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원순 강연과 그의 책 <프리윌>을 통해 알아본 진보의 가능성
제17대 대통령 선거가 이명박 후보의 과반수 당선으로 막을 내렸다. 국민들은 이제까지 '진보'라는 이름을 걸고 활동해온 정치세력들에게 '가짜진보'라는 엄정한 평가를 내렸다. 한나라당 부설 여의도연구소가 지난 1월 한국사회과학데이터센터(KSDC)와 함께 실시한 ‘2007년 유권자 성향조사’ 결과를 보면 유권자들의 이념구성은 진보와 중도를 합해 63.9%에 이르렀다. 중도 실용주의가 두터워지기는 했지만 보수 이념이 50% 가까운 당선자를 만들어낼 만큼 강성하지는 않았다. 이는 유권자들이 '현재의 진보'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이라는 시각을 반영한다. 민노당의 몰락도 유의미한 현상이다. 노무현 지지자들의 결집에도 불구하고 2002년 대선 95만7148표(3.9%)라는 선전을 했던 민노당 권영길 후보는 이번 대선에서 유권자 확대와 결집도 완화라는 자유로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71만1715표(3%)라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성적표를 받아 '진보세력의 죽음'을 알렸다.
이제 우리는 진보라는 이름을 처음부터 다시 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자면 역할모델이 필요한데 마침 '아름다운가게'의 5년 성과를 정리하는 박원순 씨의 저서 '프리윌'이 출판됐다. 때에 맞춰 열린 박원순 씨의 북세미나 강연(2007년 12월 17일, 교보문고)의 녹취록과 '프리윌'의 글을 통해 '미래의 진보'를 위한 과제를 정리해 보았다.
1. 영업자 마인드 - 자세를 낮추고 서민의 언어를 쓰라
아름다운 가게는 2002년 안국1호점이 개장된 이래 현재까지 102배의 성장을 거뒀다. 전국적으로 84개의 지점을 개설하고 판매익은 100억원대에 달하며, 180여명의 상근 간사와 5,000여명의 자원봉사자가 멈추지 않고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사회적 기업이라는 다소 생소한 모델을 성공적으로 만들어 놓은 성과는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경력과 무관하게 박원순 상임이사는 시종 자세를 낮췄다. 그의 모습을 보고 필자는 영업 직원의 절실함과 히딩크 전 축구대표팀 감독의 '배고픔'을 동시에 볼 수 있었다. 심지어 그는 채용하고 있는 간사들에게까지 영업을 한다. 이사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자신을 '원순 씨'라고 부르는 게 얼마나 친근해 보이느냐며 간사들을 압박하는 모습이 그의 책 곳곳에 스며 있다.
"소품이 필요하다면 의뢰해 주세요. 전국의 지점망을 탈탈 털어서라도 찾아낼 수 있어요. 그러니 걱정 말고 기부해 주세요."
"만약 인생의 목표를 아직 잡지 못하는 젊은이가 있다면, 또는 시간적 여유가 많아서 의미 있는 일을 해보고 싶은 분들이 있다면 누구나 환영합니다. 하지만 월급은 좀 적을 겁니다.(웃음)"(강연 요지)
강연의 내용에서도 지식인의 냄새가 나지 않는 비근한 언어사용은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다. 강연에서는 사투리 제목의 책을 예로 들며 친근하게 다가가기도 하고("혼자 살면 아무런 재미가 없습니다. '혼자 잘 살면 무슨 재민겨'라는 책도 있지 않아요") 누구나 아는 관용구를 이용해 뜻이 잘 이해되도록 배려했다.("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지요") 그의 책 <프리 윌>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사람은 '정'에 약하다. "그놈의 정 때문에"라거나 "정은 죽지도 않아" 같은 유행어도 한국에만 있는 말일 것이다."(책 117쪽)
그것은 전문적 지식인, 특히 아직도 어려운 용어를 밥먹듯이 쓰는 '법조계' 생활을 했던 사람에게 보기 쉽지 않은 모습이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 현장의 땀냄새가 그대로 보이는 듯했다. 그렇다고 아주 대중적으로 쏠린 것도 아니다. 비근한 용어를 사용하되 던지는 메시지는 심오했다.
