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älbs/화롯가 이야기들

"운수 좋은 날"

행복나무 Glücksbaum 2007. 11. 24. 09:35

 

얼다가 만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동소문 안에서 인력거꾼 노릇을 하는 김 첨지에게는 오래간만에 운수 좋은 날이었다.

 

앞집 마나님을 전찻길까지 모셔다 드리고 삼십 전, 교원인 듯한 양복장이를 동광학교까지 태워다 주고 오십 전, 거의 눈물 흘릴 만큼 기뻐했다. 더구나 이 팔십 전은 열흘 전 조밥을 먹다 체한 아내에게 설렁탕 한 그릇도 사줄 수도 있다 어미 곁에 배고파 보채는 세 살 먹이 개똥이게 죽을 사줄 수도 있다. 또 학교에서 돌아 나올 때 학생 하나가 "남대문 정거장까지 얼마요." 김 첨지는 움푹한 눈으로 나가지 말라고 애걸하던 아내가 생각났다. "일 원 오십 전만 줍시요." 정거장까지 끌어다 주니 깜짝 놀란 일은 일원 오십 전을 깍지도 않고 준다. 이 돈을 손에 쥐고 졸부나 된 듯이 기뻐한다. 힘이 하나도 없이 돌아오는 친구 치삼을 만났다. 김 첨지는 어떻게 반가운지 선술집에 들어가 호기를 부린다. 훈훈하고 따스하다. 그는 추어탕 곱빼기와 석 잔의 술을 마셨다. 석쇠에 얹힌 떡 두 개, 곱빼기 두 잔을 또 마셨다. 돈이 사십 전.

김 첨지는 치삼의 어깨를 치며 껄껄 웃는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훌쩍훌쩍 울기 시작하였다. "우리 마누라가 죽었다네" 김 첨지는 눈물이 글썽 끌썽한 눈으로 싱그레 웃는다. 김 첨지의 농이다. "죽기는 누가 죽어" 김 첨지는 취중에도 설렁탕을 사 가지고 집에 다다랐다. 그 속에 지배하는 무시무시한 정적, 김 첨지도 이 불길한 침묵을 짐작했는지도 모른다. 방문을 왈칵 열며 발길로 누운 아내의 다리를 몹시 걷어찼다. 발길에 채이는건 나무등걸과 같은 느낌이었다 "이년아, 죽었단 말이냐, 왜 말이 없어. "산 사람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이 죽은 이의 얼굴을 적시었다. "설렁탕을 사다 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이 작품은 우리나라 단편 소설의 역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리얼리즘의 새로운 발전을 이룩한 1920년대 신문학 운동에 있어서 `운수좋은 날'은 중요한 성과를 이루었다. 이 작품을 통해 민중의 문제가 제기되는 선구적 작품으로 그 당시 지식인이 중심인물로 설정되는 경향과는 달리 도시 하층민의 노동자를 등장시키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3 .1 운동 이후 전개되는 민중운동 속에서 작가들도 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것이 신경향파 문학으로 구체화되는데 이 중간지점에 위치하는 것이 바로 이 작품이다. 작품의 전반에 이어지는 행운과 후반부에 닥치는 불행이 묘하게 대립을 이룬 짜임새 있는 구성은 사회제도의 모순을 고발하고 있다.

 

 

현진건(1900-1943) 1920년 ‘개벽’ 지에 ‘희생화’를 발표하여 문단에 등단했다. 백조 동인으로도 활동, 단편 소설의 발전에 기여했다. 그의 작품은 사실주의 경향을 지니고 있으며, 기교가 세련되고 소시민적인 감정이 풍부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는 염상섭과 더불어 한국의 근대 사실주의 문학의 개척자이기도 한데, 그의 사실주의는 일반적 사실주의의 제 3자적인 관찰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응시와 관찰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우리말의 풍부한 활용으로 인한 정확한 적용과 치밀한 구성, 일관된 통일성과 사실성 등이 다른 작가에서는 좀처럼 발견하기 어려운 점이다. 동아일보 사회부장으로 베를린 올림픽의 일장기 말살 사건으로 1년 간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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