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하나의 생명공동체이다. 이미 지식․정보․기술 사회로 진입한 사회도 있으나, 아직도 석기시대와 같은 환경에서 살고 있는 부족들도 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어느 곳에 살든지 모든 인류는 제 삼의 천 년대 안에서 서로를 필요로 하는 범지구적인 생명공동체라는 것이다. 이제는 교회의 선교적 사명이 지구적 환경과 분리될 수 없으며, 우리의 믿음은 개인의 것으로만 만족할 수 없게 되었다. 생명을 살리는 종교만이 희망이 있는 종교이다. 생명을 살리는 헌신이야말로 진정 이 시대에 필요한 종교적 가치이다.
오늘의 현실은 어떤가. 자본주의 시장 논리와 첨단과학기술이 인간과 자연을 파괴하고, 억압하며, 영적이고 윤리적인 가치를 육적이며 도구적인 가치로 변질시키고 있다. 지금 교회가 화급히 해야 할 일은, 더욱 교묘히 자본의 논리와 과학기술로 자신을 은폐하려는 생명 파괴적인 논리의 정체를 파악하고 감시하는 일이다. 나아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힘입어 민족과 인류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자신을 화목 제물로 드리는 교회로 거듭나야 한다. 부름 받은 하느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교회를 근본적으로 부패시키는 내부의 누룩을 직시하고, 신앙과 세계 인식 그리고 행동을 새롭게 해야 한다.
01. 말씀의 회복
말씀은 교회의 주춧돌이다. 말씀 없이 교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말씀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며, 말씀으로 세상을 새롭게 하신다. 말씀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고백케 한다. 모든 은사 역시 말씀을 드러냄으로써 빛을 발한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 교회는 말씀을 제 좋을 대로 해석해서 써먹는다. 말씀보다 은사를 앞세우고 있다. 말씀보다 사람을 상징화하고 있다. 이 모두가 말씀에 폭력을 가하는 일이다(겔22:26). 그들은 앉아서는 안 될 자리에 앉고, 서서는 안 될 자리에 선다. 교회는 그들의 성공을 위한 방편일 뿐이다. 권위주의․물질주의․성공주의가 여기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한국의 교회는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말씀을 사랑하고 가꾸는 열정을 회복해야 한다. 한 인간의 성공이 아니라, 말씀이 제 빛을 발해야 한다.
02. 성만찬의 회복과 교회의 하나 됨
성만찬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구체적인 양태이며 또한 도외시할 수 없는 상징이다. 우리는 각기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음에도 성만찬 안에서 그리스도의 임재를 체현하고, 하나 됨을 성취하며, 참된 사귐과 나눔을 실현한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들은 성찬이 지닌 온전한 하나 됨의 정신을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교회들은 아직도 하나 됨에 대한 의지가 빈약하고, 대립의 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교회가 하나 되기 위해서는 오늘의 교회들이 서로 다른 전통과 상이한 신앙고백과 상징 그리고 강조점의 차이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교회 역사 속에서 ‘교회의 하나 됨’에 대한 그릇된 이해로부터 분열과 분리를 가중시켜왔음도 직시해야 한다. 우리 모두 분열의 전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교회는 본디 하나라는 오랜 신앙고백의 유산을 지니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느님도 하나이시다(엡4:5-6a).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하나 됨으로써 온전한 몸을 이루는 공동체이다. 분열과 분리는 어떤 이유로든 ‘부르심’에 대한 배반이요, ‘소망’에 대한 거역이 아닐 수 없다(골1:21).
03. 교회의 시대적 소명 회복
교회는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음으로서 살아있는 교회가 된다. 우리는 이 같은 신앙을 종말신앙이라고 말한다. 오늘의 교회들은 종말신앙을 상실하고 있다. 오히려 세속의 가치에 편승하여 세상이 주는 편안함과 세상이 얻고자 하는 소유의 향유, 그리고 세상이 추구하는 차별과 독점에 이끌리고 있다. 이는 명백한 시대적 소명의 상실이요, 교회가 교회 되지 못하는 부패의 사슬이다.
교회가 미래를 숙고하게 될 때, 죽음의 그림자에 휘말린 개인적인 불안은 물론 사회와 인류의 집단적인 불안정성을 직시하게 된다. 때문에 교회는 오늘의 시대에 동참하되 시대의 풍조들을 넘어서 미래를 투시해야 한다. 그리고 하느님의 약속을 선포하고, 하느님을 찬양해야 한다.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공동체의 신실한 언어야말로 미래의 기초를 견고하게 하는 일이며, 범지구적인 숙명론과 절망 그리고 허무주의에 대항할 수 있다.
04. 아픔을 승화시키는 예배갱신
오늘의 한국교회 예배는 인간의 고통과 역사의 아픔, 죄에 대한 기억을 소홀히 하고 있다. 이 같은 예배는 성육신을 상실한 무의미한 종교집회에 불과하다. 인간의 고통과 역사의 아픔, 죄에 대한 기억이 없는 예배는 그것이 아무리 축제의 양식을 도입한다 할지라도 진정한 부활의 기쁨일 수 없다. 진정한 자기 변화를 위한 회개 역시 기대할 수 없다. 아픔과 죄의 고백 없는 희망의 선포 역시 교회의 비역사성과 무책임을 가중시킬 뿐이다.
십자가의 은총은 ‘죄 용서’의 은총이지, ‘죄 없음’의 은총이 아님을 상기해야 한다. 때문에 우리들의 예배는 죄 용서의 은혜를 체험하기 위해 역사의 아픔과 개개인의 죄과들이 성실로서 기억되도록 갱신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내일을 여는 예배로 승화되어야 한다.
