이한 강이다. 강물은 헬몬 산 근처 북쪽에서 발원하여 해발 70m쯤 되는 홀로 호수에 모이게 되고 여기서 다시 강물은 해수면 보다 210m 더 낮은 남쪽 갈릴리호수에 이르며, 다시 해수면 보다 380m 더 낮은 사해로 흘러 들어간다. 요단강의 남단에서 북단까지의 직선거리는 120km밖에 되지 않지만, 굽이치며 흐르는 길이는 320km에 이른다. 이러한 요단강은 팔레스틴에서 가장 긴 강으로, 성서 역사상 가장 괄목할 만한 무대였다.
지금은 순례 객들이 이곳에서 세례를 받기도 한다. 상류에 댐을 건설하여 수위(물의 량)을 조절하고 있어 실개천처럼 보여 대단히 유감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곳 어디에선가 세례를 받으셨다는 설렘으로 순례 객들은 조그마한 병에다 요단강의 물을 정성스럽게 담고 있었다. 실제로 고고학자들은 여리고 동편의 요단 강변에서 세례를 받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세례요한이 활동했고 시험 산에서 가깝기 때문이다.
 
 
28. 야데닛
 
 
29. 팔복 산(베아티튜데 산)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전하시고 병자들을 고치시고 가난한 자를 일으키신다는 소문을 듣고 허다한 무리가 모여 오자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치신 것이 산상수훈이다(마 5:- 7:-) 그 중에서 8가지 복을 가르치신 것을 기념하여 팔각형으로 된 아름다운 팔복 교회가 1930년 이곳에 세워졌다. 8각에 8복을 스테인드글라스로 표현하였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 여기는 갈릴리 호수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이 좋은 곳이다.
우리 일행은 새벽 문이 열리기를 오래 오래 기다리고서야 이곳을 방문하게 되었다. 팔복 교회 안에 정원에서 간절히 기도회를 마친 우리는 예배당 안에 들어가 얼마나 오랫동안 간절히 기도했던지 다음 행선지로 발을 옮기자는 말을 전할 수 없었다.
 
 
30. 가버나움
 
갈릴리 호수 북쪽 끝에 있는 마을로 “나훔의 동네(위로의 마을)”라는 뜻이 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에 계시면서(마9:1) 회당에서 가르치셨고(막1:21), 가버나움 회당에서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 주셨다(막1:21-28,눅4:321-37). 베드로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는 것을 고쳐주셨고(마8:14-15,막1:29-31눅4:38-39), 중풍병자를 고치셨고(막 2:2-5),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으며(막5:35-43), 문둥병 환자를 깨끗이 하셨고(마8:2), 로마의 백부장 하인을 고치셨다(마8:5-13). 제자인 마태를 부르셨던 곳이기도 하다(막2:14). 가버나움은 구약시대에는 등장하지 않았고 예수시대, 조금 전부터 예루살렘이나 악고에서 다메섹으로 가는 통로로 교통의 요지로 새롭게 번영하게 된 곳이다. 베드로도 벳세다에서 가버나움으로 이사 왔다. 400년경 건축된 유대인 회당이 있고 구조는 2층으로 1층은 남자 , 2층은 여자가 사용했다. 그 밑에 무너진 회당 터가 발견되었는데 예수 당시의 것으로 추정된다. 가버나움 회당은 갈릴리 지방에서 가장 큰 회당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앞에 베드로의 집이 있다. 1920년대에 발굴된 8각 형태의 교회 유적지가 있다. 이곳은 예수님의 제 2의 고향으로 헤롯 안티파스와 빌립의 경계지대에 있었기 때문에 여러모로 활동하기가 수월했을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유적만 남고 주민은 하나도 없다.
 
 1) 가버나움 회당
 
 2) 베드로의 집터
 
 3) 베드로 교회
 
 
31. 타브가
 
타브가는 헬라어로 “일곱 개의 샘”이란 뜻에서 유래했다. 물이 많은 곳이고 ‘오병이어’의 기적 장소이다. 4세기경 세워진 비잔틴 시대의 교회가 있었는데 아랍인의 손에 파괴된 후 1,000년 동안 땅속에 묻혀 있다가 1930년에 교회 흔적을 발견하게 되면서 그곳에서 빵이 든 바구니와 물고기 두 마리가 그려진 모자이크를 찾게 되었다. 모자이크란 여러 가지 색깔의 자연석들을 사방 1cm정도 크기로 쪼갠 뒤 짜 맞추어 만든 예술 작품이다.
1936년 독일 베네딕트 교단에서 발견 장소에서 200m 떨어져 있는 “Mensa Christ"(주님의 식탁)이라는 거대한 바위 위에 베드로 수위 권 교회를 건축하였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과 아침식사를 하시고 베드로에게 “나의 양을 먹이라(요21:9)”고 하신 곳이다. 이 갈릴리 호수에서 잡히는 민물고기를 베드로 고기(바스)라 하기도 한다.
 
1) 오병이어 교회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을 베푸신 곳을 기념하는 곳이다. 현재 있는 교회는 1982년에 새로 건축된 것이다. 교회 내 제단 앞에는 비잔틴 시대의 것이다.
 
2) 베드로 수위 권 교회
이 교회는 타브가에 있고 오병이어 교회 동남쪽에 있으며, 검은 색의 현무암으로 지어진 자그마한 교회로 갈릴리 바닷가에 붙어 있다. 이 교회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곳이다. 제자들과 같이 떡과 생선으로 아침 식사를 하신 곳이다.(요 21: 1-23)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요 21:15)”
 
이 교회의 제단 앞에 있는 큰 바위를 “예수의 식탁”이라 하여 부활 후 제자들과 같이 식사하신 것을 기념하고 있다.
 
 
32. 거라사 광인 기념교회
 
거라사는 갈릴리 바다의 동쪽 해변의 중심이 되는 엔게브 기브츠(Ein-Gev)에서 동북쪽으로 5km에 있다. 예수께서 군대라는 귀신들린 사람의 몸에서 귀신을 내어쫓아 돼지 떼에 들어가게 하셨고 돼지 떼가 물속으로 뛰어들어 군대귀신이 몰사했다는 이적을 이곳에서 행하셨다.
 
