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i-Di/말과 말들...

'정론', 언론의 '정파성' 그리고 생산적인 논쟁 문화

행복나무 Glücksbaum 2022. 11. 22. 20:35

이진의 글을 올린다. 난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정황에 대한 문제제기인지, 정론에 대한 얘기인지… ,

진실을 찾는 독자나 시청자들이 정론을 대하는 태도? .
거짓이 판치는 이 상황에서 정론이란?
어려운 문제를 들고 나왔다.



아래 담론을 올린 이진 변) :
자기만 옳고, 이견을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세상 모두가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 놈이 그 놈이고 그 밥에 그 나물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씨앗이 완고한 바위틈에서 싹을 낼 때는 그 틈새의 아주 작은 균열에 뿌리를 내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바위를 깨는 건 결국 작은 균열이다.
아주 작은 차이가 세상을 바꾼다는 만고의 진리를 망각하면 기껏해야 안방대장을 면치 못한다.
온갖 당위에 휩싸여 주장만 난무한 채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자는 변화와 진보를 팔아 결과적으로 기득권에 봉사한다.
이도 저도 아닌 중도란, 어쩌면 자기기만의 허위의식일 수도 있다. 중립과 침묵은 결과적으로 기득권 편에 서는 일이기 때문이다.

얼마전 이지은 선생은 1986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엘리 위셀'의 잠언 같은 말을 알려주었다.
“편을 드세요. 중립은 피해자가 아니라 압제자를 도와줍니다.
침묵은 괴롭히는 사람을 격려하지 결코 거기에 시달리는 사람을 격려하지 않습니다.”

…….

'정론', 언론의 '정파성' 그리고 생산적인 논쟁 문화

1.
독일에서 본 한국 대선과 정치  토론 문화:
지난 한국 방문때 어느 언론인이 제게 독일정부는 어떻게 녹색당, 사민당, 자민당이 함께 연정을 할 수 있냐고 물으셨던 기억이 난다.
한국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일텐데 내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단지 제도만의 문제가 아니라 토론문화, 기본적인 민주주의 태도라고 본다.

한국에서 정치제도, 선거제도, 언론의 문제등 여러가지 개혁이 필요한 것은 맞지만 시민들의 토론문화도 분명히 더 성숙해져야 할 것 같다.
나는 얼굴 붉히지 않고 국힘당 지지자분들과 대화 나눌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악마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의 소위 범민주진영?에 속하는 분들과 지난 2014년이래 소통하면서 정말 토론하기 힘들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난히 감정적이고 독선적이다. 나는 항상 옳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너무 강하다. 나는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믿음 이외에는 내가 항상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산다. 일베스러운 사람은 거리를 두더라도.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성의껏 듣는 태도가 없다면 사회운동이 성공할 리가 없다.
거대 양당도 당연히 비판받아야하지만 진보세력?이 왜 이렇게 지지부진한 지지율을 얻고 있는지, 왜 대중과 상당한 괴리감, 거리가 있는지 성찰해 볼 때가 아닐까. 본인 하고 싶은 말만 구호처럼 떠들지 말고, 상대방을 무조건 혐오론자로 비하하지 말고 먼저 경청을 하고 대화를 해야 할 때.

2.
이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본 투표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 관련해 지난 2월 말, 독일의 정론지 디 자이트(Die Zeit)에 한국 대선 관련 기사가 게재되었다 (링크는 댓글에).
한국 상황이 낯선 독일 독자를 대상으로 지면이 부족했을 텐데도 기본소득과 같은 사회적 정책이 탄생한 한국의 현실과 그 실현 전망까지 정리한 좋은 기사이다.
최근 이러한 독일 내 시각을 소개하는 클레어함의 기사가 제 짧은 논평과 함께 오마이뉴스에 실렸다 (링크는 댓글).
오늘 보니 다음 포털에 만 6천 개의 추천과 3천 개가 넘는 댓글, 천여 개의 "화나요"가 달렸다. 예상보다 열띤 반응을 보며 '정론', 언론의 '정파성' 그리고 생산적인 논쟁 문화에 대해 생각해본다.

