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구석구석 살펴보기/기행 이야기

예수시대, 사회적 분위기

행복나무 Glücksbaum 2000. 3. 5. 19:54

 

 

 
 

예수시대에 있어서 팔레스틴 내의 유대인 사회를 아래의 몇몇 집단들로 나누어 생각해 보기로 하자.

1) 바리사이 파
바리사이새파의 기원에 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일반적으로 짐작되기로는 이들은 일찍이 세속적이고 종교에 무관심한 일반 평민들과 구분하여 "하시딤"(경건한 자)들이라 불려지던 세대들의 후예가 아닌가 싶다. 이 부류는 아마도 셀류시드 왕조가 유대인들에게 부과하려 했던 헬라화 과정에 반발하여 일으킨 마카비 전쟁 직전부터 시작하여 이 전쟁이 진전되는 동안에 생겨난 것으로 본다. 그들이 바리사이파사람 이름으로 처음 등장하게된 것은 요한 히르카누스 통치 기간 중이었다.(주전 135- 105년 경) 이 바리사이파 란 의미는 일반적으로 '분리된 자' 란 뜻으로 해석되었다.

바리사이파란 종교의식의 준수에 있어서 여타 동족들보다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으나 아무튼 율법의 정확한 해설자라는 평을 받고 있는 일단의 유대인들을 말한다. 일반 바리사이파들의 종교성의 특징은 바로 이러한 모세 율법의 정확한 해석과 이 율법의 철저한 준수였다. 그들의 교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바사이파는 예정론을 주장했으며 이 교리가 인간의 자유 의지와도 합치된다고 생각했다.
  (2) 바리사이파는 영혼 불멸과 육체의 부활을 믿었다.
  (3) 바리사이파는 천사와 악마의 사상을 고도로 발전시켰다.
  (4) 바리사이파는 기록된 히브리어 성서와 구전을 종교에 있어서의 최상의 권위로 인정했다.

바리새주의는 그러한 종교 개념의 최종적인 결말이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종교는 율법에 순응하는 것을 뜻하게 되었고 , 하나님의 은혜는 오로지 율법을 행하는 자들에게만 약속되어 있는 것으로 되었다.
바리새파적인 기풍을 진작시키는 것은 다름 아닌 전통을 조문조문 철두철미하게 지키는 일이었다. 마음의 내적인 성향보다 외적인 형식을 더 중요시하는 것은 대부분의 종교에서 볼 수 있는경향이다. 우리는 세례 요한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 인들을 가리켜 '독사의 자식들'(눅3:7)이라고 한 사실과 또한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의 자기 의와 위선과 그리고 모세의 율법을 아주 세세한 것까지 아주 철저하게 지키면서도 율법의 더 중한 것들에는 무관심한 것에 대해 그들을 질책하셨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마5:20)

2) 사두개 파
사두개 파(Sadducee)란 말은 사독(Zadok)이란 이름에서온 것으로짐작되는데 이이름에서 다윗 재위 시 사독으로 표기되었다. 사독이란 이름을 가진 이름난 유대인들 중에서도 다윗 재위시 제사장으로 있었고 마카비 시대의 정치적 혼란 때까지 계속 대제사장의 가문을 지켰던 사독 집안이다. 셀류시도 왕조에 의해 부과된 팔레스틴의 헬라화 계획을 추진하는 동안 외세와 접하게 된 자들이 바로 사두개 파 계열의 대제사장들이었다. 그들이 정치적 권력과 신장됨에 따라서 종교적 헌신 도는 줄어들었다. 그래서 마카베오 상의 저자는 그러한 지도자들을 그들의 조상들의 유산에 대한 변절자요, 배반자로 여겼던 것이다. 예수님 당시 사두개 파는 수적으로 소수파였지만 정치와 종교에 있어 폭넓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요세푸스의 증언으로 판단해 보건대, 그들은 교육받은 자들이요 대부분 고위직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3) 엣세네 파
주요 유대인 종파 가운데 제 3의 종파인 엣세네 파는 신약성서 안에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들의 숫자는 대략 4,000명 정도였으며, 단순하고 절제하는 생활에 전념했다고 한다. 좀더 엄격한 엣세네 파 사람들은 결혼도 하지 않았다. 이 단체의 공동 생활에 입단하려면 반드시 3년간의 수련기간을 거쳐야 했으며, 일단 이 종파에 입단하면 누구든지 자기 개인 재산을 공동 재산에 넣어야 하였다. 종교적 훈련으로는 의식적인 씻음, 세례, 정해져 있는 여러 시간 동안의 기도, 일출시 일과 시작, 구약의 계속적인 독서와 연구 등이 있었다. 엣세네 파는 예언자들을 통해 예언된 하나님의 약속들이 자기네 공동체의 역사 속에서 성취되어 가고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내적인 정결의 상징으로 흰옷을 입었다. 그들의 안식일 법 해석은 심지어 바리새파보다 훨씬 더 엄격했다. 사해 서쪽의 황무지는 그들이 좋아하는 정착지였다. 금세기 중반 무렵에 쿰란 부근에서 수도원과 흡사한 공동체의 유적이 발굴되었고, 인근 여러 동굴에서 이들이 감추어 놓은 항아리 안에 봉해진 여러 개의 두루마리가발견되었다. 이 두루마리 안에는 히브리어와 아람 어와 헬라어로 기록된 수백 개의 외경 단편들이 쓰여져 있었다.