 
33. 엔게브
 
등어리 샘이라는 뜻
 
 
34. 골란고원
 
갈릴리 호수의 동편 지역, 해발 1,000m 이상의 높은 고원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호수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 고원이 오늘날 이스라엘과 시리아 사이의 분쟁의 초점이 되었던 곳이다. 헬몬 산기슭에서 남북이 약 70km, 동서가 약 20km, 넓이는 약 1,150 평방 km나 된다. 구약시대에는 이곳을 바산이라고 불렀다. 고지대이지만 땅이 비옥해서 예로부터 ‘소가 살찌는 곳‘이라 알려져 오던 곳이다.
골란고원은 1948년 이전까지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던 잊혀진 땅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독립하면서 상황이 매우 달라졌다. 숙적인 이스라엘과 시리아가 접전하는 국경지역이 되었기 때문이다. 골란고원이 시리아 측에 유리한 군사적 요지로 떠오른 것은 이스라엘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천혜의 전망대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스라엘의 젖줄인 수원이 시리아 지역을 통과하여 이스라엘로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시리아는 갈릴리의 수원을 차단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갈릴리 호수는 북쪽의 헬몬 산기슭에서 흘러오는 물줄기를 받아야만 하는데 시리아 측은 이 물줄기가 갈릴리 호수로 들어가는 것을 막는 수로 변경 작업을 진행하여 호수를 말려 이스라엘을 고사시키려 했다. 이스라엘은 이 사건으로 시리아가 골란고원을 장악하고 있는 이상 이스라엘의 생존이 그들의 손아귀에 볼모로 잡혀 있을 수밖에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1967년 6월, 유명한 6일 전쟁을 주도했다. 이스라엘이 아랍 국가들과 싸워서 6일 만에 압승을 하여 골란고원을 차지하게 되었다.
지금도 시리아의 파괴된 진지와 부서진 탱크가 널려 있고, 찌그러진 지프 등이 기념물로 남아 있다. 이 지프는 이스라엘의 한 소위가 시리아의 지뢰밭을 통과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끈 지프라고 한다.
 
 
35. 가이사랴 빌립보
 
골란고원을 넘어가며 기독교 성지 순례자들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장소가 가이샤라 빌립보이다. 이곳에서 베드로는 그 유명한 신앙고백을 주님 앞에 하였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이 때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유명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다. 예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36. 바니아스 샘
 
이곳은 텔. 단으로부터 4km 거리가 되는 헬몬 산의 눈 녹은 물이 지하로 스몄다가 가이사랴 빌립보(지금은 바니아스라고 부름)에서 솟아 나온다. 헬몬 산 밑 바위틈에서 매초 50 톤씩 쏟아져 나와 시내를 이루어 북 요단강으로 흘러간다. 여리고의 20배(마16:13)에 달한다. 고대 희랍의 신중에 “목자들의 신”인 판이란 신의 신전 터가 보인다. 헤롯 빌립이 20년경 또 다른 신전을 짓고 수도로 삼았다.
 
 
37. 텔. 단 이야기
 
이곳은 헬몬 산에서 흘러드는 눈 녹은 물이 폭포를 이루기도 하고 커다란 시내를 이루는 샘들의 원천이다. 이 샘들을 찾아가노라면 깊은 열대림 사이를 지나가는 황홀한 기분을 가지게 된다. 한국의 설악산 계곡이나 들어온 것처럼 모든 순례자들이 기분에 들떠 개울가에서 수영을 하기도 한다. 잠시 순례의 피곤을 이곳에서 물놀이로 말끔히 씻어 내는 곳이다.
 
 
38. 단 성소
 
남북왕국으로 이스라엘이 분열하였을 때 여로보암이 북 왕국지역의 단 지역에 가장 큰 성소를 세웠다. 여기서 하나님을 금송아지로 표현하였고 북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금송아지를 예배했다. 하나님의 형상을 만든 죄로 북 이스라엘은 멸망당한다. 현재 그 제단이 발굴되었다.
 
 
39. 하졸 요새
 
하졸은 갈릴리 바다 정북 쪽으로 약 20km 지점에 있는데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넓은 언덕이다. 하졸은 주위의 평지보다 40m 높은 언덕으로 언덕의 남쪽부분을 윗 성이라 하고, 북쪽의 약간 낮은 언덕을 ‘아랫 성’이라 부른다. 주전 3,000년경부터 도시가 건설되어 21회에 걸쳐 도시가 새롭게 지어지기도 하고, 헐리고도 하였다. 하졸이 번창했던 시기는 주전 18-13세기의 가나안시대였다. 주전 13세기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을 정복할 때 이곳을 점령하고 불살랐다.(수 11:13). 사사시대에는 드보라 선지자와 바락이 가나안 군대를 이스르엘 계곡에서 격파하였다.(삿4장) 하졸의 윗 성에 남아있는 성문터는 솔로몬 시대의 건축으로 밝혀졌다.(왕상9:15) 오므리 시대의 저장소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시대의 것으로 지하 40m에 요새 밖의 샘 줄기로부터 물을 길어 올릴 수 있는 동굴수로가 있다. 이 원리는 오므리 왕이 므깃도에 만들어놓은 물길과 같다. 하졸의 동쪽에 있는 기브츠(Kibbuty Ayelet Hashahar)에는 “하졸 박물관”이 있다.
 
