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랑쉬 오름은 제주 오름의 여왕이라 불릴 정도로
오름 주변 풍광이 빼어나다.
한라산, 우도, 성산 일출봉이 한 눈에 들어오는
제주 동부 오름의 최고 명소.
다랑쉬 오름(月郞峰), 다랑쉬 마을
다랑쉬 오름, 제주 오름의 여왕이라 불리는 다랑쉬 오름. 그 빼어난 자태와 깔때기 형태의 분화구, 오름 정상에서의 주변 조망이 훌륭하여 오름 답사의 1번지로 각광받는 곳이며, 최근에는 매년 1월 1일 해돋이를 보러 오는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기도 하다. 이 다랑쉬 오름과 주변은 넓은 초원과 제주 중산간지대의 특성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으며, 또한 패러글라이딩 장소로도 애용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눈이 피곤하지 않는 자연의 실루엣과 그 곡선에는 반세기 전의 비극이 숨겨져 있다.
다랑쉬 마을, 이 주변은 4.3 때 무장대의 요충지였다. 무장대들은 다랑쉬 오름 정상에서 군경토벌대의 활동을 감시하기도 했고, 봉화를 올려 신호를 보내기도 했다. 다랑쉬 오름 주변의 늙은 팽나무와 10여 곳의 대나무 숲, 집터, 우물터 그리고 깨진 그릇 조각들은 이곳에 마을이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60년 전까지만 해도 오름 기슭의 이 평화로운 마을에서는 20여 가구의 주민들이 목축과 밭벼, 메밀 등의 농사를 지으며 오순도순 모여 살았다. 그러나 이 다랑쉬 마을은 4.3이 일어난 1948년 겨울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으로 완전히 폐촌이 돼 버렸다.
다랑쉬 굴, 팽나무가 서 있는 곳에서 300m 정도 동쪽으로 난 길을 들어가면 시멘트로 입구를 막아버린 동굴이 보인다. 지난 1992년 이 작은 동굴에서 4.3 당시 희생된 11명의 유골이 발견돼 큰 충격을 줬다.
이곳은 그 이후 ‘다랑쉬 굴’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4.3 현장을 그대로 전달해 주는 유적지로, 이제 4.3에 관심 있는 제주도민은 물론 다른 지방의 순례 객들도 한번은 들리는 장소가 됐다. 1948년 12월18일, 이 굴에 숨어 있던 9살 철부지부터 50대 아주머니까지 민간인 11명이 초토화 작전을 벌이던 제9연대 2대대가 피워놓은 연기에 학살되었다. 광란의 시대는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까지도 이념의 추종자로 몰아세웠다. 당시 토벌작전에 따라 나섰던 한 증언자는 “굴 입구가 양쪽에 나 있는데 토벌대가 처음에는 입구에 수류탄을 던졌고 그래도 사람들이 나오지 않자 잡초로 불을 지핀 뒤 구멍에 밀어 넣어 질식하게 만들었다”고 증언했다. 또 당시 무장대의 한 사람으로 시신을 직접 정돈하고 이들의 이름을 일일이 기억하고 있던 한 주민은 “면 당부의 지시를 받아 시신을 정돈하려고 굴 안에 들어가 보니 돌 구석, 땅 속에 코를 파묻고 죽어 있었다.”며 당시의 참혹했던 현장 모습을 증언했다.
발견 당시 이 굴의 입구는 직경 60~70㎝로 좁고 낮아 한 사람이 겨우 엎드려서 들어갈 수 있었다. 굴 안에는 유골과 함께 물 허벅, 그릇, 비녀, 허리띠, 고무신, 횃불 통, 무쇠 솥, 놋수저와 그릇 등이 뒹굴고 있었고, 천장에는 죽은 이들의 눈물인 듯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44년이 지나서 발견된 이들의 주검은 그러나 평온한 안식처를 구하지 못하고 화장돼 바다에 뿌려졌다. 행정기관과 정보기관이 반강제적으로 일부 유족들을 회유했던 것이다. 이 주검들이 한 줌 재로 바다에 뿌려지던 날, 하늘도 산 자의 무례함을 원망하듯 추적추적 비를 뿌렸고, 유족들은 서럽도록 울었다.
한편, 북제주군 구좌읍 종달리에는 다랑쉬 굴의 희생자 비석이 하나 서 있다. 유족들은 이 비석에 “1948년 음력 11월18일 4.3 사건 당시 군경민합동진압작전에 의해 사망했다”며 그간의 경위를 짧게 적어놓았다. 유족들은 “희생자 유골을 바다에 뿌렸지만 조상을 땅에 묻어 모시지 못한 게 안타까워 위령비를 세웠다”고 한스러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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