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구석구석 살펴보기/이리 저리 발길 따라서

사데 (현재명, sart)

행복나무 Glücksbaum 2007. 12. 26. 17:32

서머나에서 앙카라 쪽으로 이어지는 국도를 70km 달려 ‘사르트’(Sart)라는 작은 마을에 이르렀다. 오늘날 사르트 마을이 고대 사데의 유적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옛날 서부지역을 제패했던 리디아 왕국의 수도가 사데였다.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와 함께 요한 계시록에 기록된 소아시아의 일곱 초대교회 중의 하나인 사데 교회가 있던 곳이다.

 
 1) 성터

사르트의 트몰루스(Tmolus)산등성이에 리디아 왕국의 궁전과 성터가 남아 있다. 황금으로 가득했다는 궁전은 간 곳이 없고, 궁전을 지키는 성벽만이 일부 남아 있다. 일찍이 희랍의 역사가 헤로도투스(Herodotus)가 사데의 자나간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사데를 끼고 흐르는 작은 시내는 황금 천이었다. 크로우수스 왕은 트몰로수 산만큼이나 분량의 사금을 채취하여 세게 최초의 금화를 주조했다.
아테네의 현인 솔론(Solon)이 사데를 방문했을 때 크로이수스 왕은 자랑스럽게 왕국의 보물을 보여주며 자랑했다. 그리고 그는 솔론에게 물었다. ‘아테네의 현인이여, 당신이 만난 사람들 가운데 누가 제일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오? 왕은 솔론의 입에서 자기의 이름이 나오기를 기대하고 물은 것이다. 솔론은 대답하기를 ‘사람이 행복하게 생애를 마칠 때까지는 아무도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기원전 540년 페르시아 제국의 고레스(Cyrus)의 군대를 이끌고 사데를 침공하였다. 사데의 방위는 튼튼하여 무적의 기병대와 난공불락의 성벽으로 인해 고레스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고레스 왕은 말들이 낙타를 싫어하는 것을 알고 낙타 떼를 데리고 사데의 기병대 사이를 돌진했다. 사데 기병대의 말은 혼비백산 달아났다. 또 페르시아 군대는 다음의 철옹성을 어떻게 함락시키느냐 고민하던 중 우연히 사데 성안의 병사 한 명이 실수로 투구를 성 밖으로 떨어뜨렸는데, 성벽을 타고 내려와서 투구를 집어 들고 올라가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날 밤, 페르시아 군대는 그 지점을 타고 성벽을 기어 올라가 사데 성을 함락시켰다. 크로아수스 왕은 붙잡혀 불에 타 죽게 되었는데 그는 화염 속에서 ‘솔론’을 부르며 죽어 갔다고 한다. 뒤늦게 그는 아테네 현인이 말한 뜻을 깨닫게 된 것이다.

 
 2) 고대 사데의 체육관

사데 발굴된 유명한 유적 가운데 또 하나는 대리석으로 건축된 체육관 곧 김나지움(Gymnasium)이다. 로마 시대에 건축된 지대한 체육관의 전면부분은 현재 복원되어 있다. 로마 식 도시에는 어디에나 세워졌던 체육관은 단순히 육체만 단련하는 곳이 아니었다. 일반교육도 이루어졌던 교육의 장소였다.

사데는 터키 여러 지역 가운데 고고학적 발굴이 이루어진 지역 중의 하나이다. 20세기 초에 미국 프린스턴 대학팀이 발굴했고, 1950년대 이후로 지금까지 하버드 대학과 코넬대학이 주축이 된 합동 발굴단의 발굴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그 동안 세계를 놀라게 한 발굴도 있었다. 순금을 제련하는 기구였던 도가니를 무려 300개나 발굴한 것이다. 도가니 밑바닥에는 순금이 그대로 남아 있어, 전설적으로만 알려져 있던 크로아수스 왕이 누렸던 부가 역사적인 사실이었음이 판명되었다.

김나지움 곁에는 유대인 회당(Synagogue)도 발굴되었다. 1,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었던 이 유대인 회당은 지금까지 알려진 고대시대의 유대인 회당으로서는 최대 규모이다.

 
 3) 그리스의 신전 터

사데 유적 중에 아르테미스 여신의 신전을 빼어 놓을 수 없다. 기원전 33년 전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세워졌다고 한다. 지금도 18m 높이의 이오니아 식 석주 두 개가 외롭게 서 있다.

 
 4) 사데 교회

아르테미스 신전 남쪽 끝 부분에 붉은 벽돌로 지어진 작은 교회(묵 3:1-6)의 유적이 남아 있다. 비잔틴 시대의 교회로서 기도처라고 하는 것이 나을 정도로 작은 규모이다. 거대한 아르테미스 신전의 석조건물과 벽돌로 지은 작은 규모의 교회가 너무도 대조적이다.
사데 교회는 분명 큰 교회는 아니었다. 요한 계시록의 기록에도 사데 교회의 규모보다 사데에 있는 소수의 의인을 칭찬하였다.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을 것이라,’ 당시 로마 시대의 부와 권세의 상징은 자주색이었다. 사데의 의로운 소수자들에게 자주색 옷이 아니라, 백옥같은 흰옷이 약속된 것은 의미 깊은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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