 
40. 다볼 산
 
신약에서 예수께서 변화하셨다는 산이라 하여 변화 산이라고도 한다.(마17:1-8). 높다는 의미가 들어 있으며(삿 4:6, 해발 588m) 변화산상의 후보지이다. 주위의 이즈르엘 계곡보다는 약 450m 높이로 우뚝 솟아 아름다운 산이다.
들판을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기에 옛날부터 요새지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 드보라가 하졸 왕의 군대를 격파했던 무대이다. 가나안의 병거가 계곡의 진흙에 빠져 움직이지 못할 때 이스라엘 군사가 다볼 산에서 내려와 가나안 군대를 진멸한 것이다. 호세아(5:1),예레미아(46:18).등에 나타난다.
기독교인들이 다볼 산을 변화 산으로 믿기 시작한 것은 주후 348년경부터이다. 다볼산 정상에 도착하면 바람 문이라는 돌문에 도착하게 된다. 이 돌문은 주후 13세기에 아랍 왕(Melek el- Adel)이 이곳에 있었던 십자군 시대의 교회를 헐고 요새를 지을 때 만든 정문이었던 것으로 1897년에 다시 손질했다. 이 돌문을 지나서 안으로 들어가면 옛 비잔틴시대 교회 터와 십자군시대 교회 터 위에 현재 두 교회가 세워져 있다. 천주교회의 입구에 들어서면 그곳에 모세와 엘리야를 위한 기도소가 있다. 교회의 제단이 이중으로 되어 있는데 위쪽의 것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세와 엘리야가 그 옆에 서 있고,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놀란 모습으로 쳐다보고 있다. 아래쪽 제단에는 정면에 두 마리의 공작이 마주보고 양옆에는 흰옷 입은 천사들이 있다.
다볼 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산 중간까지 버스로 오르지만 경사가 가파르기 때문에 택시를 대절에 오르게 된다. 20회 이상의 급커브가 있어 택시와 같은 작은 차만이 올라간다. 다볼 산은 정상에 있는 교회 건물도 아름다우나 그보다도 산 위에서 내려다보는 경치가 그만이다. 북쪽으로는 나사렛 동네를 두르고 있는 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고, 남쪽으로는 모레 산과 길보아 산이 보이고 그 산과의 사이에 이스르엘 계곡이 펼쳐져 있으며, 서쪽으로는 갈멜산 밑으로 흐르는 기손 강과 그 주위의 평야가 풍요함을 나타낸다.
 
 
41. 므깃도 (묵시록 16:16)
 
이집트에서 바벨론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며 이즈르엘 평야 남쪽 끝 좁은 계곡 입구에 있는 전략 요충지로서 가나안인, 블레셋인, 이스라엘인, 그리스인, 로마인, 페르시아인, 영국인들의 전장 터였다. 아람어의 뜻 표기가 “아마겟돈”이다. 인류의 마지막 전쟁이 이곳에서 일어나게 된다고 하는 곳이기도 하다.
주전 15세기 요시아 왕이 전사한 곳(왕하 23: 29-30), 영국의 알렌비 장군이 오스만 터키 군을 물리친 곳(1917년), 나폴레옹이 주둔(1799년)했던 곳, 독립전쟁 시 키부츠가 가까운 이스라엘 군이 장악하여 승리한 곳(1948년),등 24번이나 파괴되었다가 재건된 흔적이 있으며 약 450필의 말과 150여대의 병거를 수용할 수 있는 솔로몬과 아합 왕의 마병장이 이곳에 있었다. 나선형의 계단의 곡식 창고, 철기를 사용한 식수 터널들이 발굴되었다.
 
 
42. 갈멜산(왕상 18:20) - 엘리야의 제단
 
엘리야는 구약에서 중요한 인물이었다. 어떤 점에서 그는 사울의 초기 이야기들에 나오는 심취적인 선지자들의 계열에 들어갈 수 있다. 그는 확실히 사울이 만났던 어떤 선지자 그룹과 관련이 있었다(왕상18:4,13) 그의 동작은 때때로 예상 밖이었고 인간의 이해의 영역을 초월하였다(왕상18:12). 그러나 이런 것이 그이 특징은 아니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메시지를 가진 자였다. 그는 자기가 알고 섬기는 하느님은 과거에 살면서 역사를 일으킨 자가 아니었다. 그의 하느님은 지금 현재 자기 백성들과 있으면서 그들의 민족 생활의 중대사들을 자기 나름대로 이해하고 계신 분이었다. 이 점에서 엘리야는 아모스, 이사야, 예레미아 등과 같이 구약에 그들의 메시지가 보존되어 있는 대선지자들이 선구자였다.
바알숭배와 이스라엘 조상의 신앙 사이에 있었던 대결의 정확한 성격은 엘리야의 생애에서 나온 세 가지 이야기에서 확연히 알 수 있다.
 
* 엘리야는 동쪽 사막의 최 변방에 있는 길르앗 출신이었다.(왕상17:1-7) 그는 근검한 생활을 하였고 옷이 거칠었다. 그의 생활 스타일은 광야에서 모세를 따랐던 지파들의 모습을 방불케 하였다. 그의 기적은 대부분 농토의 풍산과 관련되어 비를 오게 하고 안 오게도 할 수 있었다.(왕상17:8-24) 이런 일은 물론 가나안의 바알 신의 특기라고 사람들은 믿고 있었다. 그래서 엘리야는 비를 통제하는 자는 그의 하나님인 야훼라는 것을 증명해 주기로 결단하였다. 그는 갈멜 산에서 450명의 바알 선지자와 400명의 아세라 선지자들에게 도전하였다. 갈멜 산은 페니키아의 영토 근처에 있는 높은 산맥이었다. 원래는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이스라엘의 땅이었었다. 그 때 세워진 야훼의 제단은 지금 바알을 숭배하는 제단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엘리야는 단 한번으로 철저하게 백성들의 신앙의 우선순위에 단판을 내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그는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에게 하늘에서 복을 내리게 하라고 재촉하였다. 아마 그는 폭풍우가 내리기 전에 대개 선행되는 번개 불을 말하였을 것이다. 각가지 요란한 종교적 엑스타시를 치르고도 그들은 성공치 못하고 지쳐버렸다. 그러나 이들이 실패한 것을 엘리야는 성공시켰다. 괴이한 무아경의 의식이 아니라 하느님께 아뢰는 간단한 기도로 성사시켰다. 그 결과 장기간의 한발은 비 바다로 끝나게 되었다.(왕상18:1-46) 기후를 통제하는 자는 바알이 아니라 야훼 하느님이었다.
 
