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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은 국가 (나라)와 국민에게 충성을 다해야 한다” [대한민국 헌법]

행복나무 Glücksbaum 2025. 2. 6. 16:37

"대한민국 헌법 ‘군인은 국가와 국민에게 충성을 다해야 한다“


오늘 6일 헌법재판소, 윤석열 대통령직 탄핵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곽종근 전 육군 특수전 사령관은 이렇게 말했다.

“12월4일 0시30분 윤 대통령이 직접 제 비화폰으로 전화를 걸어 ‘아직 국회 내 의결정족수가 안 채워진 것 같다’, ‘국회 안에 빨리 들어가서 의사당 안의 사람들을 빨리 데리고 나와라’ 이런 지시를 하였다”


국회 쪽 대리인이 “당시 (윤 대통령이) 증인에게 데리고 나오라고 지시한 대상이 국회의원이 맞는가”라고 묻자, 곽 전 사령관은 “정확히 맞는다”고 했다.

이어 “당시 707특임단 인원이 국회 본관에 가서 정문 앞에서 대치 상황이었고, 본관 건물 안 쪽으로 들어가지 않은 상태였다. 그 상태로 (제가) 전화를 받았기 때문에 (윤 대통령이) ‘의결정족수 문제’, ‘안에 인원 끌어내라’는 부분은 당시 본회의장 안에 군 작전요원이 없는 상태이니 당연히 국회의원이다”고 말했다.

____________

헌재의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영상을 돌려보다, 곽종근 전 특수전사령관의 증언에서 계속 마음이 멈춘다. 특전사 부대원들을 국회에 진입시킨 그의 행동은 분명 모자람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달리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그가 그날 밤 했던 행동이 없었다면 이 친위쿠데타를 막아낼 수 있었을까.

물론 윤 대통령의 친위쿠데타를 막은 건 국회에 신속하게 모여 계엄해제 의결을 한 국회의원들이었다. 또 그날 밤 국회로 모여들어 국회를 지키고, 주말마다 탄핵과 구속을 외치며 광장을 지킨 시민들이었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곽종근도 그 쿠데타가 실패하도록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첫째, 태업이다. 그는 비상계엄 이틀 전 국회와 선관위를 즉시 장악할 준비를 하라는 사전 지시를 김용현 장관에게서 받았으나 적극적으로 이행하지 않았다.
둘째, 지시 불이행이다. 국회 본회의장에 의원들이 계엄해제를 위해 모이고 있던 시점, 문을 부수고라도 들어가서 인원들을 끌어내라는 지시를 윤석열 대통령에게서 받았으나 이행하지 않았다.

하나씩 짚어 보자.

첫째, 태업.
곽종근은 12월 1일 일요일 김용현 국방부 장관으로부터 비화폰으로 비상계엄 관련 지시를 받았다. 이전부터 계속 암시하던 계엄 선포의 구체적 계획을 직접 알리고 지시한 것이다. 며칠 안에 특단의 조치(계엄선포)가 있을 것이며, 이때 국회 선관위 민주당사 여론조사 꽃 등을 특전사가 확보해야 한다는 지시를 받았다. 2일에는 윤석열 대통령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며칠 안에 잘 되고 나서 보자’는 이야기를 들었다.
머리속이 하얘졌다. 합당하지 않았지만 거부할 수도 없었다. 예하부대에 이 지시를 전달하지는 못했다. 직속 부하인 김현태 707특임단장에게는 나중에 ‘그 특단의 발표가 없기만을 기도했다’고 말했다.
사전 준비를 지시하지 않았으므로 특전사에 헬기를 미리 가져다 두지 않았다. 이로 인해 계엄 당일인 12월 3일 특전사의 출동이 1시간 이상 늦어졌다. 특전사는 계엄 선포 뒤 1시간 넘게 지난 11시 40분경에야 국회에 착륙해 병력을 진입시켰다.
곽종근은 사령부에서 화면을 보면서 지휘했고, 김현태 707특임단장은 헬기를 타고 현장에 투입됐다.
헬기가 이동 중이던 11시 30분에 윤석열 대통령이 곽종근에게 전화했다. 긴장한 상태에서 전화를 받은 곽종근에게 윤석열 대통령은 ‘어디냐’고 물었다. 곽종근은 ‘지휘통제실에 있으며 헬기가 이동 중’이라고 답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이 시점에 전화한 이유는 뭘까.
그날 11시 30분을 되돌아 보자. 계획이 늦어지고 있었다. 밤 10시에 KBS에 계엄선포 생방송을 잡아두었으나 국무위원들과 이야기하다 10시 28분에야 시작할 수 있었다. 황당한 반민주적 내용의 포고령 1호에 적혀 있던 발령 시각은 10시였으나 나중에 11시로 고쳐졌다. 박안수 계엄사령관 임명 시점은 11시 25분이 됐고, 늦춘 포고령 1호 발표는 더 늦어져서 11시27분에 공개됐다.
윤석열 대통령은 시간이 늦어져서 초조해지기 시작했던 것은 아닐까. ‘포고령이 반포되었으니 이제 정치활동이 금지되었고 국회에 진입해 의원들을 끌어내도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특전사가 어디까지 진입해 있는지를 확인하려 곽종근에게 전화한 게 아닐까. 군이 생각보다 늦게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윤 대통령의 ‘격노’가 시작된 시점이 아니었을까. 추측이지만 그리 틀리지는 않을 것 같다.

