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학이 독일에 번역 소개되기는 1893년에 나온 <한국 동화와 전설>과 1984년의 <춘향전> 등, 19세기말부터 시작되어지나 한국 작가가 독일어로 작품을 써서 발표한 것은 이 미륵 (본명;李儀景)이며 최초이며 유일한 예이다. 단 하나 밖에 없는 자전소설 <압록강은 흐른다. Der Yalu flißt> 로 이 미륵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져 그의 작가적인 위치는 전후 독일문단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한때 이 작품은 독일에서 최우수 소설로 선정된 일까지 있다. 이 외에도 이 미륵의 다른 작품이 있지만 우리나라에는 <압록강이 흐른다> 외에 <어깨기미와 복심이>, <어린 복술이와 큰 창, (1973년 7월 3일, 7월 6일자)> 두 단편만이 소개되었을 뿐이다.
이 미륵은 1920년에 독일에 도착하여 1928년에 학위를 끝내고 줄곧 작가생활을 하다가 끝내 고국의 땅을 다시 밟지 못하고 1950년 3월 20일 뮌헨의 교외에서 타계했다. 그는 1899년 3월 8일 황해도 해주시 남영정 205 번지에서 천석꾼인 이동빈과 이성녀 사이의 1남 3년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별명은 ‘정쇠’ 였으며 아명은 ‘미륵’ 이다. 모친 이씨가 38세의 나이에 아들을 하나 낳기를 고대하여 미륵보살을 찾아 백일기도를 드린 끝에 얻은 아들이라 하여 이렇게 부르게 되었다 한다. 당시의 관례대로 미륵은 해주 보통학교(4년제)를 졸업하던(11세)해에 어른들의 권유로 6세나 연상이 17세의 최문호와 혼인하였다.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으나 그들의 생애나 생사에 관하여는 알려져 있지 않다.
1911년부터는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잠시 신식 중학에도 다녔으나 건강상태가 나빠 학교를 중단하고 말았다. 그 후 그는 계속해서 강의록으로 독학하여, 1917년에는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 3학년이 되던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여 젊은 학도로서 조국의 기구한 운명에 울분을 품고 동료 대학생들과 더불어 전단을 인쇄하여 뿌리는 등, 주모자로써 맹활약했다. 그러나 왜경의 무자비한 총칼에 짓밟히는 조국의 비극을 가슴에 사무치게 품은 미륵은 끝내 압록강을 건너 일단 상해로 망명의 길에 오르게 된다. 상해에서는 다시 유럽으로 가기 위한 여권을 얻으려고 무려 9개월이나 체류하는 동안 임시정부의 일도 돌보아주며 생활하였으며, 결국 중국여권을 받아 유럽으로 가는 배를 타게 되었다고 한다.
처음 도착한 마르세이유에서 미륵은 우연히 한국을 잘 아는 빌헬름 신부를 만나 함께 독일 뮌스터의 슈바르차흐(Münster Schwqrzach)라는 수도원에 도착, 8개월간 그곳에 머물러 독일어 공부에 열중했다 한다. 이듬해 1월 뷔어쯔부르크로 이사(Innere Graben 49번지)하여 그곳 대학에서 의학공부를 하다가 23년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옮겼다. 그러나 병으로 인하여 휴학하였고, 1925년 다시 뮌헨대학에서 동물학과 철학을 전공하였다고 한다. 26년에는 뮌헨 대학교 외국인 학생회장으로 활약하였고, 1927년 6월 25일부터 3개월간은 늑막염으로 스위스의 루가노 요양소에 입원한 일까지 있으며, 건강을 다소 회복하고는 다시 학업에 전력을 기울여 1928년 7월 18일 뮌헨대학에서 동물학 박사학위를 획득하게 됐다.
공부가 끝났으나 전공분야에 종사하지 않고 곧 창작에 열중, 한국을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 들을 발표하였다. 그의 유고의 대부분도 이 시기의 산물이다. 당시 미륵은 주로 학술논문 번역과 신문, 잡지 등에 발표하는 원고료 및 서예 지도 등으로 생계를 유비하며 살았다 한다. 매우 외로운 생활이었으나 1929년 김재원이 뮌헨에 오게되자 객지에서의 고독하던 마음을 어느 정도 달랠 수가 있었다고 한다. 27년에는 한국어 문법을 탈고하고 한국의 우수성을 자부하였고, 30년대에는 독일잡지 아틀란티스에 한국을 주제로 하는 작품들과 한국사진들을 소개했다. 40년대에는 여러 신문에 한국의 문화, 정치에 관한 기사들을 실었다. 예를 들면 ‘한국의 종교에 관하여’ 를 발표하여 불교 및 유교가 한국에 포교된 역사적인 과정과 기독교의 유입과정을 소개하였고, ‘한국과 한국인’ 이라는 글에서는 한국문화의 배경, 당시의 정치적인 형세 및 극도에서의 일본의 침략정치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한국의 독립을 역설하였다. 또한 그의 ‘이야기’ 들과 그의 소설을 통해서 한국에 대한 지식이 빈약했던 독일인들에게 “코레아” 를 올바로 인식시켰다. 그러다가 1931년 그의 동료였던 지그문트 여사와 슈미트 여사의 소개로 자일러(Seiler)교수를 알게되 어 그의 집에 기거하면서부터 자신의 작가적 소질을 발휘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듬해인 32년 자일러 교수가 뮌헨교외인 그레펠핑으로 이사함에 따라 미륵도 따라가게 됐다.