"공공장소에서도 유리문을 열고 들어갈 적에 뒤도 쳐다보지 않고 손을 놓아버리기 때문에 뒤에 오던 사람들이 문에 맞는 경우가 많습니다. 뒤에 오는 사람이 없는지 조금만 기다려주고 뒤에 있는 분은 '고맙습니다' 하고 감사를 표시하는 문화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강연 요지)
동양 유학의 기본 교재인 '대학(大學)'이라는 책에는 학문하는 사람이 본질적으로 취해야 할 자세를 설명해 놓았다. 즉, 지도자가 몸소 행동하고 마음으로 터득하고 남은 것들을 자신의 근본으로 삼고, 결코 백성들의 일상이나 상식을 넘어서는 것에 대해서는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皆本之人君躬行心得之餘요 不待求之民生日用彛倫之外라<대학 서문>) 박원순 이사는 경전의 기본정신을 성실히 실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허황한 구호나 어려운 관념만을 되풀이하며 대중의 외면을 받은 진보 세력들에게는 분명 시사하는 바가 있는 대목이다.
2. 역지사지 - 서민의 처지를 깊이 고민하라
박원순 상임이사에 의하면 '아름다운가게'는 고물상이다. 고물상으로 100억을 벌 수 있을까 의아해할 수 있지만 왜 헌 물건을 소재로 삼았는가를 따져본다면 아름다운가게를 세울 적의 고심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아름다운가게가 지향하는 나눔과 순환의 가치는 그런 근본적인 물음에서 시작되었다. 나눔과 순환의 실천을 위에서가 아니라 밑바닥에서부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쉬운 것부터 하자는 운동이 바로 아름다운가게의 탄생설화이다. (책 83~84쪽)
경향신문이 10월 8일부터 11월 29일까지 특집기획 <'사회적 기업'이 희망이다>에서 소개한 사회적 기업의 면면을 살펴보면 아름다운가게가 왜 고물상을 사업아이템으로 삼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경향신문의 기획에 따르면 영국에서 시작해 일본에까지 건너간 '빅이슈'는 노숙자들에게 잡지판매 대행권을 주고 자립할 수 있게 한 사회적 기업이다. 역시 영국의 ‘브롬리 바이 보 센터(BBBC, Bromley By Bow Center)'는 정원 관리와 목공 수업 등 5개 프로젝트를 통해 사회적 기업으로 전환됐다. 프랑스의 ‘레소 플뤼(Reseau-plus)’는 노인들의 집을 직접 방문해 이동과 목욕, 식사를 돕고 말동무도 되어주는 돌보미 서비스이다. 스코틀랜드의 포스섹터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일할 기회를 주자는 목적에서 1990년 설립됐는데 주로 자수 서비스, 세탁소, 음식 배달, 비누가게 등을 사업체로 운영하고 있다.
사회적 기업이란 본질적으로 '사회적 약자를 위한 기업'이어야 한다. 세계의 유명한 사회적 기업들이 세탁이나 자수 등을 주요 업종으로 선택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프리윌>에서 글쓴이는 사회적 기업이 가져야 하는 자세를 친구들의 입을 빌려 분명히 설명했다.