만약 헬기가 미리 준비되어 있었고, 윤석열과 김용현의 애초 생각대로 비상계엄 선포와 동시에 특전사가 국회를 봉쇄했다면 사태는 어떻게 진전되었을까.  처음 계획대로였다면 특전사가 실탄 5만여발과 케이블타이 등을 가지고 10시 30분경에는 국회에 도착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원식 국회의장과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국회 담을 넘은 시각은 11시 경이다.
국회의 계엄 해제 의결이 무산되었을 수도 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둘째, 지시 불이행.
곽종근은 당일 밤 12시 30분 윤석열 대통령으로부터 두 번째 전화를 받았다. 이 통화에서 윤 대통령은 “의결 정족수가 채워지지 않은 것 같다. 문을 부수고라도 내부에 있는 인원을 끌어내라”고 말했다. 김용현 전 장관이 이미 이전 전화에서 ‘707 특임단 병력을 추가 투입해라’ ‘국회의원이 150명이 되지 않게 막아라’ 따위의 이야기를 계속 이야기한 뒤였다.
하필 예하부대 지휘관들과의 화상회의를 켜둔 상태였고, 부관도 같이 전화를 들을 수 있는 거리에 있는 상태였다. 부대원들 일부가 대통령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다시 머릿속이 하얘진 곽종근은 국회 현장에 있는 김현태 단장에게 전화했다. 다만 대통령의 말을 그대로 전하지는 못했다.
‘혹시 테이저건이나 공포탄을 쏴서라도 진입할 수 있을까?’
김현태는 즉답했다. ‘안 됩니다. 사고 납니다.’ 곽종근도 바로 결론을 내렸다. ‘그래 그럼 그건 하지 마.’
그럼에도 특전사 부대원들은 12시 39분에 국회 본청 유리창을 깨고 진입했다. 하지만 당시 화면에 나타난 모습은 의아했다. 특전사 부대원들이 너무 조심스러워 보였다. 아마도 대통령의 지시는 명확했으나, 사령관인 곽종근의 지시는 불명확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12시 35분에 의장석에 착석했다. 그 시점 또는 얼마 뒤 의결정족수인 과반수 이상의 국회의원이 모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안건이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라 의원들은 본회의장 안에서 계속 기다렸다. 시민들도 마음 졸이며 기다렸다. 그 시점 본청 유리창은 깨졌다. 새벽 1시 2분이 되어서야 계엄 해제안 가결이 선포됐다.
곽종근이 윤 대통령의 지시를 그대로 전달해, 부대원들이 문을 부수고 본회의장에 진입하게 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그 과정에서 유혈사태가 일어났다면?
국회의원 다수를 포고령 위반으로 체포하고 이들의 범죄를 일방적으로 발표했다면?
계엄이 사후에 정당화되었을 수도 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잠시 곽종근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윤석열의 쿠데타가 성공했다면 그는 고위직 공무원으로 편안한 여생을 보장받았을지 모른다.