05. 과학기술주의와 자본주의 논리를 경계함
오늘날 과학기술과 자본의 논리는 범지구적, 초시간적 위력으로 지구촌을 지배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인류는 과학기술과 자본의 논리를 무비판적으로 맹신함으로써 과학주의 신앙과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라는 범세계적 우상에 종속될 위험에 직면해 있다.
우리는 과학기술과 자본의 논리를 신앙과 대립시키는 현실 도피적 사고를 경계하지만, 반면에 신앙을 자본의 논리와 과학기술로 증명하려는 실용주의적 사고를 경계한다. 과학우월주의 역시 경계한다. 자본의 논리와 과학기술은 신앙 안에서 조망되고 해석되어야 하며, 그것들은 궁극적으로 도구적임을 밝힌다.
06. 목회자의 정체성 회복
목회자는 자신의 성직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야 한다. 성직자의 권위는 신성한 직무수행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그 어떤 것으로도 대치될 수 없는 직무이기에 성직자의 권위는 존중된다.
그러나 오늘의 목회자 중에는 자신의 직무를 저버리고 소유와 권위를 탐함으로써 성직에 대한 멸시 내지는 권위상실을 초래하고 있다. 이 같은 목회자들의 잘못된 모습이야말로 개혁의 중심과제임을 밝힌다.
진리추구에 대한 열정 또한 목회자가 지닐 품위를 보전한다. 오늘의 목회자들은 진리 추구에 대한 열정이 희박하다. 오히려 자신의 ‘업적’과 인맥(혈연․지연․학연)을 통해 권위를 보전하고 이익을 확장하려 한다. 이는 목회자가 세속화되어 있음에 다름 아니다. 이들에게 도덕적 품위 상실은 당연한 귀결이다.
07. 세상과 구별되어야 할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사람들이다. 구원받아야 할 ‘세상’은 사랑해야 하지만(요3:16), 하느님을 등지는 세상의 ‘속성’으로부터는 구별되어야 한다(요15:19). 그런데도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요일2:15)는 가르침을 외면하고 있다. 오히려 세상이 유혹하는 것들을 얻기 위해 전념하며, 세상과 분리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더 나아가 우리의 교회들은 이들의 분리에 대한 불안을 매개로 자기 확장을 기도한다.
세상과 분리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그리스도인은 정의와 진실과 사랑을 가까이 할 수 없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의로움’을 제 좋을 대로 풀이하여 세상에서 특별한 신분을 누리려 한다. 이들에게 가난한 자와 함께 하는 ‘복음적 실천’은 성취되지 않는다. 참된 봉사와 친교 역시 제 빛을 발할 수 없다.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분리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세상과 분리된 사람만이 병든 세상을 구원할 수 있으며, 빛과 소금일 수 있다.
08. 민주적 교회의 실현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는 가난한 자들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섬김의 모범을 실천한다는 점에서 ‘사도적인 교회’였음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같은 교회에는 어떤 차별도 존재할 수 없다. 다만 섬김의 기쁨만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남·여의 차별이 있을 수 없으며, 성직 역시 특정인에게만 주어진 독점 지배권일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오늘의 교회와 목회자들은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차별의식을 버리고 ‘부름 받은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실질적인 평등을 실현해야 한다. 특별히 남․여 성에 대한 가부장적 인습을 버려야 한다. 이를 위해 교회 구조의 획기적인 개혁이 이뤄져야 한다.
09. 연합하는 공동체
한국교회의 교파 난립은 ‘그리스도의 빛을 가리고 진리를 혼미케 하는’(고후4:6) 가장 부정적인 현실이다. 그렇다고 교파의 ‘통합’이 이상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물리적인 교파의 통합은 마치 바벨탑처럼 하나님 없는 인간들의 단합과 자기 확장의 욕구일 뿐이다.
때문에 우리는 제각기 분리를 통해 지배하려 했던 죄과를 회개하고, 피차 ‘연합해 가는 교회’로 거듭나야 한다. 그때 비로소 교파는 다를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가 될 것이다.
‘연합하는 공동체’는 교회 내에서만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각자의 교파 이익을 떠난 시민사회의 건강성․공존․번영을 위하는 일에 동참하고, 협력함으로써 더욱 구체적으로 실현될 것을 믿는다.
10. 다원사회 속에서 진리를 수호하고 관용하는 교회
세계는 지금 일원적 가치로부터 다원적 가치로 급속히 이행되고 있다. 서로 다른 지역과 인종과 문화 그리고 종교와 신념들이 상호 소통하며 공존을 향해 교류하는 시대이다. 이럴 때 일원적 가치만을 주장하는 종교적 독선은 관용을 배척하고, 다원적 가치만을 추구하는 다원주의는 신앙의 순수성을 약화시킨다. 그 어느 때보다도 총체적 유연성(코이노이아)이 요청되는 시대이다.
우리는 성부․성자․성령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는다. 하지만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해서 어느 한 편에 대한 일방적인 강조를 경계한다. 특히 ‘기독론적 집중’은 배타적 유일주의와 혼돈하기 쉽고, ‘성령론의 집중’은 무비판적인 혼합주의가 되기 쉽다. 성부․성자․성령 삼위일체는 서로 지배하지 않는 본질상 균등한 사랑의 연대성이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구원의 총체성과 함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인격으로 미래를 개방하신다. 따라서 삼위일체 하느님은 세계 속에서 상호 이해․대화․협력을 원하신다.
우리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종교들과의 대화에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종교들과의 공존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할 수 없으며, 서로 다른 ‘종교인들’이 ‘이웃으로 만남’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더욱 풍성해지는 삶을 경험한다. 이웃으로 만나는 그들은 결코 진리를 약화시키지 않으며, 진리를 더욱 빛 되게 할 것이다.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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