"미국의 사회적기업인 루비콘 관계자는 '우리는 빵을 팔기 위해 고용하는 것이 아니라 고용하기 위해 빵을 팝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187쪽>
"사람들이 거리에서 굶어 죽고 있는 상황에서 나는 현실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경제 이론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강의실 안에서 보호받은 채 모든 해답을 다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게 오만한 일임을 깨달았죠. 나는 가난한 이들을 스승으로 삼겠다고 결심했습니다."<유누스 그라민 은행장의 말, 220쪽에 재인용>
3. 아름다운 정체성 - 모순을 피하지 말고 그대로 뚫고 가라
"아름다운 가게는 참 모호한 존재다. 매출과 효율성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적 기업이다. 효율적인 순환구조를 만들기 위해 매출을 자꾸 이야기하게 되는데, 어떨 때는 ‘장사하러 여기 왔나?’ 하는 생각을 가질 때도 있다. NPO(비영리단체)를 너무 강조하다 보면 반대로 합리성과 효율성에 소홀할 수밖에 없다."(강연회)
<프리윌>에는 박원순 이사가 '아름다운가게'를 만들기까지의 과정이 눈물겹게 묘사돼 있다. 그는 강연회에도 동일한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려주었다. 그것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아름다운가게는 박원순 이사가 1991년 영국에 거주할 때 옥스팜이라는 헌 물건을 취급하는 가게의 시스템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아서 추후에 구체화한 사업이다. 역할 모델을 확고히 하기 위해 17박18일의 해외 벤치마킹을 다니며 구세군과 굿윌의 전국적이고 체계적인 조직망과 운영 시스템, 실무 노하우들을 서캐훑이하듯 메모해 왔다. 구세군 매뉴얼을 얻기 위해 벌였다던 일명 '007작전'은 책에도 강연에서도 모두 소개되었는데 구세군에서 매뉴얼을 협조하는 데 매우 조심스러웠기 때문에 각자 조금씩 본 것을 기억했다가 숙소에서 짜맞추는 식으로 신규가게를 열 때 필요한 한 달 전의 체크포인트, 일주일 전의 체크포인트, 3일 전의 체크포인트 이런 식으로 꼼꼼하게 점검사항을 챙기고 나서 아름다운가게를 시작했다.
박원순 이사에 의하면 사회적 기업의 성공 조건은 공익적 가치만을 가지고는 모자라며 기업적 가치만 가지고도 '수지'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짜 공익적 가치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일반 기업 못지 않는 치밀하고 철저한 영업 전략이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반기업의 논리만 받아들인다면 일반기업이 되기 때문에 '사회적 기업'으로서 정체성을 소중하게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프리윌>에서 그 사례를 세세히 소개하고 있는데 특징적인 것을 몇 가지 소개하면, 일반 회사에서 재고품을 최소 가격으로 넘겨주겠다는 속칭 '땡처리' 제안이 왔을 때 이 문제를 심각하게 논의한 적이 있었다. 결론은 '거부'였다. 이유는 물건을 싸게 사와 판매한다면 그것은 일반 장사꾼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어느 지점에 도난 사건이 빈번히 발생했다. 하지만 아름다운가게에서는 절대로 감시카메라를 설치하지 않는다. 아름다운 취지와 목적은 그에 걸맞는 아름다운 수단을 통해서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필자가 박원순 이사에게 직접 물었다. 아름다운가게라는 몸으로 따지면 우리나라의 허파와도 같은 소중한 존재이며, 사회적 기업의 자랑스러운 모델이지만 '나쁜 공기'가 너무 많아 허탈하다고. 삼성비자금 사건으로 불거진 재벌독재 문제나 노동자 탄압, 무리한 FTA 문제 처리 등 나쁜 공기가 너무 많다고. 박원순 이사는 마치 'BBK 특검 논란'에 대해서 사자후를 던지듯 대답했다. 그의 대답을 결론으로 삼아도 좋겠다.
"다양한 것이 아름답다. 우주를 어떻게 만들어지고 그려지는지는, 우주를 어떻게 그리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 시민단체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재벌기업, 대기업의 문제가 있지만 그것을 지적하는 곳도 있다. 하지만 부정적인 부분만 고치려 하기보다 있었으면 하는 것을 만드는 것, 이른바 포지티브의 역할이 그래서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미개척 영역을 자꾸 개척해야 한다. 우리나라 직업의 가짓수가 일본의 절반이라고 한다. 이 말은 뒤집으면 아직도 만들 직업이 대기업의 문제는 문제대로 고치고 포지티브한 부분을 자꾸 만들어가야 한다."(강연 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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