* 이 사건에도 불구하고 이세벨은 계속 세력을 휘어잡고 있으면서 엘리야를 잡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엘리야는(오해였지만)자기 혼자만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신실히 대변한다고 생각하였다. 생명의 위협을 받고 그는 남쪽 유다로 곧장 피신했다가 다시 브엘세바에서 시내 산으로 향하였다. 이곳은 모세가 탈출한 노예들을 데리고온 장소였다. 이곳에서 언약을 맺었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계속 영감을 새롭게 받을 수 있는 땅이기에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적 터전이었다. 엘리야는 여기서 깊은 신앙체험 중에 하느님이 비록 자연을 지배하는 능력이 있지만 그의 최고 활동은 날마다의 생애에서 나타나야 된다는 것을 상기하게 되었다. 하느님은 과거에 이집트에서 노예를 구출했지만 아직도 자기 백성들의 삶 속에서 활동하고 계셨다. 엘리야는 수리아와 이스라엘에 다같이 정치적 소요를 자극하라는 사명을 받고 되돌아갔다. 이것은 오므리 가문과 그 동맹국의 전복을 초래할 것이었다(왕상19:1-18).
 
언약 신앙으로 투신한 엘리야는 단순한 보수주의자가 아닌 정치적 행동가로 일변하였다. 그는 직접 사회 참여를 통하여 시내 산의 하느님이 아직도 유일한 참 왕이라는 것을 백성들에게 상기시켜 주었다.
 
* 나봇의 포도원의 이야기는 사회참여의 뜻을 밝혀 준다(왕상21:1-29) 아합은 자기 궁전 마당을 넓히고 싶었지만 나봇의 땅을 차지할 수 없음을 알았다. 이스라엘의 땅은 개인이 아닌 하느님의 땅이다. 개인이 소유하고 있더라도 그것은 하느님 맡겨놓으신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 사상은 아합이 알고 있었듯이 가나안의 사회관습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아합의 부친 오므리도 실은 사마리아 당은 어떤 가나안인에게서 살 수 있었다. 그렇지만 아합은 그냥 남의 소유지를 왕이라고 마음대로 차지 할 수 있다는 입장을 수학하기에는 이스라엘의 전통에 너무 젖은 자였다. 그래서 그는 시로 침통해 있었다. 한편 그의 아내 이세벨은 견해가 달랐다. 그녀는 백성의 생명과 재산은 왕의 것이라고 간주하였다. 그래서 나봇을 간단히 처치해 버리고 그의 재산을 몰수하여 남편에게 주었다. 이 왕비의 행위를 과감히 단죄한 자는 엘리야였다. 나단이 같은 원칙에서 다윗 왕을 정죄한 것과 같았다(삼하12:1-15). 엘리야에게는 종교적인 신앙은 일상생활과 정치에 다 같이 관련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왕비라도 시내 산에서 맺은 언약의 법을 넘어 설 수 없었다. 공동체에서는 남녀가 모두 동등하다 이것은 경제와 사회적 정의가 의식이나 예배 못지않게 하느님과 그의 대표자들이 가진 관심의 대상이라는 뜻이었다. 이 주제는 구약의 대선지자들이 모두 거론했었다. 그러나 처음을 이 사상을 드러낸 자는 엘리야의 증언을 통해서 이다. 그는 이세벨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고 오므리의 전 가문이 패망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하느님이 마침내 자기 백성들의 정의와 자유를 회복시키기 위해 간여하실 것이라고 천명하였다.
 
현재는 “무흐하라” 라 불리며 희생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갈멜 산은 길이 약 50km가 되는 높이 540m의 산맥을 잇고 있는 지형의 한 곳이다. 샤론의 이즈르엘 평야 사이에 솟아 있는데 숲이 울창하고, 산 아래에는 기손 강이 흐른다. (사 35: 2), 여호수아가 요단강 서쪽에서 멸한 갈멜 왕 욕느암이 포함되어 있고(수12:12),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 850명과 대결하여 승리했고(왕상 18:20-40), 아합의 아들 아하시아 왕이 엘리야를 잡으려고 50부장과 50인을 3번 보낸 곳이고(왕하1:9-16), 엘리야가 승천한 후 엘리사가 잠시 머문 곳(왕하2:25, 왕하4:25-37)이다. 1881년에 프란시스칸들이 교회를 건축하고 아랍 기독교인들을 위한 아랍어로 성경말씀을 기록해 놓은 곳이기도 하다.
 
 
43. 가이사랴(행 10: 1- 22: 31-39)
 
이곳에는 주전 3세기 페니키아인 이 건설한 항구가 있었는데, 헤롯이 그리스의 아테네에 필적하는 항구 도시를 이곳에 건설하겠다고 ‘현대의 계획도시 타입’의 대규모 건설공사를 시작했던 곳이다. 그리고 로마황제 카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가이사랴” 라 명명했다. 본디오 빌라도가 이곳에 있었다는 기록이(주후26-36년)있으며 5대 총독 빌라도의 이름이 새겨진 돌 판이 이곳에서 발견되어 이스라엘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해변을 따라 아치 교각의 수로가 남아 있다. 헤롯은 이 도시의 용수를 9km 떨어진 갈멜 산에서 이곳까지 끌어왔다. 헤롯은 원형극장도 건설했는데 이들 로마시대의 유물들은 헤롯이 얼마나 로마나 그리스의 문화를 신봉했었나를 짐작하게 한다. 3400석의 원형극장에서는 당시 매 5년마다 192회 종합 경기가 개최되었다고 한다. 극장은 말끔하게 수리되어 지금도 음악회가 개최된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이용하는 자연 음향 전달 시스템은 무대의 소리를 관람석에 앉아 있는 청중들에게 잘 들려지도록 한다.
로마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사자와 싸웠고 로마에 대항하는 많은 유대인들이 이곳에서 학살되었다고도 한다. 폐허로 남아 있는 로마시대의 마차경기장은 Hippod Roma라 불리었으며 영화 ‘벤허’에 나오는 전차 경기연습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곳에는 십자군 시대의 요새가 있으며 문과 벽, 교회의 자취가 남아 있다. 말라버린 해자의 모습도 확연하게 볼 수 있다. 빌립이 이곳에서 전도를 했고(행8:40), 로마 백부장 고넬료가 살았던 곳이고(행10:1), 바울이 2년 간 억류생활을 했던 곳이다(행23:31-27:1).
 
