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ine Welt/한국 이야기

1974년 사회적 분위기 [글, 이해학]

행복나무 Glücksbaum 2022. 11. 14. 14:49

1974년 말, 박정희 정권은 장준하의 헌법개정 백만인서명 등 흉흉한 사회분위기 수습책으로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 2호 발표하였다.

유신악법개정하자고 주장 서명 등을 15년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쿠데타 벼락통치법이 그것이었다.
당시 박형규 목사와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 실무자 회의에서 더 이상 빈민조직과 의식화운동을 전개할 수없기에 독재정권과 투쟁하기로 방향선회를 결정하였다.

나는 회의 결정에 따라 주변에서 뜻을 같이 할 목사들을 모아 18일 성직자 긴급조치반대 집회를 NCCK 김관석 총무 방에서 가졌다. 외신기자 만이 참석하였다. 우리는 곧 남산 중앙정보부로 실려가 고문에 시달렸다.

그 당시 헌법개정청원 서명운동으로 작년 장준하, 백기완 두분이 사전구속되어 서명에 대한 소급적용 상태에 있었고,우리 모두는 재판에서 15년 징역형을 받고 안양교도소로 이감되었다.
그때 나는 백기완 선생과 같은 방에서 잠시나마 함께 있었다.

백기완 선생이 안양교도소에서 옥고를 차루었을 때 같이 옥고를 치루는 학생들에게 고백적으로 한 이야기가 있다
“나는 장준하를 가까운 거리에서
뫼시고 다니기에
어깨가 으슥했다.
어느날 산정호수에 간적이있는데 그 정경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나도 모르게 "형님 여기다 별장을 근사하게 지어서 형님뫼시고 살고싶습니다." 하였는데
장 선생은 "그래, 그러면 누가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며,
이 분단시대를 끝장내고 우리민족을 누가 통일 시키노."
그때 깨달았다고 한다. 아, 역시 나는 가짜구나.
“내가 바르게 사는 길은 장준하를 따라야 겠구나." 해서
”내가 깡패질 하다가 통일 꾼으로 전환한 것이 아이가. 알간?“

안양교도소 2동-상에서 학생들과 함께 있을 때 백기완은 기백이 넘쳤다.

다소 움추리고 소심한 학생들에게 큰소리를 쳤다.
“야, 이 제국주의 똘마니들아 넥타이가 뭐야?. <목댕기> 좋은 우리말을 두고 왜 하필 서양놈들 찌꺼기를 쓰고있어. ” 하며 혼내키곤 하였다.

목사들한테는 "거 목사님들 속차리시라우. 역사의식이 있어야지. 남산야외음악당에서 겨우 뿌린 삐라 내용이 <윤필용을 위해 기도합시다> 윤필용이 하느님 두째 아들인가? 한심해요." 당시 꽉 막힌 독재체제에서 목사들도 윤필용이 내부 자중지란으로 비밀리에 구속이 되어 있기에 독재체제의 균열의 조짐으로 알려 숨통막힌 세상에 일말의 희망을 갖고자 한것이 사실이기에 목사들은 아무 말도 못하는 형편이었다.

출소후에도 그나마 백 선생께 대들고 따진 것은 나였는데 마지막까지 조율되지 못한 것이 김재규 장군 문제였다.
백 선생은 김재규는 미국의 사주를 받아 박정희 청산을 하고 팽당했다는 입장이고, 나는 김재규 장군은 장준하와 약속 이행이었다는 입장이다.


글, 이해학


[11. Dezember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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