12.12 군사반란에서 전두환 편에 선 군인들은 정권 실세와 국회의원과 장관을 지내며 재산까지 모으면서 떵떵거리며 살았다. 노태우가 그랬고 허삼수가 그랬고 정호용이 그랬다.

윤석열의 쿠데타가 실패한 지금 그는 내란 혐의로 구속 기소된 상태다.
군 생활은 끝났고, 연금도 사라질 것이다. 여생은 가난하고 비참해질 것이다. 그날 밤 그 순간 이미 예상할 수 있던 현실이었다.
계엄의 밤, 그는 윤석열의 쿠데타가 성공해야 본인의 인생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대한민국과는 다른 이해관계를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태업과 지시 불이행으로 쿠데타 성공 가능성을 낮췄다.
국회와 헌법재판소에서 당시 상황을 기억에 따라 솔직하게 증언한 결과, 윤석열로부터 ‘곽종근의 탄핵공작’이라는 좌표 찍기를 당했다. 그는 지금 극우 유튜브와 태극기부대의 표적이 되어 온갖 모욕을 뒤집어 쓰고 있다.

물론 곽종근이 처음부터 부대를 출동시키지 않았다면 더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의 군인이 민주적으로 선출된 통수권자의 명령을 거부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외부자들은 위헌 불법 명령을 거부해야 한다고 쉽게 이야기하지만, 우리의 민주주의는 무엇이 위헌인지 불법인지를 가리는 주체도 민주적으로 선출된 권력에게 최종적으로 주어져야 한다고 말하는 체제다.
군인 개인이 현장에서 이를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다. 제도적 보완책이 필요한 대목이다.
게다가 선인과 악인은 잘못된 결정 한 번으로 나뉘지 않는다. 사람은 늘 잘못된 결정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뒤 어떻게 행동하느냐다.
한 번 잘못했을 때, 그 잘못을 업고 더 큰 악을 저지르고 더 큰 거짓으로 그 악까지 덮으려고 노력하며 더 나아가 권력과 폭력으로 그 악을 파헤치는 이들을 제압하려 하는 이들이 악인이다.
그 사례를 우리는 친위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직무정지된 현직 대통령, 윤석열에게서 보고 있다.
한 번 잘못했을 때, 그 잘못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다시 잘못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이들이 있다. 어떤 개인적 이익도 얻지 못하더라도 그리 행동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이 선인이다. 그 사례를 우리는 태업과 지시불이행으로 친위쿠데타가 실패하게 했던 친위대의 사령관, 곽종근에게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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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재의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영상을 돌려보다, 곽종근 전 특수전사령관의 증언에서 계속 마음이 멈춘다. 특전사 부대원들을 국회에 진입시킨 그의 행동은 분명 모자람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달리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그가 그날 밤 했던 행동이 없었다면 이 친위쿠데타를 막아낼 수 있었을까.

물론 윤 대통령의 친위쿠데타를 막은 건 국회에 신속하게 모여 계엄해제 의결을 한 국회의원들이었다. 또한 그날 밤 국회로 모여들어 국회를 지키고, 주말마다 탄핵과 구속을 외치며 광장을 지킨 시민들이었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곽종근도 그 쿠데타가 실패하도록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첫째, 태업이다. 그는 비상계엄 이틀 전 국회와 선관위를 즉시 장악할 준비를 하라는 사전 지시를 김용현 장관에게서 받았으나 적극적으로 이행하지 않았다.
둘째, 지시 불이행이다. 국회 본회의장에 의원들이 계엄해제를 위해 모이고 있던 시점, 문을 부수고라도 들어가서 인원들을 끌어내라는 지시를 윤석열 대통령에게서 받았으나 이행하지 않았다.

하나씩 짚어 보자.