 
44. 욥바 (Jaffa)
 
고고학적으로는 주전 5,000년경부터 항구라고 하며, 솔로몬이 레바논 백향나무 목재들을 실어 오던 그 시대의 유일한 항구이며, 요나가 출발하던 항구(욘1:2-39)이다. 스테반 순교 후 사도들이 흩어질 때 베드로가 이곳에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였다. 베드로가 욥바의 피장이 시몬의 집에 있었음을 기념하는(행10:5-6) 베드로 기념교회가 해변에 있다. 옛 명성을 잃은 조그마한 항구 욥바에서 바라보는 지중해 해변을 낀 현재의 텔.아비브의 경관은 참으로 아름답다. 특별히 저녁노을을 받는 텔.아비브는 지중해의 전형적인 해변도시의 아름다움을 가득히 선사한다.
 
 
안디바드리
 
악고
 
 
45. 감람산 예수 승천교회
 
"가난한 자의 집"이라는 베다니는 예루살렘 동쪽 3km정도에 위치하며 감람산 넘어 동남쪽의 작은 마을이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일하시고 성 밖의 베다니로 돌아가셨다가 오시곤 하였다. 고난을 당하시기 전에도 잠시 거하셨던 곳으로 지금은 아랍인 주거지역으로 안전을 보장할 수 없어 순례자들의 출입이 뜸해진 곳이다.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감람산을 넘어야 한다. 그 길에 벳바게 "무화과의 집"이 있다. 감람산은 영어로 "Mount of Olives"인데 스코프스 산에서 남쪽으로 계속되는 산이 해발 825m의 감람산이다. 다윗 왕이, 아들 압살롬의 난을 피해 이 산을 맨발로 넘어야 했다(삼하 15:30). 솔로몬 왕이 예루살렘 동편 산(감람산)에 모압의 우상 '그모스'의 신당과 암몬의 우상 '몰록'의 신당을 지은 곳(왕상11:1-8)이기도 하다.
 
 
46. 예수 승천 교회
 
이 교회는 390명의 익명의 여인들에 의해서 세워졌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곳은 베다니 근처 감람산이라고 한다. 그 후 이슬람교도가 이 교회를 파괴해 버렸고, 12세기경 십자군이 거대한 승천교회와 수도원을 건축하였다. 8각의 교회 건물에는 지붕이 없이 확 트인 하늘을 볼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이로부터 80년 후에 아랍 세계의 강자가 되었던 살라딘에 의해 다시 파괴되었고, (1187년경)인 돔을 씌우고 모슬렘 사원(모스크)으로 쓰게 되었다. 현재 관리는 모슬렘이 하고 있다. 부활절로부터 40일이 되는 승천절 날, 하루만 기독교인들의 예배가 허락된다.
 
 
47. 엘리오나(주기도문 교회, Pater Noster 교회)
 
성 ‘헬레나’ 가 건축하였으나(콘스탄티누스의 3대 건축- 예수탄생교회, 성묘교회, 제자를 가르치신 감람산 동굴교회) 600년대에 파괴되었다가 12세기 십자군에 의해 재건되었고 또 다시 파괴되자 1870년 프랑스 왕족과 결혼했던 한 여인의 집념 어린 노력으로 다시 재건되어, 현재 갈멜 수녀원에서 관장하며 80개 국어로 주기도문이 기록되어 있다. 이 동굴에는 예수님이 급하실 때 머무르시던 곳이며(마24장 - 소묵시록), 하드리안 황제 때의 순교자의무덤이 있기도 하다.
 
 
48. 예수님 눈물교회(묵 19:42-44, Dominus Flevit교회 )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면 하느님의 뜻을 떠나 살아가는 유대인들의 잘못을 생각하며 우셨던 자리이다. 40년 후 예루살렘 성은 로마 군에 의하여 완전히 파괴되었다. 4세기경에 이곳에 기념교회를 세웠지만 파괴되었고 1955년 현재의 교회가 눈물방울 형태로 세워졌다. 솔로몬 성전이 정면으로 바라다 보이는 곳이다.
우리 일행은 이곳에서 통독이후 독일에서 겪고 있는 30여 년의 역사를 가진 한인교회들의 어려움을 생각하며 함께 눈물의 기도와 찬송을 드렸다.
 
 
49. 겟세마네 교회
 
겟세마네는 '기름을 짠다.' 란 어원을 가지고 있으며(막14, 묵 22:44, 마26:3)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까지 순종하는 그의 생애의 최대의 간곡한 기도의 장소이다. 가시 면류관 모양의 철책내의 험한 바위가 바로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던 곳이었는데 이곳에다 300년경 교회를 건축했으나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파괴되었고 다시 십자군에 의해 재건되었다. 현재의 교회는 1924년 영국의 통치 기간 중 가톨릭교회에 소속한 프란체스카 수도회가 여러 나라에서 헌금을 모아지어지게 됐다. 그래서 ‘만국교회’라고도 부르며 예루살렘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에 속한다. 정원을 지나면 제자들이 잠들었던(마26:36) 겟세마네 동굴(Gotta)이 있다.
 
 
50. 가야바의 뜰
 
예수께서 가리옷 유다에 의해 겟세마네 동산에서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으로 끌려가셨다.(마26:57) 가야바의 집은 헤롯 궁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갈람 산에서 골짜기를 지나 이곳 가야바의 뜰로 나아가 길목에 돌계단이 발견되었다. 예수께서 밟으셨던 그 돌계단이리라. 우리도 신발을 벗고 이 돌계단을 걸어 올라가 보았다.
 
 
51. 베드로의 통곡교회( 베드로의 갈리칸투)
 
이 교회에는 지하에 예수께서 갇히셨던 것으로 전해 내려오는 굴과 예수님이 천장에 매달리셔서 고문을 받으셨던 것으로 알려진 고문장소가 있다. 이 교회의 제단 밑에 깔린 돌 조각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막았던 조각들이라고 전해 내려온다.
 
 
52. 성 안나교회 - 베데스다 연못(요 5:1-9)
 
사자 문(스테판 문 또는 마리아 문이라고도 한다.)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가면 성모 마리아 모친을 기념하는 성 안나 교회가 있다. 뜰 안에 있는 동굴은 마리아의 부모님, 부친 요아힘과 모친 안나의 집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마리아가 탄생했다고 전해진다. 십자군 시대에 교회가 건축되었으며 특히 예배당의 제단 앞에서 노래를 하면 공명이 잘되는 곳이기도 하다,
 
 
53. 독일교회
 
베네딕트 수도원 관리 하에 있는 이 교회는 들어갈 수 없도록 굳게 문을 잠그고 있다.
 
