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ine Welt/미얀마 이야기

지난 20년 동안 미얀마는 무엇이 달라졌는가?

행복나무 Glücksbaum 2008. 11. 5. 18:40


2008년 9월 17일 (DVB)- 군부정권이 ‘8888민중봉기’를 진압한 후  우 네 윈 사회주의 정권을 축출하고 <국가평화발전협의회>(SPDC)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구데타가 일어난 지 20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러나 지금 제기되는 물음은 ‘8888민중봉기’ 이후 지난 20년 동안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었느냐이다. 미얀마는 지금 새로운 접근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지난 20년 동안, 감지할 수 있는 정치적 진보는 없었지만, 국민들의 사고방식은 변해 온 것 같다. 이 정신적인 면의 변화는 지난 20년 동안에 이루어진 진보의 가장 의미 있는 표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모든 변화는 ‘8888민중봉기’에 그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사고의 변화는 현실의 변화를 향한 매우 중요한 발걸음입니다.” 라고 런던 주재 역사학자이자 해외주재 버마어 방송들의 유명한 해설가인 아웅 킨 박사는 말했다.  그는 국내에 있는 많은 버마인들이 외국 라디오들에 흔쾌히 자기 의견을 발표하고자 하는 것은 26년의 네윈 사회주의 체제 시대와 비교해 볼 때 의미 있는 변화의 하나이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네윈 시대에 비판적인 글을 쓴 이유로 몇 차례 구속된 바 있는, 랭군의 중견 언론인인 루두 세인 윈 씨도 아웅 킨 박사의 견해에 동의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금은 우리의 견해를 밝힐 수 있을 기회를 더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우 네 윈의 마살라 시대에 언론에 발언을 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국내에 많은 언론들이 있고, 외국 언론기관에 재직하고 있는 당신들은 이 나라에 있는 타킨들(독립전쟁 참전용사들), 정치인들, 법률가들, 운동가들, 언론인들, 심지어는 농민들과도 매일 인터뷰를 하고 있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외국 주재 라디오들에서 발언하는 것은 권력을 남용하고 인권을 침해하는 지방 당국들에 대항하여 행동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입니다. ” 만달라이의 세인 윈 시의 동료 언론인들 가운데 한 사람은 이 특파원에게 말했다. “저는 당신들이 그들의 비행에 대한 새로운 소식들을 생방송한 후에 취해진 반대 운동의 증거들을 많이 보아 왔습니다. 이것은 좋은 징조이지요.” 라고 말했다.

그러나 군사정권에 대한 집요한 비판자인 랭군의 한 변호사는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렇습니다. 국민들은 이전의 어느 때보다 더 정부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도대체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저는 그 수가 500명에 불과하고 그들을 제외한 5천만의 국민은 군부를 두려워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말했다. 태국 치앙마이 주재 이라와디어 잡지의 편집자인 아웅 초 씨는 이 증가된 비판의 수준은 단지 군사 정권만을 향해서는 안 되고 민주화 운동그룹에도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태국 매솥에 망명 중인, 전 국회의원 당선자인 쿤 민트 씨는 자기비판의 결과들에 대해 염려한다.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과 우리들의 조직들에 대한 비판을 해야 하지만 그 비판은 건설적이야 합니다. 즉 우리에게는 규율이 있어야 하며, 우리들의 통합을 깨는 비판은 자제할 수 있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라고 말했다. 하지만 운동가였다가 정치 평론가로 변신한 아웅 네잉 우 씨는 반체제 진영에게는 강한 비판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반정부 진영의 오류는 방관하면서, 군사 정부의 오류들만 말합니다. 20년이 된 이 시점에서, 만약 민주화 운동이 1년, 3년, 20년 동안 성공적이질 못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면, 왜 성공하지 못했는지를 생각할 필요가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 학생운동 지도자인 그는 말했다.

분명히 많은 미얀마 사람들은 20년이나 지났는데 왜 우리는 승리를 쟁취하지 못했는가를 스스로에게 묻지 않고 있으며, ‘8888 민중봉기’ 시의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난 해 9월 사프런 혁명에서 다시 패할 수밖에 없었는지 자문하지 않고 있다. 문제제기가 부족했던 것이 아니고, 답을 도출해 내기가 더 어려울 뿐이다. 외부의 지원을 앉아서 기다려 온,  20년이 지난 지금 마지막 밀어 붙일 정밀하고도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전략을 발굴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분명해진 것은 많은 운동가들이 유엔 특사 감바리의 마지막 임무가 끝난 후, 유엔의 협상의 역할에 신뢰를 하지 않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들은 또한 아웅산 수지 여사가 추진해 온 20년 동안의 대화 요구에 대해서도 신뢰를 하지 않기 시작하였다.
“메타(협상)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무장 투쟁 역시 필요합니다.”라고 지난 9월 사프런 혁명에 참가했던 랭군의 한 불교 승려는 말했다. “우리는 담마를 의심하지 않으나, 담마보다는 이런 잔학한 군대 앞에서는 총알이 보다 유용합니다.” 이 승려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런 견해들에는 ‘8888 민중 봉기’에 참가했던 육군 대위 사이 윈 초 씨나, 전 총리였던 킨 누트 의 스파이 조직의 핵심인사이며, 전 워싱턴 주재 부대사인 아웅 린 투 소령 같은 전 군 장교들도 동의한다. “우리는 군인들의 사고방식을 잘 압니다. 그들은 대화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력을 무서워합니다.” 전 장교 한 사람이 말을 꺼냈다. “당신에게 강하고 잘 무장된 군대가 없는 한, SPDC는 당신을 어렵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타이-버마 국경지대의 반군 지도자 한 사람은 다르게 보고 있다. “ 그 어느 누구도 오늘날 무력 투쟁을 지원하지 않습니다.  비폭력 방식만이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무력 투쟁을 지원하는 기부자가 있다면, 알려 주십시오.” 그는 비꼬는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8888민중봉기’ 이후 창설된 <전버마민주학생전선>(ABSDF)을 포함하여 많은 무장 세력들 가운데, 작년 9월 사프런 혁명 시, 스님들을 지원하기 위해 기꺼이 나선 그룹은 하나도 없었다. “ 무장 투쟁은 쉬운 일이 아니지요.” 사상(死傷)을 당한, 1,000명 가까운 동지들의 이름들을 언급하면서, 그리고  또 다른 수천 명은 서유럽 국가들에서 정착하고 있다고 하면서, 그 반군 지도자는 말했다. 하지만 태국에 주재하고 있는 한 국방문제분석가는 숫자는 쟁점이 아니라고 말한다. 무장 집단들을 포함하여 많은 조직들이 기부자들의 수첩에 의존하고 있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그는 농담을 하였다. “하지만, 그 비용이 모든 망명자들을 돕는 사업 예산의 5%도 되지 않는다.”고 그는 추산을 한다.

 

왜 우리가 지난 20년 이후 우리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였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가 우리의 정책과 전술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변화가 필요한 것인가?


 

 
(테트 아웅 초는 8888 민중봉기에 참가한 학생들 가운데 한 사람이고, 전 학생반란군의 일원이었으며, 그는 지금 오슬로에 위치한 <버마 민주의 소리> 선임 기자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