4) 헤롯 당
대부분의 학자들에 의하면 헤롯 당은 어떤 종파도 정치단체도 아닌 것이 분명한 것 같다. 헤롯 왕가의 통치를 지지하고 따라서 자연히 헤롯 왕조를 지탱케 하는 권위를 지녔던 로마인들의 통치를 지지하던 영향력 있고 고위직에 있던 유대인들을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하다. 복음서에보면 헤롯당은 한 번은 갈릴리에서(막3:6) 그리고 또 한 번은 예루살렘에서(마22:16,막12:13) 예수님의 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5) 젤리옷 당(열심당)
요세푸스에 의하면 유대인의 '제 4의 철학'이라고 표현된 제리옷 당은 주후 6년에 로마인들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갈릴리 사람 유다가 창설했다.(행5:37) 이스라엘이 이방의 로마 황제에게 조공을 바치는 것을 반대했다. 그들은 종교적인 신앙 내용에 있어서는 바리새인들과 의견을 같이 했으나 그 정신에 있어서는 마카비 전쟁의 지도자였던 맛다디아와 그의 아들들이 보여주었던 열심을 재생시키려 했다. 1세기 중엽에 이집트에서 온 또 한 명의 애국적인 선동자가 호전적인 유대 민족주의자 약 4,000명을 동원한 일이 있었다. 그들은 은폐된 단검으로 무장하고 다녔기 때문에 시카리, 곧 자객들이라고 불려졌다.(행21:38) 제리옷 당원들은 결국 예루살렘의 멸망을 초래하고 말았다. 제리옷 당은 반항의 최후 보루인 마사다 요새에서 3년간을 버티다가 최후를 맞이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세리와 함께 제리옷 당원이 있었다.(눅6:15)

6) 땅의 사람들-민중
팔레스틴 갈릴리지ㅐ역 유대인들의 대다수(90% 이상)는 앞에서 거론했던 종파나 단체에 소속되지 않았다. 이 다수 자들은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갈릴리 지역에서 사는 '땅의 백성들'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이 용어는 다만 통치자들 및 귀족들과 구분되는 의미에서 민중을 뜻했다. 이 말은 신약시대에 와서는 특별히 무지 혹은 무관심으로 인해 모세의 율법과 여기서 파생된 세세한 규례들을 지키지 못하는 자들을 의미하게 되었다. 요한복음 7장 49절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거기에 보면 '이 무리' 라는 지칭은 율법을 모르는 무식한 대중들에 대해 경멸조로 사용되고 있다. 바리새인은 ' 그 땅의 백성들' 과 함께 식사할 수 없었으며 이 두 계층간의 통혼은 가증한 것으로 정죄 되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는 갈릴리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이런 부류의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셨으며 이들과 자유로이 상종하셨다. 이들을가리켜 '목자 없는 양'(마9:36)이라고 하였다. 예수께서 이들의 편을 드실 뿐만 아니라 바리새인들의 세세한 규례들을 준수하는 일에 소홀하셨다는 이유로 종교지도자들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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