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는 중국의 문헌에 예로부터 탄(:후한대)·표(驃:당대)·포감(蒲甘:송대)·면(緬:원대)·면전(緬甸:명·청대) 등의 이름으로 나타나 있다. 이 나라의 역사는 현재 전국의 산야에 정주해 있는 여러 종족의 이동의 역사이다. 서력기원의 시초에는 몬족이 시탕강 하류 지방에 정착하고, 인도로부터 농업기술과 힌두교·불교가 전해졌다고 한다.
미얀마 최초의 강력한 왕조는 8세기에 이라와디 강 하류의 프롬을 수도로 정했던 표족(驃族) 왕조로, 9세기에 멸망하고, 표족도 사라졌다. 11세기가 되면서 이라와디 강 중류 유역에 버마족의 파간 왕조가 일어나, 남쪽의 몬족 지대, 샨 고원까지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왕조는 1287년 몽골군의 침공을 받아 멸망하였다. 그 후 미얀마는 타이계의 여러 종족(샨족·타이족)의 침입 등으로 어지러웠으나, 16세기가 되어 시탕강 중류의 타웅구에 버마족의 퉁구 왕조가 일어나, 1560년경 현재의 미얀마 령을 넘어 타이 북부와 라오스까지도 판도에 넣고 69년에는 타이의 아유타야 왕조까지도 공략하였다. 그러나 이 왕조는 여러 차례에 걸친 외정(外征)과 내전으로 피폐하였으며, 17세기에는 삼각주지대의 반란으로 타웅구를 버리고 이라와디 강 중류 유역의 아바로 천도하였으나, 1752년 이곳까지 북상해온 몬족에게 멸망당하였다. 얼마 후 버마족은 영웅 알라웅파야 밑에 집결하여 몬족을 격파하고, 55년 이라와디 강 삼각주로 진출하여 몬족을 추방하였다. 이때의 승리를 기념하여 다고웅이라 불리던 도시가 랑군(‘전쟁의 끝’이라는 뜻으로 지금의 양곤)으로 개명되었다. 몬족의 최후 거점인 페구는 57년 미얀마 군에 점령되고, 그 후 몬족은 완전히 세력을 잃었다. 알라웅파야 왕조는 67년 타이의 아유타야 왕조를 재차 정복하는 등 강력해졌으나, 19세기에 들어와 아시아로 진출한 영국과 충돌하게 되어 결국 1824년 싸움으로 물메인 지방을, 52년 싸움으로 삼각주 전역을 잃었으며, 85년 마지막 싸움에 패함으로써 붕괴되고, 미얀마 전 영토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영국령 시대의 미얀마는 영국의 아시아 식민지 경영의 거점이 되었다. 영국은 특히 인도방면에 대한 식량 공급지로서 이라와디·시탕의 삼각주 지대에 주목하여 이곳에 인도인을 이입하고, 또 버마족·카렌족을 이용하여 벼농사를 개발하였다. 그 결과 이라와디 삼각주는 1930년대에 세계 최대의 수출용 벼농사지대로 발전하여, 미얀마는 세계 제1의 쌀 수출국이 되었다. 영국은 또 미얀마에서 티크재를 벌채하여 유럽으로 수출하였다. 석유·텅스텐 광석 등도 개발되었다. 영국은 미얀마 경영의 중심을 랑군에 두고 그곳에 인도인 상인과 기업가를 초치하고, 공무원 등도 인도인을 채용하였으며, 또 구르카족·카렌족 등 비(非)버마족을 모집하여 군대를 만들어 미얀마를 다스렸다. 샨족·카렌족·카친족 등은 버마족과 구별되어 실질적으로는 족장에 의한 자치가 인정되는 등 우대를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영국의 미얀마 통치와, 특히 인도인에 의한 경제 지배는 버마족의 반감을 고조시켜 버마 민족주의가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격렬해졌다. 이 운동 중 아웅산과 우누 등이 이끄는 그룹이 두각을 나타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미얀마는 일본에 점령되었으나, 여러 정치세력이 대동단결하여 반파시스트 인민자유연맹(AFPFL)을 결성하고, 영국군에 협력하여 일본군을 격퇴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전쟁 후 아웅산과 우누 등은 영국과 교섭 끝에 마침내 48년 1월 4일 버마 연방을 탄생시키고, 신정권의 지배층이 되었다. 그러나 이 신정권 하에서도 미얀마는 커다란 정치적 혼란을 겪게 되었다. 즉 버마족 중심의 새 정부에 카렌족·샨족 등 소수민족이 반발하여 제각기 독립·자결을 요구하였고, 또 신정권을 탄생시킨 버마족 독립운동가 중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신정권 주류파의 친서방적 노선을 반대한 데서 새 정부와 그 반대자들의 대립이 악화하여 결국 내전으로 발전하였다. 내전은 1946년 7월 공산당 과격파 ‘적기(赤旗) 공산당’의 반란 때 이미 시작되었으나, 48년 공산당 다수파(미얀마 공산당, 속칭 백기 공산당)가 반란을 일으키고, 49년 카렌족이 독립을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키는 등 내전은 확대되어, 미얀마 신정권은 붕괴 직전까지 몰렸다.
