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i-Di/하느님 뜻 받들기

달라진 야곱처럼

행복나무 Glücksbaum 2009. 9. 19. 11:44

 
 
창세기 32:22-32,  마태복음 13:44-52
 
창세기가 모두 50장인데, 그 가운데 야곱의 이야기가 절반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야곱의 위치가 그만큼 중요합니다. '주식을 알면 돈이 보인다.'는 말이 있는데, '야곱을 알면 인생과 신앙이 보인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야곱은 '특별한 인간'이라기보다는 '보통 인간'입니다. 보통 사람인데 좀 억척스런 인간입니다. 야곱은 사느냐 죽느냐 하는 서바이벌게임(survival game) 현장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자 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장자권 탈취를 위해 아버지를 속이고, 형 에서를 속인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하여 20여 년을 머슴살이를 했습니다. 그는 객지에서 고생을 하면서도 한결같이 '귀향'을 꿈꾸었습니다. 마침내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지난 날 에서와의 원수관계가 그의 귀향길을 가로막았습니다.
어떻게든 불편한 관계를 풀어야 했습니다. 야곱은 벼라 별 궁리를 다 짜냅니다. 그럼에도 해답을 얻지 못한 야곱은 얍복 강가에 홀로 남습니다. 예전처럼 어려울 때 도와줄 어머니도 없습니다. 몸을 의탁했던 외삼촌도 없고, 아내들도 없습니다. 오직 홀로 자신이 지은 죄와, 형과의 불편한 관계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본문은 야곱이 밤새도록 하느님의 사자와 씨름했다고 합니다. 주석가들은 천사가 과연 누구인지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을 내놓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천사를 제3의 존재라기보다, 야곱 자신의 내적인 존재, 죄로 인해 분열과 갈등을 일으키는 자기 안의 존재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그는 환도 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사투를 벌입니다. 지난날 죄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립니다. 마침내 그는 천사를 이기는 자가 됩니다. 자기 안의 죄를 이기는 자가 됩니다. '간사한 자', '움켜쥐는 자'인 야곱은 '이스라엘' 곧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뜻을 지닌 새로운 존재로 거듭납니다.
 
본문은 이 장면을 감격스럽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환도 뼈로 인하여 절었더라."(창32:31).
브니엘의 아침 햇살을 받으며 걸어가는 야곱, 부도덕한 인간에게 내린 하느님의 은총의 햇살이 야곱의 얼굴을 비추고 있습니다. 비록 절룩거리기는 했지만, 그의 영혼은 세상에 대한 의심과 두려움이 사라지고, 평화만이 깃들고 있습니다. 에서(세상)가 달라진 것이 아닙니다. 야곱이 달라졌습니다. 야곱이라는 분열된 인간이 치유된 것입니다.
그곳을 "브니엘"이라고 명명한 것은, 인간이 감히 하느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것이요, 하느님만을 사모했다는 것이요, 하느님만을 바랐다는 것입니다. 대신 인간으로서 감히 하느님과 겨룬 대가로 인해 환도 뼈가 어그러지고, 한 쪽 발을 저는 자가 된 것입니다.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엡3:14-15) 이렇게 시작하는 바울의 기도는, 마치 얍복 강가에 홀로 남아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을 연상케 합니다. 바울은 분열된 세계의 치유자로 오신 주님께 매달려 기도하고 있습니다.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브니엘의 아침 햇살을 받으며 걸어가는 야곱처럼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지식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그리스도인은 치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들려주신 '하느님나라 비유'는 우리가 무엇을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마치 밭에 감추어 둔 보화를 얻기 위해 가진 것 모두를 판 농부처럼,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하느님을 보화처럼 여겨야 합니다.
 
하느님의 충만은 세상의 재물이나 명예나 권력으로 얻어지지 않습니다. 화평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느님께서 성령으로 부어 주시는 은총의 선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