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8년 민주화 시위 중 미얀마 군의 총격으로 일본 기자 사망 ]
74년 공포된 헌법에 의하면 국가의 최고 의결기관은 국회이나, 국회를 지도·감독하는 기관으로는 29명으로 구성된 국가평의회가 실질적 권한을 쥐고 있다. 국회 밑에 행정기관으로서는 전 각료로 구성된 각료평의회가 있고 그 의장이 수상을 겸한다. 사법은 검찰·사법·감사의 각 평의회가 독립적으로 행한다. 지방행정은 지방 각 단위마다 설치된 인민평의회가 행한다.
각 행정단위의 선거는 1인 1구제를 원칙으로 하는 직접선거이나 피선거인은 사회주의계획당원 또는 그 당이 승인한 사람이어야 하며, 계획당은 군인을 중심으로 하므로 민정이양이라 해도 실질적으로는 군정과 큰 차이가 없다. 민정이양에 따라 체면상 권한이 각 기능으로 분산되었기 때문에 파벌적인 움직임이 표면화되었다. 특히 미얀마 사회주의를 둘러싸고 원칙을 주장하는 계획당과 현실적 대응을 해야 하는 각료평의회가 항쟁을 거듭하고 있는데다가 중국 · 소련의 입김도 얽혀 대립은 더욱 심화되었다. 외교 면으로는 비동맹중립정책을 고수하여 국제연합(UN)과 콜롬보 계획 외의 국제회의 참가를 기피하고 있다.
그러나 거듭되는 심각한 경제위기를 벗어나고자 77년 적극적인 외국원조를 받아들일 것을 결정하고 쇄국주의로부터 큰 전환을 이루었다. 특히 중국과는 미얀마 공산당 문제로 미묘한 관계에 있으나 기본적인 선린우호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78년 1월과 11월의 덩샤오핑[鄧小平] 중국 부수상의 방문에 이어 79년 7월 카 수상이 중국을 방문하고 1억 원(元)의 경제기술협력협정을 체결하였다. 9월에는 소련 등의 영향이 강해 비동맹의 이념에 어긋난다 하여 비동맹회의에서 탈퇴하였다. 80년 동남아시아제국연합(ASEAN)의 캄보디아 정책을 지지하는 등 ASEAN에 접근하고 있으며, 81년 1월 중국의 자오쯔양[趙紫陽] 수상이 방문하였다.
총병력 17만 9,000(육군 16만 3000, 해군 7,000, 공군 9,000), 예비역 7만 3,000이며 군복무는 지원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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