그러나 그 후 미국·영국 등의 원조로 미얀마 정부는 정상을 되찾았고, 이 때 네윈 총사령관이 이끄는 미얀마 정부군은 점차 그 지배력을 확대해 갔다. 54년경 반정부군은 게릴라 활동 규모로 축소되고, 공산 계는 이라와디 삼각주와 페구산맥으로, 카렌족은 삼각주와 타이 국경 방면의 산악지대로 분산하였다. 우누가 이끄는 미얀마 정부는 이러한 국내 안정을 배경으로 하여 복지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국영공장의 건설, 외국 계 대기업의 국유화, 토지개혁 등을 통해서 경제개발을 이루려고 하였다. 그러나 게릴라전은 계속되고, 국가 지도 형 경제개발은 잘 진전되지 않았으며, 농촌에서의 토지개혁도 제대로 진전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56년경부터 정부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아져서, 미얀마의 정국은 다시 불안해졌다. 거기에 반정부군측이 단결을 강화하여, 59년 미얀마 공산당과 카렌족 좌파와의 제휴가 이루어져 내전이 다시 확대되고, 샨족·카친족 등의 민족자결 요구도 높아졌으며, 그 중에는 무장 반란부대가 출현하기도 하였다. 우누 정부는 이러한 사태를 수습하지 못하였고, 설상가상으로 여당마저 분열하는 등, 미얀마 정계는 1950년대 말부터 60년대 초에 걸쳐 커다란 혼란 상태에 빠졌다.
이러한 혼란 중에 62년 3월 2일 네윈 장군이 이끄는 미얀마 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정당활동을 정지시키고, 우누 수상 등 많은 정치인을 체포함으로써 미얀마는 군정에 들어갔다. 네윈 군정은 그 기본원칙으로서 ‘미얀마식 사회주의’를 도입, 비(非)버마족 자본의 국유화를 중심으로 하는 국영 경제기구의 확립을 목표로 하고,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 계획당을 창설, 기타 모든 정당을 불법화함으로써 1당 독재체제를 구축하였다. 미얀마식 사회주의 건설 기간이 끝난 74년 1월 1당 체제에 내각책임제를 혼합한 헌법을 공포하고, 그 해 3월에 민정에 이양하면서 네윈이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78년 1월 사회주의계획당만 입후보한 가운데 실시된 총선에서 구성된 새 국회는 네윈을 다시 대통령 겸 국가평의희 의장으로 선출하였다. 80년 5월 네윈 대통령은 대은사령(大恩赦令)을 내려 정치범 등 4,000명을 석방하고 우누 전 수상은 망명지인 인도로부터 11년 만에 귀국하였다.
81년 8월 네윈 대통령이 건강상의 이유 및 평화적 정권교체를 위해 사의를 표명한 데 이어 총선거를 거쳐 11월에 개최된 미얀마 인민의회에서 산유 국가평의회 서기장이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80년대 말까지 경제적으로 가난한 대중은 반정부 폭동을 일으켰으나 군의 폭력으로 진압되었다. 88년 권력을 장악한 군부정권은 이전의 모든 기구를 폐지하고, 국법·질서회복위원회 의장이 국가수반이 되었다. 90년 야당이 총선에서 승리했으나 여전히 군의 통제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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