첫째, 태업.
곽종근은 12월 1일 일요일 김용현 국방부 장관으로부터 비화폰으로 비상계엄 관련 지시를 받았다. 이전부터 계속 암시하던 계엄 선포의 구체적 계획을 직접 알리고 지시한 것이다. 며칠 안에 특단의 조치(계엄선포)가 있을 것이며, 이때 국회 선관위 민주당사 여론조사 꽃 등을 특전사가 확보해야 한다는 지시를 받았다.
2일에는 윤석열 대통령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며칠 안에 잘 되고 나서 보자’는 이야기를 들었다.
머리속이 하얘졌다. 합당하지 않았지만 거부할 수도 없었다. 예하부대에 이 지시를 전달하지는 못했다. 직속 부하인 김현태 707특임단장에게는 나중에 ‘그 특단의 발표가 없기만을 기도했다’고 말했다.
사전 준비를 지시하지 않았으므로 특전사에 헬기를 미리 가져다 두지 않았다. 이로 인해 계엄 당일인 12월 3일 특전사의 출동이 1시간 이상 늦어졌다. 특전사는 계엄 선포 뒤 1시간 넘게 지난 11시 40분경에야 국회에 착륙해 병력을 진입시켰다.
곽종근은 사령부에서 화면을 보면서 지휘했고, 김현태 707특임단장은 헬기를 타고 현장에 투입됐다.
헬기가 이동 중이던 11시 30분에 윤석열 대통령이 곽종근에게 전화했다. 긴장한 상태에서 전화를 받은 곽종근에게 윤석열 대통령은 ‘어디냐’고 물었다. 곽종근은 ‘지휘통제실에 있으며 헬기가 이동 중’이라고 답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이 시점에 전화한 이유는 뭘까.
그날 11시 30분을 되돌아 보자. 계획이 늦어지고 있었다. 밤 10시에 KBS에 계엄선포 생방송을 잡아두었으나 국무위원들과 이야기하다 10시 28분에야 시작할 수 있었다. 황당한 반민주적 내용의 포고령 1호에 적혀 있던 발령 시각은 10시였으나 나중에 11시로 고쳐졌다. 박안수 계엄사령관 임명 시점은 11시 25분이 됐고, 늦춘 포고령 1호 발표는 더 늦어져서 11시27분에 공개됐다.
윤석열 대통령은 시간이 늦어져서 초조해지기 시작했던 것은 아닐까. ‘포고령이 반포되었으니 이제 정치활동이 금지되었고 국회에 진입해 의원들을 끌어내도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특전사가 어디까지 진입해 있는지를 확인하려 곽종근에게 전화한 게 아닐까.
군이 생각보다 늦게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윤 대통령의 ‘격노’가 시작된 시점이 아니었을까.
추측이지만 그리 틀리지는 않을 것 같다.

만약 헬기가 미리 준비되어 있었고, 윤석열과 김용현의 애초 생각대로 비상계엄 선포와 동시에 특전사가 국회를 봉쇄했다면 사태는 어떻게 진전되었을까.
처음 계획대로였다면 특전사가 실탄 5만여발과 케이블타이 등을 가지고 10시 30분경에는 국회에 도착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원식 국회의장과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국회 담을 넘은 시각은 11시 경이다.
국회의 계엄 해제 의결이 무산되었을 수도 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둘째, 지시 불이행.
곽종근은 당일 밤 12시 30분 윤석열 대통령으로부터 두 번째 전화를 받았다. 이 통화에서 윤 대통령은 “의결 정족수가 채워지지 않은 것 같다. 문을 부수고라도 내부에 있는 인원을 끌어내라”고 말했다. 김용현 전 장관이 이미 이전 전화에서 ‘707 특임단 병력을 추가 투입해라’ ‘국회의원이 150명이 되지 않게 막아라’ 따위의 이야기를 계속 이야기한 뒤였다.
하필 예하부대 지휘관들과의 화상회의를 켜둔 상태였고, 부관도 같이 전화를 들을 수 있는 거리에 있는 상태였다. 부대원들 일부가 대통령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다시 머릿속이 하얘진 곽종근은 국회 현장에 있는 김현태 단장에게 전화했다. 다만 대통령의 말을 그대로 전하지는 못했다.
‘혹시 테이저건이나 공포탄을 쏴서라도 진입할 수 있을까?’
김현태는 즉답했다.
‘안 됩니다. 사고 납니다.’
곽종근도 바로 결론을 내렸다.
‘그래 그럼 그건 하지 마.’