오마이뉴스 기사 마지막 부분에는 "금융시장 양극화에 따른 금융 약자"인 "서민들의 고통"에 대한 서술이 있다.
해당 사회적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면서
적절한 대처 방안이 대선 후보자들의 공약에 포함되었는지를 따져보자는 의도가 기사의 기본적인 출발점이 아니었을까 싶다.

위 자이트지 기사 역시 인터뷰에 응한 민주당 이재명 후보에 대한 선호 여부보다는 한국식 자본주의의 특징에 대한 펠릭스 릴(Felix Lill) 기자의 평소 관심이 완연히 드러난다. 펠릭스 릴 기자는 동아시아에 대해 전문적인 식견을 갖고 있는 언론인이자 연구자이다.
기사를 읽으면 독일에서 보편적인 사회적 의제의 하나로 논의되는 기본 소득이라는 사회적 의제가 한국의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과연 어떻게 다뤄지는지 궁금해하는 그의 모습이 그려진다.

관련 정책에 있어 인터뷰 당사자인 이재명 후보의 공약에 큰 흠이 있었다면 두 기자 모두 이를 누구보다 확실하게 지적했으리라 생각해 본다. 다루는 주제에 대해 글 쓰는 이들의 진정성이 선명히 표출되어 있기에 해보는 짐작이다.
이렇게 표현된 진보적 성향이라는 '정파성'은 진영 논리에 무조건적으로 복무하는 정파성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의견과 판단의 기준을 선명히 밝히는데서 나오는 입장이기에 진영논리와는 반대로 자기 진영에 대해서도 비판적일 수 있으며 생산적인 논쟁에도 도움이 된다.
아니, 이렇게 뚜렷하게 차이를 드러낼수록 진영을 넘은 더욱 생산적인 논쟁이 가능하다.
당연하지만 독일에도 복잡다기한 정치적 진영이 존재한다.
기사가 실린 지면인 독일 디 자이트지에도 분명 정치적 색깔이 있다. 매주 목요일 약 110~120 쪽(!) 분량으로 발간되는 이 시사지는 통상 중도에서 중도좌파 정도의 시각을 담은 매체로 분류된다. 굳이 말하자면 정당 중에서는 사민당(SPD)의 입장과 비견할 만한 방향성을 갖고 있다.
그런데 '그 방향성에도' 디 자이트지는 진영을 넘어 정론지라는 권위를 누린다. 어떠한 입장을 설득력 있게 논증하기 위해서는 반대 입장을 반박해야 할 텐데, 이때 논박하기 쉬운 '허수아비'를 억지로 꾸며내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상대하기 힘든 빼어난 상대를 토론의 파트너로 택해 경쟁하기 때문이다.
사안 하나하나에 대한 '입장'이 아니라 이러한 논증 방식을 기꺼이 감수하는 '태도'를 통해 정론은 정론이 된다.
공론장에서 펼쳐지는 '호적수'와의 논쟁이 정론을 정론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물론 보수진영에도 프랑크푸르트알게마이네(FAZ)와 같은 정론지가 버티고 있다. 이들 역시 보수주의로서의 뚜렷한 정파성을 지녔지만 정론지로서 독일 사회에서 마찬가지로 큰 존경과 신뢰를 받고 있다.
좋은 적수라는 뜻의 '호적수'라는 말은 어쩌면 좀 낡은 표현이 된 것 같기도 하다. 호적수라는 말이 어색해진 현실에는 웬만하면 다 비슷하기를 기대하며 빠른 합의를 강요하고 쉬운 논쟁을 선호하며 차이나는 입장 간의 생산적 경쟁을 기피해 온 우리 사회의 단면이 투영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한다.
반면 '논객’이라는 말이 우스워진 현실도 있는데, 여기에는 진정한 내용적 차이보다는 마치 누가 더 선정적인 표현을 더 빨리 생각했는가의 경쟁이 정치적 논쟁인 양 후퇴해버린 정치문화의 실태가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제대로 된 연동형 비례제 도입 같은 제도적 변화는 물론 필요하다.
그런데 이에 못지않게 필요한 것은 문화와 의식의 변화이다. 제도가 바로 문화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새로운 제도들이 해외로부터 소개되고 도입되어도 실현 과정 과정에서는 제도에 담긴 가치들에 대한 이해 그리고 그 가치 간의 우선순위에 대한 사회 구성원들의 소통과 합의가 필요하다.
어떤 새로운 제도가 도입되어도 그 취지는 과거의 가치와 습관을 고집하는 정치 문화 속에서 쉽게 무력화될 수 있다. 그만큼 정치 문화는 좋건 나쁘건 커다란 위력을 발휘한다.

