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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의 생애

행복나무 Glücksbaum 2007. 7. 22. 15:11

 그리스도교는 예수와 뗄래야 뗄 수 없다. 그러나 그분은 평소에 대체로 팔레스티나 안에서 활동하시면서 주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상대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다. 그분의 비극적 죽음과 영광스런 부활이 있고 나서 예루살렘에 창립된 원시교회도 한동안 예루살렘과 그 주변 유대 지역에 사는 유대인들에게만 전도하였다. 말하자면 민족주의적 종교인 유대교의 테두리 안에서 일어난 일종의 개혁 운동이라 하겠다.
그러다가 33년경 해외 유대 계 그리스도인들의 대표 스테파노가 예루살렘에서 순교하자 박해를 피해 달아난 해외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몇몇이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로 가서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다(행전 11:19-20). 이것이 이방인 복음 전파의 효시라 하겠다. 물론 그전에 필립보가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전도복음을 전한 일이 있고(행전8:26-40), 베드로가 가이사랴로 가서 고르넬리오 백부장 가족에게 세례를 베푼 사례가 있지만(행전10:24-28),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예외 현상에 불과했다.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대대적으로 선전한 공은 아무래도 바나바와 바울에게 돌아간다.
 
그들은 함께 만 1년 동안 안티오키아 교회를 돌본 다음(행11:25-26), 지중해 동부 여러 지역에서 전도했다. 특히 바울은 3차례에 걸쳐 광범위한 선교여행을 했다.(행13:1-21:16). 그의 노력으로 민족적, 지역적 종교가 인류 전체를 상대로 한 세계적 종교로 탈바꿈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울이야 말로 기독교 창시자라고 주장하는 설까지 있을 정도이다. 이는 물론 과장된 표현이지만, 바울이 예수님 다음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보아 틀림없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삶을 꾸린 철저한 그리스도인이요, 지중해 곳곳에 주 예수님을 널리 전한 사도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인생을 관조한 신학자이다.
바울의 생애를 역자면 우선 그가 손수 쓴 편지들을 참고해야 한다. 역사 비평적 방법론을 따르는 신약학계에서는 데살로니카 전서, 고린도 전, 후서, 갈라디아서와 로마서, 필립보서, 빌레몬 등 7편을 친서로 간주한다. 그밖에도 바울이 썼다는 편지가 6편 있으나 이것들은 바울이 손수 쓴 편지들이 아니고 그의 제자들이나 그를 존경하는 후학들이 스승의 이름으로 펴낸 작품들이라는 것이 신약학계의 통설이다. 곧 이어 데살로니카 후서, 골로새서와 에베소서, 디모데 전후서와 디도서는 익명서간들이라는 것이다. 이 여섯 작품들이 비록 익명 서간들이기는 하지만 바울 사상을 계승한 것들이다. 그러므로 사료 가치가 친서들보다는 떨어지지만 바울 사도의 영향을 밝히려면 반드시 참고해야 한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료로서 사도행전을 꼽는다. 사도행전 9장과 13-28장에서는 바울의 개종과 활약상을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꼭 참고해야 할 것이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바울을 묘사할 때도 유대교 계율을 잘 지킨 성실한 유대인으로 가말리엘 1세의 문하생(행22:3, 26:4)으로 또한 예루살렘 교회의 뜻을 받드는 전도사(행15:25-32, 21:20-26)로 기술하곤 했다. 누가는 사도행전 9장과 13- 28장에서 바울의 활약상을 일관된 이야기로 꾸며놓은 까닭에 사도행전에 따라 바울의 활약상을 서술하기란 비교적 쉬운 편이다.
 
1) 출생연도

33년경 그리스도인으로서는 맨 처음으로 스테파노가 예루살렘에서 순교할 때, “사울이라는 젊은이”가 스테파노를 돌로 쳐 죽이던 사람들의 겉옷을 맡았다고 한다(행7:58). 그리고 55년경 에페소에서 필레몬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노인으로 자처한다.(필레몬1:9). 바울의 출생연도는 또는 나이를 가늠케 하는 정보는 이 두 구절뿐인데, 젊은이 및 노인의 기준이 매우 모호한 까닭에 이런 표현을 근거로 바울의 출생 연도를 밝힌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학계에서는 흔히 주후 5-10년 사이에 출생했으리라고 말하곤 하는데 그 역시 막연한 추정에 불과하다.
 
2) 출생지

바울은 다르소에서 태어났다(행9:11,21:39,22:3). 다르소는 지중해로 흐르는 치드누스 강 양편에 자리 잡은 도시로서 지중해에서 16km 거리, 현재 주민은 10만 명 남짓하지만 옛날에는 문화, 정치적으로 중요한 도시였다. 


[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