 
54. 십자가의 길( 비아 돌로로사 )
 
비아 돌로로사란 “통곡과 비애의 길”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예수께서 채찍을 맞으시고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십자가를 지신 곳에 세운 교회들이다. 교회 길 건너에 안토니오의 요새가 있는데 이 요새에 빌라도가 유월 절기에 가이사랴에서 잠시 와 있었다. 이 요새는 헤롯이 제 2성전 북쪽 모서리에 요새를 만들고 그의 친구 ‘말크 안토니오’의 이름을 붙였다. 십자가의 길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는 지금보다 낮았다. 비아 돌로로사에는 14곳의 기념 장소가 있다.
예루살렘의 구시가지 아랍인 지구에 있는 이 “비아 돌로로사”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까지 걸으셨던 길이다. 당시 예수께서 걸으신 그 길을 분명하게 그려 낼 수는 없겠지만 그 행로를 명확히 하고 싶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심에 의해 16세기에 생겨났다.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전 세계에서 성지 이스라엘을 찾아올 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기는 곳이 바로 이 ‘슬픔의 길 / 눈물의 길/ 고난의길’이다. 현재 ‘비아 돌로로사’는 이곳을 찾아오는 순례자들에게 오랜 신앙의 전승을 따라서 주님과 관련된 14곳을 보여준다.
 
 1) 로마 총독 관저로서 예수께서 빌라도에게 사형선고를 받으신 곳으로 현재 아랍인 학교가 있다.
 2) 십자가를 지신 곳. - 현재 채찍질 교회 자리
 3) 십자가를 지고 처음 쓰러지신 곳. ( 폴란드 교회가 있다. )
 4) 성모 마리아를 만난 곳. ( 아르메니아 교회가 있다. )
 5) 구레네 시몬에게 십자가를 지운 곳. ( 프란체스카 수도원 소속 )
 6) 베로니카가 예수님께 손수건을 준 곳으로 이 손수건에 예수님의 얼굴이 새 겨졌다고 한다.
 7) 두 번째로 넘어지신 곳 - 좁고 경사가 급해 진다.
 8) 예루살렘 여인을 향해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고 말씀하신 곳. (희랍 정교회 수도원 )
 9) 세 번째 넘어지신 곳. - 28개의 돌계단이 있는 곳으로 콥틱교회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다.
 
 
 10번 - 14번까지는 성묘 교회당 안에 있다.
 
 10) 예수님의 옷을 벗긴 곳.
 11) 십자가에 못 박은 곳.
 12) 십자가가 서 있던 곳.
 13) 예수께서 운명하신 후 내려놓은 곳.
 14) 예수님이 묻히셨던 곳.
 
이곳에서 순례자들이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연극을 하는 것 같아서 처음에는 미묘한 감정을 가진다.
성전이 있던 자리의 북서부 헤롯왕의 주거였던 요새는 오늘날 바닥 위에 흔적만 남겨 놓고 있다. 여기서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 나와 유죄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십자가형을 받으러 이곳에서 골고다 언덕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제1처
채찍질 교회 : 여기서 빌라도는 예수를 심문한 것으로 되어 있다. 현재는 매번 금요일에 프란시스코회의 수사들이 이곳에서부터 십자가 행진을 시작한다. 교회 내부에는 3장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는데 ‘채찍 맞는 그리스도’, ‘손을 씻는 빌라도 총독’ - 이 정직한 사람의 피에 자신은 책임이 없다고 비굴한 모습으로 손을 씻고 있다. 또 하나는 ‘바라바를 용서하라’ 는 모습을 모여 주는 그림이다. 제단 위의 돔에는 커다란 가시관이 장식되어 있다.
 
  제2처
:“에케 호모”(이 사람을 보라)의 아치 : 고난의 길 제 2처에 있다. 16세기 이후에 이 땅을 방문하는 신자들이 이 아치를 ‘에케 호모’ 즉 이 사람을 보라 고 빌라도가 군중들에게 외쳤던 말을 상기시키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A.D 135년에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세운 예루살렘 정복을 기념하는 개선문의 일부이다. 이 부분은 중앙 아치이고, 현재에는 없어져 버린 좌측의 작은 아치는 회교사원의 중앙에 있다. 또 우측 소형 아치는 현재에도 시온 시스타 교회 내에 남아있다.
 
시온 시스타 교회 : 이 교회에는 로마시대의 오래된 돌바닥이 남아 있고, 안에는 주사위 놀이의 흔적도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여기에서 로마 병사들이 예수의 옷을 걸고, 주사위 놀이를 했다고 생각했고, 또 바닥 위에서 주사위가 실제로 발견되었다.
 
  제3 처
: 예수께서 최초로 좌절하여 넘어졌던 곳으로 생각되고, 폴란드 카톨릭 기사단이 작은 예배당을 세웠었다. 현재 이 예배당은 아르메니아 교회 대사교에 소속되어 있다.
 
  제4 처
: 이 작은 예배당 문 위에는 모친과 만나는 예수님의 얇은 부조가 폴란드 조각가에 의해 새겨져있다.
 
  제5 처
: 문 위에는 여기에서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의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까지 옮겨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요한 이외의 복음서가 이 시몬의 이름을 전하고 있다.
 
  제6 처
: 이 아르메니아교회는 예수와 베로니카가 우연히 만난 장소에 세워져 있다. 성녀가 천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닦았을 때 천에 예수의 얼굴 흔적이 남았다고 한다. 이 천은 로마 산 피에트로 사원에 707년 이후 보존되어 있다. 소 교회 안에는 성녀의 묘가 있다.
 
  제7 처
: 여기서부터 고관의 길은 소란스런 시장골목인 바자 거리와 교차한다. 예수의 두 번째로 쓰러졌던 곳에는 돌기둥이 서있다.
 
  제8 처
: 수도원 벽에 새겨진 작은 십자가는 예수와 신자인 여자들이 서로 만난 곳을 기념하고 있다.
“ 예루살렘의 딸들이여, 나 때문에 울지 말라. 오히려 너희들 자신과 자신들의 자식을 위해 울라.”
 
