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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분묘교회

행복나무 Glücksbaum 2000. 3. 8. 21:52

 

 

  

 

 
 

예루살렘에서 가장 신성한 이 성묘 교회는 이곳을 찾는 순례자들의 마음에 깊은 감명을 주는 곳이다.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던 골고다 언덕(마27:33-)이나 예수님의 무덤(아리마대의 무덤, 마27:59, 요 19: 421-)나 모두 이 교회 건물 안에 있다.

 

132년 유대인의 반란을 진압한 하드리안 황제는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을 완전히 추방하고 135년 이 자리에다 비너스 신전을 건축하였다. 즉 쥬피타, 유노, 베누스의 3신을 제사지내는 성 요새 아엘리아 카피트리나를 건축하여 유대인을 제압하려고 하였다. 다행히 카피트리나를 건설할 때, 황제는 분묘가 있는 암장을 파괴하지는 않은 웅덩이에 토사를 투입해서 매장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이 대문에 카피트리나의 토대인 토층은 분묘가 파괴될 위험으로부터 구하게 되었다. A.D 325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와 사교 마칼리우스가 카피트리나의 아래에서 그리스도의 묘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역사는 아이로니칼하여 하두리아누스가 이곳에 신전을 세워 놓았기 때문에 쉽게 골고다의 예수님의 무덤을 찾는데 도움을 주게 된 것이다. 이곳에서 또 다른 두 범죄자의 십자가도 발견되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313년 기독교가 공인되고 326년부터 335년에 걸쳐 교회를 지었다. 공사를 하는 동안 언덕 바위의 흔적은 사라지고 2개소만 바위의 흔적을 남겨놓았는데 하나는 십자가가 세워졌던 곳이고, 또 다른 하나는 원형의 거대한 건물 아래 잇는 예수 그리스도의 묘이다. 그 동쪽에는 십자가를 재발견했다는 곳을 기념하여 지하 예배 처소가 있는 바실리카가 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도움으로 성 헬레나가 이곳에다 교회를 지었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허물어져 갔고, 614년 페르시아에 점령되어 파괴되어 버렸다. 바실리카는 15 년 후에 신부 모디스트에 의해 재건되어 1009년에 칼리프, 엘 하겐에 의해 지면이 고르게 될 때까지 그 모습을 다시 재건되었으나 아랍인들에 의해 또 다시 파괴되는 수난을 겪었다.

 

1149년 십자군 운동으로 이 교회는 새롭게 지금의 형태로 지어지게 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그때의 형태가 기본이지만 1808년 화재로 인해 파괴되고 다시 복구는 되었으나 그 대부분이 손상되어 버렸다. 방화에 의한 화재를 다하여 망가진 성묘 교회는 나폴레옹이 유럽을 전화로 몰고 가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 재건에 유럽의 로마 가톨릭교회들이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오랫동안 로마 가톨릭 교회와 견원지간이었던 그리스 정교회는 교회 수복의 권리를 독점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가톨릭교회를 연상케 하는 모든 부분을 파괴해 버린 그리스 정교회의 이 수복은 소위 ‘새로운 파괴’라는 악명을 얻게 되었다.

 

오늘날 성묘는 6개의 종파에 의해 분리 관리되고 있다. 로마 가톨릭 교회, 그리스 정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외에는 이집트 콥틱 교회와 시리아 정교회, 그리고 에디오피아 교회는 교회의 지붕 위에 수도원이 있다.

 
 
 

 

  (1) 그리스도의 수의

 

토리노의 수의는 1978년 일반에게 공개되면서 세인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세마포로 만들어진 길이 4.2m에 폭 1.1m로서 중간을 기점으로 대칭 되는 한 중년남자의 알몸 자국이 앞면과 뒷면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긴 머리에 턱수염을 길렀고 키가 180cm로 밝혀진 이 사람의 손목에는 못 자국이 있으며 머리, 등, 옆구리 등엣 도 핏자국이 발견됐다.

하지만 1973년 이후 15년간의 과학자들의 치밀한 연구와 논쟁을 거친 후 마치매 1988년 로마 교황청은 문제의 수의가 서기 14세기의 것이라는 최종 판정을 내렸다. 이러한 판정의 결정적인 증거는 옥스퍼드, 버클리, 에리조나 대학과 취리히의 한 물리학 연구소 등 모두 네 군데의 실험실에 의뢰한 탄소 동위원소연대측정의 결과였다.

모든 생명체는 살아있는 동안 몸속에 탄소를 만들어 비축하지만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절대량에 관계없이 어떤 개체에서 원래의 탄소량에 비해 절반으로 줄어드는 시기는 5730년으로 모두 일정하다. 따라서 아마포로 만들어진 그리스도의 수의에 남아있는 탄소의 양을 측정하면 이 천의 재료가 또는 아마의 수확 시기를 알 수 있다.

50년 정도의 오차를 감안하더라도 수의가 서기 14세기의 것이라는 판정에는 의의를 제기할 수 없는 실정이어서 교황청도 이를 받아들여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도의 수의에 관한 기록은 서기 4세기 가이사랴의 교회사가였던 유세비우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기 30년쯤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였던 다대오는 그리스도의 얼굴 형상이 그려진 천을 에데사 왕 아브가르에게 선물로 가져갔다는 것이다. 나병에 걸린 이 왕은 다대오가 가져온 천에 손을 대는 순간 병이 나았다. 그 후 많은 순례자들이 기적과 치유의 천을 보고 만지기를 위해 에데사로 몰려들었다. 서기 944년 비잔틴 제국의 로마누스 1세는 ‘만딜리온’(작은 손수건) 이라 불리는 이 천을 탈취하기 위해 에데사를 포위했고 결국 이 천은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졌다. 서기 1204년 4차 십자군 원정의 성전 기사단은 만딜리온을 탈취하여 프랑스로 가져왔다고 한다.

 

1357년 프랑스의 릴에서 대중에게 공개 되면서 ‘예수의 수의’ 라는 별명이 붙기 시작했다. 1456년 이 수의는 사보이의 왕에게 증정됐고 샹베리 성에 보관돼 있었다. 1532년 이 성채에 화재가 발생해서 수의의 일부가 불에 탄 직후 수의는 이탈리아의 토리노로 옮겨져서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왔다.

 

성물을 그리스어로 ‘아케이로포이에토스’ 라 부르는데 그리스도의 나무 십자가, 최후의 만찬에 사용된 주님의 거룩한 잔, 옆구리를 찔렀던 로마 병사의 창, 예수의 손자국이 남아있는 채찍기둥, 겟세마네에서 예수가 흘린 피땀을 닦아낸 손수건 등이 성물의 범주에 속한다.

 
 

 

  (2) 베로니카 여인의 손수건

 

서기 4세기에 기록된 신약성서의 위경 중 베드로 행전에 나오는 ‘베로니카의 수건’이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데 한 여인이 수건을 건넸고 땀을 닦은 후 돌려받았다는데 그 수건에 주님의 얼굴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 전승 때문에 서기 11세기 십자군 시대에 판정된 빌라도 법정에서부터 골고다에 이르는 14 장소의 ‘수난의 길- 비오돌로로사’ 중에서 제 6장소가 오늘날까지 베로니카 사건의 연장으로 알져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비잔틴 시대 베로니카의 수건이라고 알려진 성물이 30개가 넘는다는 사실이다.

중세 유럽에서 성물은 의도적으로 만들어지고 널리 알려졌다. 각 지방에서 몰려든 순례자들로 붐볐고 이는 곧 관광 비즈니스와 연계되어 수많은 관광 순례 객들을 불러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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