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의 회고록 <자유>를 읽고…
2024년 11월 26일, 전 세계 동시 발매로 나온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의 회고록이 그렇다.
한길사 출판으로 760쪽 분량(독일어 원본은하필이면 이 책을 받아 볼 시점에 12.3 내란 사태가 터졌다.
이 책은 아마 미국에서도 같은 운명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올해 1월 20일 취임이 예정됐던 트럼프가 이미 취임 전부터 관세 전쟁을 예고하는 폭탄 발언들, 우크라이나 전쟁을 둘러싼 여러 가지 소문들을 연이어 내놓고 있던 와중에 나온 책이라, 여론이 당면 문제들을 따라 우왕좌왕하는 사이 메르켈 회고록은 "한가한" 소리 같이 돼 버렸다.
트럼프 1.0 행정부 시절, G7 정상회담 현장에서 다부지게 트럼프를 몰아붙이던 "여걸" 메르켈 이야기도 이제 단순히 지나간 역사의 한 장이 되어버린 것인가? NATO 방위비 분담 문제로 메르켈과 갈등을 빚다가 갑자기 1만명 가까운 미군을 독일에서 빼버렸던 트럼프가 다시 역사의 승자로 세계 정치에 복귀한 현실에서, 메르켈의 회고록은 어느 정도 김이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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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보기
▲ (좌,우) 한길사에서 출간된 한국어판 표지,
독일에서 출간된 원서 표지 한국어판 한길사 2024년 1쇄본, 독일어판 Kiepenheuer & Witch 출판사 202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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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세계 4위 경제대국으로, 유럽연합(EU) 리더 국가로, 특히 우리와는 분단 경험을 공유했던 나라 독일에서, 역대 최장수 총리로 16년간 권력의 정상에 있었던 메르켈의 회고록은 여러 가지로 관심을 끈다.
게다가 (구)동독 출신으로, 여성으로서는 최초의 총리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녀는 왜 자신의 회고록 제목을 '자유'라고 지었을까? '
1954-2021년을 회상하다'란 부제를 붙였지만 아무래도 책 제목으로는 약간 범상한 느낌이 든다.
이 책 후기에서 저자는 여기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있다.
"1990년까지는 독재와 부자유, 불의의 국가에서 살다가 1990년부터 민주주의와 자유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적절하게 표현하는 작업도 내게는 꼭 필요한 일"(737쪽)이었다고 한다.
통일이 되기까지 자신의 인생 절반을 살았던 동독 시절 영향이 컸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1954년 7월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던 그녀는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생후 6주 무렵 동독의 크비초라는 작은 마을로 이주한다. 이후 통일이 되기까지 메르켈은 동독인으로 성장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과거 동독인들이 자신의 체제에 대해 느꼈던 감정들이다. 예를 들면 메르켈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동독은 내게 미적 감각이라고는 전혀 없는 무미건조함 그 자체였다. 화려한 원색은 어디에도 없었다... 내가 지금도 화려한 색상의 블레이저 재킷을 선호하는 것도 어쩌면 동독의 일상에서 놓쳤던 강렬한 색상에 대한 동경 때문일른지도 모른다."(53쪽)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는 우리 '유신 시절'을 떠올리게도 된다.
"우리는 학기 중에 청바지를 입고 (고등)학교에 갈 수 없었고, 남학생들은 머리가 길다는 이유로 수시로 교사들의 단속에 걸렸다" (79쪽)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서독 간 통합을 위한 협상이 진행되던 때 메르켈이 동독인으로서 느끼던 소외감과 열패감도 고스란히 전달돼 온다. 과거 동독정권에 몰수되어 국유화되었던 재산들의 환원문제를 다루면서 느꼈던 점들에 대해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나로서는 이전의 몰수 문제를 왜 옛 소유주에게 최대한 유리하게 해결하려고 하는지 납득하기 어려웠다. 반면에 반체제인사나 공산 정권의 희생자, 목회자 자녀처럼 평생 불이익을 받은 사람들에게 보상책을 마련해 주자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내가 조금이라도 비판적 질문을 던지려고하면 대번에 동독에서 살아서 사유재산의 의미를 모른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185쪽)
통일 후 점령군처럼 행세하는 서독 출신 '전문가'들에 대해서는 이렇게도 말한다.