  제9 처
: 에디오피아 수도원 내부에 있다. 입구의 로마시대 원기둥과 예수가 3번째로 쓰러졌던 곳을 나타내고 있다.
 
  제10- 14개 처
: “비오 돌로로사” 14개중 나머지 5개의 기념 처소는 골고다 언덕이 있는 성묘교회 안에 있다. 현재는 골고다 언덕이 기념교회 안에 있기 때문에 높은 언덕은 찾을 길이 없다.
 
 
55. 골고다 (마27;33)
 
십자가를 짊어지고 죽음을 맞이한 해골의 산은 어디에
 
 
56. 성 분묘교회
 
예루살렘에서 가장 신성한 이 성묘 교회는 이곳을 찾는 순례자들의 마음에 깊은 감명을 주는 곳이다.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던 골고다 언덕(마27:33-)이나 예수님의 무덤(아리마대의 무덤, 마27:59, 요 19: 421-)나 모두 이 교회 건물 안에 있다.
 
132년 유대인의 반란을 진압한 하드리안 황제는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을 완전히 추방하고 135년 이 자리에다 비너스 신전을 건축하였다. 즉 쥬피타, 유노, 베누스의 3신을 제사지내는 성 요새 아엘리아 카피트리나를 건축하여 유대인을 제압하려고 하였다. 다행히 카피트리나를 건설할 때, 황제는 분묘가 있는 암장을 파괴하지는 않은 웅덩이에 토사를 투입해서 매장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이 대문에 카피트리나의 토대인 토층은 분묘가 파괴될 위험으로부터 구하게 되었다. A.D 325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와 사교 마칼리우스가 카피트리나의 아래에서 그리스도의 묘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역사는 아이로니칼하여 하두리아누스가 이곳에 신전을 세워 놓았기 때문에 쉽게 골고다의 예수님의 무덤을 찾는데 도움을 주게 된 것이다. 이곳에서 또 다른 두 범죄자의 십자가도 발견되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313년 기독교가 공인되고 326년부터 335년에 걸쳐 교회를 지었다. 공사를 하는 동안 언덕 바위의 흔적은 사라지고 2개소만 바위의 흔적을 남겨놓았는데 하나는 십자가가 세워졌던 곳이고, 또 다른 하나는 원형의 거대한 건물 아래 잇는 예수 그리스도의 묘이다. 그 동쪽에는 십자가를 재발견했다는 곳을 기념하여 지하 예배 처소가 있는 바실리카가 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도움으로 성 헬레나가 이곳에다 교회를 지었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허물어져 갔고, 614년 페르시아에 점령되어 파괴되어 버렸다. 바실리카는 15 년 후에 신부 모디스트에 의해 재건되어 1009년에 칼리프, 엘 하겐에 의해 지면이 고르게 될 때까지 그 모습을 다시 재건되었으나 아랍인들에 의해 또 다시 파괴되는 수난을 겪었다.
 
1149년 십자군 운동으로 이 교회는 새롭게 지금의 형태로 지어지게 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그때의 형태가 기본이지만 1808년 화재로 인해 파괴되고 다시 복구는 되었으나 그 대부분이 손상되어 버렸다. 방화에 의한 화재를 다하여 망가진 성묘 교회는 나폴레옹이 유럽을 전화로 몰고 가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 재건에 유럽의 로마 가톨릭교회들이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오랫동안 로마 가톨릭 교회와 견원지간이었던 그리스 정교회는 교회 수복의 권리를 독점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가톨릭교회를 연상케 하는 모든 부분을 파괴해 버린 그리스 정교회의 이 수복은 소위 ‘새로운 파괴’라는 악명을 얻게 되었다.
 
오늘날 성묘는 6개의 종파에 의해 분리 관리되고 있다. 로마 가톨릭 교회, 그리스 정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외에는 이집트 콥틱 교회와 시리아 정교회, 그리고 에디오피아 교회는 교회의 지붕 위에 수도원이 있다.
 
 
 (1) 그리스도의 수의
 
토리노의 수의는 1978년 일반에게 공개되면서 세인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세마포로 만들어진 길이 4.2m에 폭 1.1m로서 중간을 기점으로 대칭 되는 한 중년남자의 알몸 자국이 앞면과 뒷면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긴 머리에 턱수염을 길렀고 키가 180cm로 밝혀진 이 사람의 손목에는 못 자국이 있으며 머리, 등, 옆구리 등엣 도 핏자국이 발견됐다.
하지만 1973년 이후 15년간의 과학자들의 치밀한 연구와 논쟁을 거친 후 마치매 1988년 로마 교황청은 문제의 수의가 서기 14세기의 것이라는 최종 판정을 내렸다. 이러한 판정의 결정적인 증거는 옥스퍼드, 버클리, 에리조나 대학과 취리히의 한 물리학 연구소 등 모두 네 군데의 실험실에 의뢰한 탄소 동위원소연대측정의 결과였다.
모든 생명체는 살아있는 동안 몸속에 탄소를 만들어 비축하지만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절대량에 관계없이 어떤 개체에서 원래의 탄소량에 비해 절반으로 줄어드는 시기는 5730년으로 모두 일정하다. 따라서 아마포로 만들어진 그리스도의 수의에 남아있는 탄소의 양을 측정하면 이 천의 재료가 또는 아마의 수확 시기를 알 수 있다.
50년 정도의 오차를 감안하더라도 수의가 서기 14세기의 것이라는 판정에는 의의를 제기할 수 없는 실정이어서 교황청도 이를 받아들여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도의 수의에 관한 기록은 서기 4세기 가이사랴의 교회사가였던 유세비우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기 30년쯤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였던 다대오는 그리스도의 얼굴 형상이 그려진 천을 에데사 왕 아브가르에게 선물로 가져갔다는 것이다. 나병에 걸린 이 왕은 다대오가 가져온 천에 손을 대는 순간 병이 나았다. 그 후 많은 순례자들이 기적과 치유의 천을 보고 만지기를 위해 에데사로 몰려들었다. 서기 944년 비잔틴 제국의 로마누스 1세는 ‘만딜리온’(작은 손수건) 이라 불리는 이 천을 탈취하기 위해 에데사를 포위했고 결국 이 천은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졌다. 서기 1204년 4차 십자군 원정의 성전 기사단은 만딜리온을 탈취하여 프랑스로 가져왔다고 한다.
 
