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i-Di/하느님 뜻 받들기

"눈물의 찬송을 불러 본 자만이 이 기쁨을 알 수 있습니다."

행복나무 Glücksbaum 2009. 7. 4. 12:06

 

 

시편 137,  1- 6
찬송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느 때 미치도록 찬송을 부르고 싶을 때가 있고, 또 기도도 힘차게 드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어느 깊은 산골짜기에 들어가 목 놓아 울고도 싶습니다. 찬송과 기도는 우리 마음속의 회한을 불러 일으켜 새로운 감흥과 용기와 힘을 불어넣어주기에 넉넉하기 하기 때문입니다.
 
성서를 들여다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강변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노래를 불렀고, 36년 일제의 압박 속에서 우리 민족이 나라 잃고 외국 땅에 나가 나그네처럼 살아가며 만주 벌판 해란 강가에서 ‘선구자’를 눈물의 노래로 불렀던 것을 생각해 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다가 베데스다 못 가에서 고통 받고 있는 군상들과 만났습니다. 많은 병자와 맹인과 절름발이와 손이 마른 사람들이 즐비하게 누어있었습니다.
그 중에 예수님은 38년 동안 기거 불능한 중풍병자에게 “네가 고침 받기를 원하느냐? 하셨을 때에 ”글쎄 물이 움직일 때 저를 못 안으로 들어가게 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있는 불행한 한 인간의 절규를 듣습니다.(요한 5,1절 이하)
 
“부축해 주는 친구가 없어서,
같이 있어줄 친구가 없어서,
물이 움직일 때 넣어줄 사람이 없어서,
 
외로움과 고독을 한 마디로 표현하는 중풍병자의 회한의 답변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고독한 노인에게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고독이란 참으로 무서운 병입니다. 육체적 병보다 더 심한 것이 마음과 정신의 외로움입니다. 자신의 무기력에 대한 통증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찬송은 외로운 자의 것입니다. 쓸쓸하고 인간의 한계로 위기에 처한 사람들에게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찬송은 병상 침대 위에 누어서 불러야 그 묘미가 있습니다.
다윗은 범죄의 참회 속에 마음의 깊은 곳으로부터 드러나는 고통을 하느님께 호소합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찬송을 하느님께 돌립니다. 야훼 하느님만이 참 목자요, 감당할 수 없는 어두운 인생의 어려움을 읊는 그의 노래 속에는 인생의 회한이 있고, 그 회한의 소리를 들으시는 분은 목자이신 야훼 하느님이십니다. 따뜻한 말 한 마디 사랑의 음성으로 가까이 다가가시는 분이 참으로 다윗의 목자 되신 야훼 하느님이십니다. 이와 같이 우리 모두가 죄의 고통 속에서 무력한 자신을 깨달으며 부르는 찬송과 기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전영택 목사님은 찬송 317장을 통해 그 마음속의 애틋함을 노래합니다.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
지은 죄가 아무리 무겁고 크기로,
주 못 담당하고 몸 받으시리요,
주님의 가슴은 하늘보다 넓고 넓어,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
우리 주는 날마다 기다리신 다오,
밤마다 문 열어 놓고 마음 조리시며,
나간 자식 돌아오기만 밤새 기다리신 다오,
 
그러나 3절을 보면 더욱 절실한 죄로 물든 죄인의 몸부림이 있습니다.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
채찍 맞아 아파도 주님의 손으로,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우리의 인생고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왜, 가슴이 아프다고 울고만 있습니까?
왜, 돌아오기만 기다리고 울고만 있습니까?
왜, 잘못했다고 자책만 하고 있습니까?
왜, 죄 많은 인간으로 절규만 하고 있습니까?
우리 주님, 예수님을 통해서 이 모든 죄를 사해주시고
용서함을 베푸시는 하느님 앞에서 눈물이 웬 말입니까?
 
초대교회 주님을 따르는 신자들은 사자가 우글거리는 경기장과 노상의 광장에 끌려 나가 짐승의 노리개가 되어도 노래를 부르고, 불타는 화염 속에서 죽임을 당하면서도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러한 힘이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이것을 구경하던 많은 사람들은 기절할 정도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고 역사가들은 기록하며, 죽음 앞에서 초연했던 모습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드렸습니까? 그들은 모두 충격으로 받아드렸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137편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여러 강변에서 시온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했습니다. 이방 사람들이 청하는 노리개가 되어 시온의 노래를 불러야만 했다고 했습니다.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3-4)
 
6. 25 동란 중 공산주의 치하에서 많은 성도들이 ‘종교는 아편’이라는 공산주의의 사설로 참으로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면서 주일날이면 몰래 모여 예배를 드릴 때가 있었습니다. 인민군에게 들킬까 마음 조리며 찬송 소리가 들릴까 조그마한 음성으로 찬송가 가사를 읽으며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외로울 때, 그리고 슬픈 때, 또한 죽음을 직면한 자리에서도 찬송을 부를 수 있는 신앙의 자유가 주어져 있습니다. 일터에서, 가정에서, 길을 걸을 때고, 누워 있을 때고 마음대로 찬송을 부를 좋은 여건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지도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하느님의 구원의 넓은 뜻을 생각하며 기도할 수도 있고 찬송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들은 찬송가를 마음 놓고 부를 수 있는 자유와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는 힘을 다해 찬송을 부를 수 있는 신앙의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줄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난 날, 한없이 나를 두둔하며 자만에 빠져있던 나, 그것이 얼마나 주님 앞에 교만한 나였던지 다시 돌아보며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의 자유,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축복인지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주께서 나의 인생의 주님이신 것을 고백하며 한없이 반역하고 무용지물의 위선자로 살아왔던 지난날들을 돌이켜 회개하며 하느님께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허물을 덮으시는 분이시며 우리의 잘못까지라도 용서해주시고 앞으로도 허물이 있을 때마다 용서하시고 사랑으로 감싸주시는 은총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시온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이스라엘의 포로 민들의 절규는 오늘의 사는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벨론 강변에서의 눈물의 찬송이 그들의 지난날의 민족적, 역사적 죄를 고백하고 하느님의 뜻에서 벗어난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며 시온에로의 회복을 간구합니다. 마침내 그들의 기도와 찬송은 이루어져 시온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는 축복의 날을 야훼 하느님께서는 마련해주십니다.
 
눈물의 찬송을 불러봅시다. 눈물의 빵을 먹어본 자만이 인생을 논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눈물의 기도를 드려 본 자만이 하느님의 도우시는 은혜가 축복인줄 압니다.
 
눈물의 간구가 응답 받는 날, 그때에 주님께서는 우리의 깨진 상처를 싸매 주시고, 힘없는 두 무릎에 새 힘을 주시며, 승리의 그 날이 가까이 다가옴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76-06]
 
 
 
기도: 은혜의 하느님, 나의 노래를 받으시고 나의 상처를 매만지시고 나의 간구를 들어 응답하소서. 내 안에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우리 안에 충만한 소망으로 가득 차게 하소서. 승리의 그 날을 고대하며 야훼 하느님만을 앙망하게 도와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 . Juni 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