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코니아는 그리스도교 교회의 직무다. 성사라하여 예바당안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다,
디아코니아는 교회에 속한 “모든 사의 직무”이다. 직무란 그리스어로 디아코니아다. 반드시 마땅히 해야할 일을 우리 말로 직무라 한다. 그리스도교에서 신앙하는 신 야훼는 디아코니아적 신이다. 군림하고 지배하고 통제하는 신이 아니라 정반대다. 약자 이웃을 섬기고 시중드는 신이다. 사람이 그런 신에 반하는 반신적 행위가 역사에 돌출한다. 현재 우리가 그러하다. 굥 정권이 그러하다. 하느님께 반기를 든 정권이다.
오백년전 가톨릭과 결별하여 나온 신교의 핵심명제는 “모든 신도의 보편 사제직”이다. <참믿음>으로 새로워진 사람들은 하느님앞에 “서로 사제”의 존재가 된다. 성직자나 평신도의 계급이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 ‘신교의 정신’이다. 이는 디아코니아 교회의 기초다. 이런 이해에 기초한 사람들의 교회 공동체는 황홀한 신비적 공동체를 형성한다. 그 안에 활동하는 은사(카리스마)가 활발히 춤을 춘다. 그런 측면에서 디아코니아 전문가 주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나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디아코니아 실천에 있어 이론을 무시하는 경향(딜레탕티즘, Dilettantismus)은 비판받아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실천을 강조하며 행동주의의 오류에 빠진다. 하지만 이론없이 실천 없다. 그리고 좋은 이론은 좋은 실천으로 이어진다. 프랑스 혁명이후 지배층의 헤게모니 전환이 가져온 결론은 허탈한 황무지였다.
한국의 지난 1987년 6월항쟁 결과 이제까지 진행된 결과 더 괴이한 괴물정권이 나라 전체를 카오스로 만든 지난 일년이 같은 꼴이다.
이제 우리는 역사에서 배운다. 프랑스나 유럽에서 당시 각성운동으로 나온 로만티스무스, 낭만주의는 “교육 혹은 문화의 새판” 형성이 없이는 더 나은 세상이 올 수 없다는 자각이다.
우리가 자신의 깊은 성찰의 바다로 가야할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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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새로운 출발, 그 과정에 몸을 다시 던진다. 중요한 것은 신비한 사건들 속에 늘 함께 하고 계신 그분의 현존을 감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글, 홍주민
[26. Juni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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