43년에는 그레펠핑에 문화인단체를 조직하여 정기적으로 문학 발표회와 토론회를 가짐으로써 많은 작가, 교수, 연예인, 화가 등 지식인들과 교류가 생겼으며, 그의 활동범위는 점차 확대되어 갔다. 46년에는 여러 해 동안 심혈을 기울여 써온 “압록강은 흐른다” 가 뮌헨의 피퍼(Piper) 출판사에서 출간됐다. ‘압록강이 흐른다’ 의 발췌문은 독일에서 오늘까지도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 읽혀지고 있다. 이것은 그 문체의 훌륭함에도 원인이 있겠으나 그보다도 동양세계에 대한 지식을 학생들에게 보급하려는 것이 주목적이라고 하겠다. 만년에 뮌헨대학교 동양학부에서 한학과 한국문학을 강의하였다. 한학과 한국문학을 강의함으로서 많은 동양학자들 육성하였다.
1950년 정월, 그의 병세(위암)가 악화되자 그는 볼프라츠하우젠 병원에 입원하여 대수술을 받았으나 효과 없이 꿈에도 잊지 못하던 조국을 다시 보지 못한 채 3월 20일, 51세를 일기로 임종했다. 그의 망한의 정이 얼마나 간절했던지 임종시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닮도록 ---” 을 부르면 눈을 감았다고 한다. 그의 장례식에는 삼백여 명의 독일인 벗들이 찾아와 애도했으며 지금도 한적한 ‘그레펠핑’ 공동묘지에서 영면하고 있다.
이 미륵은 국가와 민족 그리고 신앙을 초월하여 ‘인간다운 인간’ 이 되려고 진지하게 시도한 인물이었다. 그는 역사적인 현실에 대하여 넓고 깊은 인식과 판단력을 가진 박학자요, 인간의 존엄성을 주장하 인도적인 선각자였다. 그는 품성 좋은 인격과 부단한 노력으로써 동양인의 긍지와 정서를 서구에 인식시켰고 한국을 위해서는 문화사절 역할을 다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동서의 정신적 문화적 교류의 촉진을 필생의 과제로 여겨 서구사상을 한국에 보급하려고 독일문화원을 창설해보려고 시도하였으나 정치적인 사정이 여의치 않아 실천에 옮길 수 없었다고 한다.
일찍이 이미륵의 선구적인 공적은 장기간의 유럽생활 속에서도 결코 동양의 전통적인 것을 경시하지 않고, 서구의 기계주의 문명에다 그야말로 독일어 작품들을 통해서 한국사상 및 문화를 우아한 스타일로 서구에 소개한 점이라 하겠다.
그의 친구였던 부렘 교수는 말하기를, 늘 이미륵은 민족적 특성의 종합이 세계적 보편성이 돼야함을 주장하였다고 한다. 그는 한국의 세계화를 일찍이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이미륵(Mirok Li) : 한국인 작가로서는 최초로 독일어로 작품을 발표하여 한국을 독일에 소개한 인물. 1899년 3월 8일 황해도 해주에서 천석군의 외아들로 태어나, 해주보통학교(4년제)를 졸업(11세), 1917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 3학년이 되던 1919년 3 1운동에 가담하여 활약하였다. 그후 중국을 거쳐 1920년 독일에 건너온 그는 1928년 뮨센대학교에서 동물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줄곧 작가생활을 하다가 1950년 3월 20일 뮌헨교외에서 사망함.
< Der Yalu fließt (압록강은 흐른다.> : 그의 생전에 나온 유일한 자전소설 <Der Yalu fließt(1946년)> 는 한국과 자신의 존재를 독일에 알리는 작품이 되었으며, 한때 독일의 최우수 소설로 선정되며 커다란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작품이 보여주는 단아한 문체와 한국과 동양세계에 대한 소개로 인해, 이 작품은 바이에른주와 헤센 주의 중 고교 국어교과서에 실려 소개되고 있다.
그의 사후 독일에서 <Iyagi> 로 소개된 한국 동화집은, 우리나라에서 <이야기> 혹은 <무던이> 로 소개된 바 있다.
Dann war noch Kuori da, die, Zimmermadchen, Kindermadchen und noch alles mogliche in einer Person, auch zu den Kindern gerechnet wurde.
Waren wir des Laufens mude, dann setzten wir uns auf ein Strohkissen und sonnten uns.
Wiederholt purzelte er herunter, weil die koreanischen Kissen nicht flach, sondern lang und rundlich sind, aber er gab nicht nach, bis er endlich auf dem Schrank stand.
Da wurden wir plotzlich gerufen. Erwartungsvoll auf eine suße Melone oder eine Birne hoffend, betraten wir das große Zimmer, das man Zimmer der Mutter nannte.
Mir war sehr feierlich zumute, und ich saß sehr benommen da, wahrend Suam sich freute, daß wir nun miteinander lernen konnten, und er sich nicht mehr allein plagen mußte.
Ich mochte wirklich wissen, was schwarzer ist, deine Hande oder die Fuße eines Raben.
"Miak!" rief er mit sanfter Stimme, wie immer, wenn er mir etwas Besonderes mitzuteilen hatte.
Er tat das willig, weil er wußte, daß er sein Leben nur dem schwarzen Trank verdanke.
Außer dem eigentlichen Titel des Buches stand noch als zweiter "Weiß-Harr-Schrift" darauf.
Wer das am haufigsten wiederholen konnte, ohne ihn fallen zu lassen, hatte das Spiel gewonn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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