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ine Welt/미얀마 이야기

미얀마인, 망명 생활 20년 '집은 먼 곳에'

행복나무 Glücksbaum 2008. 11. 5. 18:43

 

테트 아웅 초.


9월 19일 (DVB) 1988년 9월 19일 한 밤중이었다. 이날 미얀마/버마 남부 타보이에서  정부 군대가 총격을 가해 최소한 5명의 시위자들이 죽고 이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부상당하였다. 약 100명의 대학생들, 청년 남녀들이 이 킬링필드에서 도망 나와 , 다음의 할 일을 의논하기위해 타보이 강 건너 우리 마을로 왔다. 결국, 우리는 무장 투쟁을 시작하기 위해 지하운동을 하기로 합의하였다. “ 20일 이상은 걸리지 않을 것이야.” 우리가 무기를 들고 정부군에 대항하여 싸우기로 한 동쪽 밀림으로 향하기 전에,   타보이 지역 학생 연합 의장인 틴 레이가 자기 동료들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집 떠난 지 20일이 아니라 20년이 넘었다. 나의 인생은 24세의 대학생에서 반군 지도자로 그리고 지금은 망명자로 완전히 바뀌었다. 수십 명의 동지들이 이 전장에서 살해되었고, 틴 레이 등은 밀림 음모 사건의 희생자가 되었다. 지금까지 독자적인 조사를 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누가 무엇 때문에 틴 레이를 살해 했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ABSDF> 민타미에 캠프 201대대 소속, 전 학생이 기록한 짧은 보고서에 따르면, 틴 레이와 7명의 학생들은 스파이 게임에서 살해 되었고, 81명은 전장에서 살해되었다.

<ABSDF> 공식 웹사이트, www.absdf888.org,는 그 설명을 확인하였고, 총 992명의 학생들이 밀림 생활의 사상자들인데 그 중 344 명은 전투 중에 살해당하였으며, 254명은 질병 혹은 다른 사고로  사망하였다고 했다.

20년의 투쟁 후, 이들 992명의 순교자들 외에 수천 명 <ABSDF> 전사들  가운데 지금 몇 사람이나 살아 있는가? 당신은 타이-버마 국경지대에 수백 명의 전사들이 남아 있고 그 외 다른 수천 명은 북미, 유럽, 호주, 뉴질랜드 등의 서구에 이주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들은 아직도 민주주의, 그들로 하여금 1988년에 그들의 나라를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주요 명분을 위해 싸우고 있는가? 아니면 그들은 단지 자기들의 새로운 고향에서 자기들에게 주어진 광범위한 인권을 향유하고 있는 것인가?  북미에 이주한 나의 동료 한사람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이것은 우리들의 개인적인 권리이다. 너도 알듯이, 우리는  밀림의 낙엽 속에 파묻혀 우리의 인생을 보내며 10년 동안 적들과 싸워왔다. 이제는 나의 가족들을 위해 살 때이다.”라고 그는 말하였다.

“ 우리는 어느 곳에 있든지 우리의 투쟁을 계속하고 싶다.”고 유럽에 이주한 또 다른 동지는 나에게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법규들이 우리들의 정치적 활동들을 제약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약  주중에 정치 활동을 하게 되면 정부가 보조금을 삭감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주말에 밖에  활동을 할 수 없다.”고, 그는 슬픈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호주에 정착한 또 다른 동지는 정치적 활동 보다는 보다 상급의 교육을 받기로 되어있는 경영 대학원생이다. “ 너희들은 우리나라를  재건할 미래를 내어다 보기 보다는 단지 지금의 정치 문제들 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일단 군사 정권이 망하면 버마에게  필요한 것은 고등 교육일 것인데 우리 모두는 그것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고 그는 말했다.

많은 망명자들이 ‘8888민중봉기’ 시 학생들이었지만, 아주 극소수만이 교육을 더 받을 수가 있었다. 열 명이 안 되는 망명자들이  Ph.D를 획득하였고, 3십 명 정도가 석사 학위를 얻었고, 약 100명 정도가 학사 학위를 얻었다. 반면, 10,000 이상의 그 외의 망명자들은 매일매일의 삶에·파묻혀  교육을  더 받을 의지나 수단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하지만 위에서 인용한 세 사람을 포함한 많은  전 <ABSDF> 전사들은 아직도 그 정당한 명분에 동조하여 국경지대에서 싸우고 있는 자기들의 동지들과, 랭군의 활동가들이나 사이클론 나르기스 희생자들에게  성금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은 남는다. 이것이 망명가들에게 있어서 자기들의 나라에 민주주의를 가져다 줄 충분한 길인가? 이것이 그들이 20년 전에 꿈꾸었던 그 무엇이란 말인가? 그들은 이런 작은 규모의 활동들이 네이피도에 있는 군사 정권에 압력을 가하여 버마의 현 상황에 변화를 가져 올 수 있게 한다고 믿고 있는가?
아니다, 어느 누구도 이것이 버마의 변화를 가져 올 길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별로 많은 선택이 없다. 만약  20년 이상의 과거를 돌아 다 보면, 당신은 또 다른 두 세대의 망명자들이 이곳저곳에 숨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1970년대 전 총리 우 누가 이끌었던 <인민 애국당>(PPP)의 당원들이 지금은 망명하여 태국, 인도, 서구에 정착하고 있다. 한편, <버마공산당> 당원들 수백 명은 현재는 중국에 이주해 있다. 작년 9월 사프런 혁명 이후에 망명한 자들은 태국이나 서구에 망명한  최근 세대의 망명자들이다.

망명자들과 버마 정치에서의 그들의 역할에 대한 논의를 끝마치기 위해, 나는 버마 내의 지도적인 정치인들 간에 존재하는 두 가지 견해들을 인용하겠다.
“우리들은 같은 투쟁을 하고 있지만 다른 전술적인 위치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희생과 혁명에의 동참을 인정합니다. 우리 자신은 망명할 생각이 전혀 없지만,  해외에서의 그들의 활동들을 높이 평가합니다.”라고 지난 9월 사프런 혁명 시 두드러진 역할을 하다가 현재 감옥에 수감 중인 <88세대 학생 그룹>의 지도적 인물인 코 코 기 씨는 말했다.

그러나 고 네 윈 장군의 사회주의 정권 시 부총리를 역임하였고, 현재는 아웅산 수지의 <NLD>의 지도적 당원인 퇴역 대령, 우 루윈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당신들, 망명해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할 일을 하기 보다는 서로를 비난하고, 우리를 비난하고, 모든 사람들을 비난하기만 한다. 만약 당신들이 군사정부와 싸울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이곳으로 돌아오라. 수천 마일 떨어져 있는 곳에서 비판만을 일삼지 말라. 그렇게 되면 당신들은 매일 이곳에서 우리가 당하고 있는 진짜 정치적 상황을 이해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