그럼에도 특전사 부대원들은 12시 39분에 국회 본청 유리창을 깨고 진입했다.
하지만 당시 화면에 나타난 모습은 의아했다. 특전사 부대원들이 너무 조심스러워 보였다. 아마도 대통령의 지시는 명확했으나, 사령관인 곽종근의 지시는 불명확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12시 35분에 의장석에 착석했다. 그 시점 또는 얼마 뒤 의결정족수인 과반수 이상의 국회의원이 모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안건이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라 의원들은 본회의장 안에서 계속 기다렸다.
시민들도 마음 졸이며 기다렸다. 그 시점 본청 유리창은 깨졌다. 새벽 1시 2분이 되어서야 계엄 해제안 가결이 선포됐다.
곽종근이 윤 대통령의 지시를 그대로 전달해, 부대원들이 문을 부수고 본회의장에 진입하게 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그 과정에서 유혈사태가 일어났다면? 국회의원 다수를 포고령 위반으로 체포하고 이들의 범죄를 일방적으로 발표했다면?
계엄이 사후에 정당화되었을 수도 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잠시 곽종근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윤석열의 쿠데타가 성공했다면 그는 고위직 공무원으로 편안한 여생을 보장받았을지 모른다.
12.12 군사반란에서 전두환 편에 선 군인들은 정권 실세와 국회의원과 장관을 지내며 재산까지 모으면서 떵떵거리며 살았다. 노태우가 그랬고 허삼수가 그랬고 정호용이 그랬다.
윤석열의 쿠데타가 실패한 지금, 그는 내란 혐의로 구속 기소된 상태다. 군 생활은 끝났고, 연금도 사라질 것이다. 여생은 가난하고 비참해질 것이다. 그날 밤 그 순간 이미 예상할 수 있던 현실이었다.
계엄의 밤, 그는 윤석열의 쿠데타가 성공해야 본인의 인생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대한민국과는 다른 이해관계를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태업과 지시 불이행으로 쿠데타 성공 가능성을 낮췄다. 국회와 헌법재판소에서 당시 상황을 기억에 따라 솔직하게 증언한 결과, 윤석열로부터 ‘곽종근의 탄핵공작’이라는 좌표 찍기를 당했다. 그는 지금 극우 유튜브와 태극기부대의 표적이 되어 온갖 모욕을 뒤집어 쓰고 있다.

물론 곽종근이 처음부터 부대를 출동시키지 않았다면 더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의 군인이 민주적으로 선출된 통수권자의 명령을 거부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외부자들은 위헌 불법 명령을 거부해야 한다고 쉽게 이야기하지만, 우리의 민주주의는 무엇이 위헌인지 불법인지를 가리는 주체도 민주적으로 선출된 권력에게 최종적으로 주어져야 한다고 말하는 체제다.
군인 개인이 현장에서 이를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다. 제도적 보완책이 필요한 대목이다.

게다가 선인과 악인은 잘못된 결정 한 번으로 나뉘지 않는다. 사람은 늘 잘못된 결정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뒤 어떻게 행동하느냐다.
한 번 잘못했을 때, 그 잘못을 업고 더 큰 악을 저지르고 더 큰 거짓으로 그 악까지 덮으려고 노력하며 더 나아가 권력과 폭력으로 그 악을 파헤치는 이들을 제압하려 하는 이들이 악인이다.
그 사례를 우리는 친위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직무정지된 현직 대통령, 윤석열에게서 보고 있다.

한 번 잘못했을 때, 그 잘못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다시 잘못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이들이 있다.
어떤 개인적 이익도 얻지 못하더라도 그리 행동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이 선인이다.
그 사례를 우리는 태업과 지시불이행으로 친위쿠데타가 실패하게 했던 친위대의 사령관, 곽종근에게서 보고 있다.


[07. Februar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