"어떤 사람들이 신탁청 완장을 차고 돌아다니는지 알고 계세요? 젊고 똑똑해 보이지만 오만하기 짝이 없는 삼십 대 미만의 사람들이에요. 이제 막 법학과를 졸업했으면서도 세상천지 자기보다 더 똑똑한 사람이 없는 것처럼 굴어요. 정작 현실과 사람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전혀 없으면서도요!" (205쪽)
▲ 메제베르크 성
메르켈 재임 중 주요 업적의 하나로 사람들은 그녀가 2015년, 백만 명 가까운 난민을 받아들인 것을 꼽는다. 당시 시리아 내전으로 수많은 난민이 발칸반도를 거쳐 헝가리, 오스트리아를 통해 독일로 들어오기를 희망하고 있었는데 헝가리가 국경을 봉쇄하고 있었다.
독일은 헌법에 정치적 망명권을 기본권으로 인정하고 있는 나라이다. 헝가리가 국경을 봉쇄하고 있던 당시 난민 문제는 전 유럽의 문제였다. 이 물꼬를 튼 것이 메르켈이었다. 독일의 국경 개방으로 2015년 한 해에만 독일에 난민으로 공식 수용된 인원이 86만 명이었다.
인도적 휴머니즘의 정수를 보여주었던 메르켈의 이 조치는 세계의 찬사를 받았지만 막상 독일 내에서는 극우가 부상하는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지난 2월 23일 실시된 독일 총선에서 극우정당인 독일대안당(AfD)이 20%가 넘는 득표율로, 전통적인 대중정당이었던 사민당을 제치고 제2당의 자리에 올랐다. 극우정당은 특히 옛 동독지역에서 더욱 기승을 부렸다. 작센 주나 튀링겐 주 같은 과거 동독 지역에서는 AfD가 제1당의 위치를 차지하고도 있다. 동독 지역에서 특히 극우가 맹위를 떨치고 있는 원인을 메르켈은 동독 통치의 유산으로 보고 있다.
"동독에서 관용과 통합이라는 단어는 외국어나 다름없었다. 동독 공산당의 권위주의적이고 독재적인 성격은 독일 통일 이후에도 동독 땅에서 계속 영향을 미쳤다. 청년층의 4분의 3이 새로운 자유의 기회를 누렸지만, 미래에 대한 전망은 사라지고 대신 서독 젊은이들에 대한 열등감과 권위에 대한 동경만 남았다 ... 그들은 민주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다른 가치를 배우고 경험할 기회가 없었다." (235쪽)
그녀가 여성정치인으로서, 남성 주류의 정치권 눈치를 봐야 했던 대목들은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우리에 비해 여성의 사회진출이 앞섰고, 사회 각부문에서 남녀평등이 많이 이루어져 있다고 믿었던 독일 사회에서도 여성 정치인으로서 그녀가 겪어야 했던 심적 갈등은 다소 놀라웠다.
그녀가 1991년 1월, 통일 후 첫 내각의 여성청소년부 장관에 취임할 때 가장 고민해야 했던 대목이 "무엇을 입어야 할까"라는 것이었다면 믿어질까? 그녀는 치마를 입어야 하는지, 바지를 입어도 되는지를 동료에게 묻는다.
"작년에 의회에서 선서식을 할 때도 복장을 제대로 갖추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어요. 이런 일로 또다시 남들에게 불쾌감을 주고 싶지 않고, 눈에 띄고 싶지도 않아요." (241쪽)
동독 출신에다가 여성 정치인으로서 그녀가 겪는 이중의 차별이 느껴진다. "여성의원이 바지를 입으려면 용기를 내야 했던", 그런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760여 쪽의 회고록에서 그녀는 자신이 이끌었던 4번의 정부에서 겪었던 다양한 국내외적 사안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우리로서 관심 가져야 할 부분들도 많다. 그러나 내가 특히 관심을 갖고 읽었던 것은 한 개인으로서 그녀가 세상을 보고 인간을 바라보는 태도였다.
보통의 정치인들 회고록과 다른 점은 그녀가 바로 자신의 개인적 삶에 대해 비교적 진솔하게, 회고록의 많은 부분을 할애해서 쓰고 있다는 점이다. 격동의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정치 거물의 회고록이면서도, 일과 후 손수 집 근처 마트에서 저녁 찬거리 장을 보는 평범한 한 동시대인의 초상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메르켈 회고록은 의미가 있다.
▲ 책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난다.우리 모두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같다.
"자유에는 민주주의라는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민주주의 없이는 자유도, 법치도, 인권도 없다.
자유 속에서 살고 싶다면 안으로든 밖으로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이들로부터 우리의 민주주의를 지켜내야 한다.
이는 우리 모두 힘을 합치고 참여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혼자만을 위한 자유는 존재할 수 없다. 자유란 우리 모두의 것이다."
글쓴이, 정범구
[30. April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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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재통일은 성취 되었다.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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