1357년 프랑스의 릴에서 대중에게 공개 되면서 ‘예수의 수의’ 라는 별명이 붙기 시작했다. 1456년 이 수의는 사보이의 왕에게 증정됐고 샹베리 성에 보관돼 있었다. 1532년 이 성채에 화재가 발생해서 수의의 일부가 불에 탄 직후 수의는 이탈리아의 토리노로 옮겨져서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왔다.
 
성물을 그리스어로 ‘아케이로포이에토스’ 라 부르는데 그리스도의 나무 십자가, 최후의 만찬에 사용된 주님의 거룩한 잔, 옆구리를 찔렀던 로마 병사의 창, 예수의 손자국이 남아있는 채찍기둥, 겟세마네에서 예수가 흘린 피땀을 닦아낸 손수건 등이 성물의 범주에 속한다.
 
 (2) 베로니카 여인의 손수건
 
서기 4세기에 기록된 신약성서의 위경 중 베드로 행전에 나오는 ‘베로니카의 수건’이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데 한 여인이 수건을 건넸고 땀을 닦은 후 돌려받았다는데 그 수건에 주님의 얼굴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 전승 때문에 서기 11세기 십자군 시대에 판정된 빌라도 법정에서부터 골고다에 이르는 14 장소의 ‘수난의 길- 비오돌로로사’ 중에서 제 6장소가 오늘날까지 베로니카 사건의 연장으로 알져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비잔틴 시대 베로니카의 수건이라고 알려진 성물이 30개가 넘는다는 사실이다.
중세 유럽에서 성물은 의도적으로 만들어지고 널리 알려졌다. 각 지방에서 몰려든 순례자들로 붐볐고 이는 곧 관광 비즈니스와 연계되어 수많은 관광 순례 객들을 불러드렸다.
 
 
57. 스코트란드 성. 안드레 교회( 5:00 성만찬과 예배 )
 
이 교회는 1927년 스코틀랜드의 로버트 부루스 왕을 기념하기 위해서 세워졌다.
 
 
다짐과 성도의 교제
우리는 모든 성지순례의 여정을 마치면서 이곳에서 그분의 삶과 정신을 돌아보며, 그분의 몸을 내 몸에 받고 그분의 보혈을 내 몸에 흐르게 했다.
 
 
58. 시온 산
 
현재의 시온 산은 예루살렘 성 남서쪽 성문인 시온 문의 밖을 시온 산이라고 한다. 이것은 주후 4세기에 지형학적인 오인으로 이곳이 현재까지 시온 산으로 불려지고 있다. 그러나 다윗 시대의 시온 산은 옛 다윗 성이고, 주전 2세기경에는 모리아 산을 시온 산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59. 마가의 다락방
 
시온 산에 위치하며 최후의 만찬 장소, 성령이 임한 곳, 이 다락방 아래층에는 다윗의 무덤이 있다. 앞에는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기념교회가 있다.
 
“제자들이 감람원이라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들어가 저희가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로스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더라.”(행1:12-14)
 
“---마가라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행12:12)
 
120여명이 모일만한 장소
 
 
60. 가든 톰
 
영국의 고오든 장군 이 골고다의 해골의 산을 발견하여 개신교에서는 이곳이 예수의 빈 무덤이 있다고 보는 곳이다.
 
 
61. 제 2의 성전 시대의 예루살렘의 모형도
 
예수시대의 예루살렘을 고증하여 축소해 놓은 곳으로 제 1성전은 솔로몬 시대에, 제 2성전은 스룹바벨이, 제 3성전은 헤롯 성전으로 지금은 모두 없어졌다. 이모형은 제 2성전 시대의 예루살렘 모형으로 주후 70년 경 로마 군에 의해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까지의 모습을 50분의 1로 축소하여 재현한 것으로 짓는데 20년이 소요되었으며 아직도 계속 수정 중에 있다.
이 모형은 현대적 빌딩 19층을 지을 수 있는 건축비가 들어갔다고 한다. 건물 좌우가 대칭인 헬라양식으로 건축된 헤롯 궁, 귀족들이 살았던 고지대와 서민들이 살았던 저지대, 그 당시의 예루살렘 모습이 실감나게 표현되어 있다. 성전 계단은 뛰지 못하게 아기 위하여 하나는 넓고, 하나는 좁게 구성한 것이 특징이다. 황금 문이 입구에 있으며( 이 문 앞에 기혼 샘이 있다.) 성전 미문이 있고, 여인의 뜰, 그 안에는 남자만 들어서는 마당, 그 앞의 제단이 그 뒤에 문이 있고 휘장이 있다. 성전의 넓이는 4만평 정도가 된다. 참고로 다윗 성의 넓이는 1만 3천 5백 평이었다.
 
 
62. 나사로의 무덤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빠 나사로의 무덤은 밧베게
 
 
63. 사무엘의 무덤
 
기브온 가까이 에 사무엘 선지자의 묘지가 있다. 그곳에 교회가 있고 교회 옥상에서는 기브온 산과 예루살렘과 벧엘 쪽을 바라 볼 수 있다. 사무엘은 ‘하나님이 들으셨다’(삼상1:20). 라는 이름인데 에브라임 산지 라마에 거주한 엘가나의 처, 한나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여 낳은 아들(삼상1;1 10:20)이다. 그가 어린 시절 엘리의 성전에서 밤에 잠을 잘 때 하나님께서 세 번이나 불러 그와 함께 하시겠다고 하신(삼상 3장) 여호와께서 보내신 선지자이다. 이스라엘이 사사시대에서 왕정으로 옮겨가는 과도기에 있었던 마지막 사사이며 또한 선지자였다. 그리고 제사장의 일도 하였다.
 
현재 이곳에 있는 마을은 구약시대에는 없었고 여호수아가 가나안 군과 싸웠던 골짜기, 벧엘 평원이 눈 아래 전개된다. 이곳은 전형적인 유대 땅이다. 하느님께로부터 내리는 은총의 비를 듬뿍이 흡수하는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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