정치 문화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할 수 있는 변수이다. 그것은 특히 선거나 국가적 위기와 같은 특별한 집단적 경험과 기억 형성을 거치며 질적 변화를 도약적으로 이루어내기도 한다.
연동형 비례제와 내각제, 논쟁과 협치의 문화의 모범으로 독일 사례가 종종 인용된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 분단과 냉전 속에 탄생한 서독 사회는 일반적 인식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진영논리와 권위주의가 지배하던 곳이었다.
독일제국의 발호를 염려하던 승전국이 이식해 놓은 민주주의 제도에서 성숙한 민주주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태동할 수는 없었다.
독일 시민들이 남남갈등 이상으로 극심했던 '서서 갈등'의 폐해를 직시하지 못했다면
현재 독일의 민주주의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독일이든 다른 어느 나라이든 민주주의 문화는 시민들의 선택과 노력의 결과일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는 교과서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이, 청소년, 중장년층, 그리고 노년세대가 모두 함께 자신의 일상의 현장에서 갈등을 표현하고 소통하고 소화할 능력, 즉 갈등 능력을 키우는 과정 자체가 민주주의라는 현실이다.
생산적 경쟁의 정치 문화는 생산적 경쟁이 공동체에 더 많은 가치를 가져왔다는 긍정적 경험의 기억이 축적될 때
비로소 만들어진다.

겉으로 보면 너무 진지해서 재미없어 보이는 독일 사람들에게도 ‘정론지’들을 매일 읽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바쁜 일상을 살고 있는 그들에게도 정론 지의 가격과 두께는 부담스럽다. 정론지가 황색 타블로이드지처럼 많은 판매고를 올릴 수는 없다. 하지만 정론 지는 독일 사회의 공론장에서 훨씬 더 큰 무게를 지닌다. 그 말과 글은 라디오와 공영방송을 통해 거듭 인용되고 정치인과 일반인들의 대화 소재로 활용된다.
정론을 펼치는 언론인들은 사회적 의제를 다루는 무수한 공론의 장에 최고의 전문가로 초대받는다.
다원적 민주주의의 핵심은 다른 정치적 입장 간의 생산적 경쟁이다. 그를 위해 언론과 미디어의 역할은 너무도 중요하다.
스스로 '정론지'라고 말한다고 해도 단순히 편향적인 차원을 넘어 누구보다 더 선정적일 수 있다. 또 뉴미디어라고 분류된 아니 더 넓게 잡아 온라인이라는 이유로 시작부터 열외된 채널을 통해서도 오히려 더욱 깊이 있는 사회적 의제의 공유와 토론이 가능함을 우리 모두 지켜보고 있다.
화제가 되었던 유튜브 삼프로(“삼프로TV 경제의 신과 함께“)의 경우도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 올드미디어와 뉴미디어라는 형식의 차이는 물론 있겠으나, 결국은 어떤 매체이든 결국 누가 앞서의 '정론'을 얘기하는가 하는 질문이 중요하다. 누구나 발언할 수 있게 되었다는 시대라지만 결국 터치스크린 앞에서는 포털의 알고리즘이 지배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선정적이지 않기에 '정론'이라고 불리는 생각이 어떻게 더 많은 이들에 도달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은 답하기 어렵지만
더욱 중요한 질문이 되었다.

어쨌든, 대선 투표 이후에 정치 제도뿐만 아니라 더 좋은 정치 문화에 대한 고민도 꾸준히 이어졌으면 좋겠다.

글, 이진

https://brunch.co.kr/@jeanyhee/24


[07.März.2022]